<61화>
그제야 자일스는 고개를 들어 장교의 얼굴을 확인했다. 낯선 얼굴 위에 익숙한 기시감이 감돌더니 머릿속 아주 깊은 곳에 파묻혔던 기억들이 다시 되살아났다.
자일스가 그녀를 알아보자 장교는 쾌활하게 웃었다. 그러자 사관생도 시절의 모습이 아주 잠시나마 그녀의 얼굴 위를 스쳐 갔다.
“루이제.”
“그래, 그렇게 나오셔야지. 나는 네가 나를 완전히 잊어버리기라도 했나 싶었다니까. 오랜만이다, 자일스 헤센. 이렇게 다시 만나게 되네.”
사관 학교를 다닐 시절에 함께 공부하고 훈련했던 동기가 바로 눈앞에 있었다. 루이제 고틀리프. 그녀는 자일스가 아직 깨끗했을 시절을 그대로 옮겨다 놓은 것 같았다.
의도한 것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으나, 자일스는 루이제를 알아보자마자 더한 절망감에 휩싸였다.
그는 루이제의 계급장을 살폈다. 전쟁 동안 많은 일들이 있었는지 그녀는 이제 소령 계급장을 달고 있었다.
“이제 좀 대화를 해 볼 마음이 들어?”
“네가…… 왜 여기 있는 거지?”
“당분간 너를 맡게 되었어. 누군가는 이 터지기 일보 직전인 폭탄을 맡아 처리해야 할 것 아니겠어?”
“왜 하필 너였던 거야?”
“그 반응은 조금 섭섭해지는군.”
말과는 달리 루이제는 조금도 섭섭해하지 않는 것 같았다.
“여긴 어디지?”
“네가 음식을 먹는다면 궁금한 걸 전부 대답해 주지.”
“굳이 그래야 하나?”
“자일스. 내가 한때 너와 우애 깊은 사관 학교 동기였던 건 사실이지만, 너는 여전히 내게 복종해야 해. 너는 내 부하이자 죄수야. 그 사실을 잊지 마.”
자일스가 선뜻 움직임을 보이지 않자 루이제는 한숨을 쉬며 가슴팍에서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새까맣게 빛나는 총이었다.
그녀가 권총으로 자일스를 겨누며 말했다.
“명령에 따라, 대위.”
자일스는 그녀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천천히 식기를 들었다. 그러자 루이제는 흡족한 얼굴이 되어 총을 다시 거두어 갔다.
그녀는 자일스의 접시 위에 고깃덩어리를 얹어 주기까지 했다. 식욕이 돌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뭐라도 먹었다간 금방 게워 내고 말 것처럼 속이 좋지 않았지만 자일스는 어쩔 수 없이 나이프로 고기를 썰었다.
그가 명령대로 고기 조각을 입에 넣는 모습을 보고 나서야 루이제가 다시 입을 열었다.
“이곳은 너를 위한 안전 가옥이야. 하지만 감옥과 다를 거라는 생각은 하지 마. 겉모습만 화려할 뿐 너를 감금하기 위한 장소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으니까.”
“왜 굳이 번거로운 짓을 하는 거지?”
“자일스. 넌 악명 높은 배신자야. 감옥 안에서 함께 지내게 될 죄수들도 그걸 모르지 않는다고. 네가 얼마나 극악무도한 악마가 되었는지 아직 잘 모르나 보군. 너를 이대로 평범한 감옥에 넣었다면 넌 아마 안전하지 못했을 거야.”
“벨담에서 내 안위를 걱정한다는 말인가?”
“쓸데없는 일이 생겨서 뒤처리를 해야 하는 것보단 낫잖아.”
루이제는 자일스의 잔에 제 것과 똑같은 와인을 따랐다. 그것은 명령이었다. 자일스는 괴상한 명령에 따르기 위해 잔을 들었다.
아무런 맛도 느낄 수가 없었다.
“나를 살려 두는 데에 의미가 있나?”
반항의 의미가 아니라 정말로 묻고 싶었다. 자일스는 스스로가 왜 살아났는지, 왜 식사를 강요받고 있는 건지 의문이었다.
“왜 죽게 두지 않았지? 나를 치료하고, 내 생명을 연장하는 데에 어떤 의미가 있다는 거야?”
“마치 우리가 큰 잘못이라도 저질렀다는 것처럼 말하는군.”
“말해 줘, 루이제.”
“물론 너는 언젠가 죽게 될 거야. 아직은 적절한 때가 되지 않았을 뿐이지. 그때까지 얌전히 기다리는 것이 네가 할 일이고.”
“이해가 안 가. 나를 죽이려면 지금 죽여. 왜 시간을 끌어야만 하는 거지?”
“자일스. 내가 말할 수 있는 건 단 하나야. 너는 죽는 순간까지도 국가에 충성하게 될 거라는 사실.”
루이제는 마치 축배를 올리듯이 와인 잔을 들어 올리며 씩 웃었다.
“네 죽음은 결코 불명예스럽지 않을 거야. 그 사실을 기뻐하라고. 때가 되면 우리가 다 알아서 해 줄 테니까 너는 그동안 남은 시간을 즐기도록 해. 이곳에서 조용히 살 수 있게 해 줄 테니까. 책이 필요하면 넣어 줄 수도 있어.”
자일스는 여전히 루이제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더 묻지 않았다. 결국 중요한 건 언젠가 처형을 당하게 되리라는 사실이었다.
그 사실만으로도 모든 것이 충분했다.
“환자는 잘 먹어야 해. 사양 말고 들어. 네가 접시를 다 비우기 전까지는 내보내 주지 않을 거야.”
한편 루이제는 자일스가 제 몫의 음식을 묵묵히 먹는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사관 학교 시절에 가졌던 감정들은 이미 잊힌 지 오래다.
세월이 오래 지났을뿐더러, 커다란 전쟁을 겪으면서 가슴속에 남아 있던 과거의 흔적들은 물에 씻겨 나가듯 깨끗이 사라졌다.
자일스 헤센은 그녀의 임무일 뿐, 그 이상의 의미를 가지지 못했다.
어차피 죽을 사람일 뿐이다.
“왜 안나에 대해서는 안 물어봐? 엘로이즈 비스마르 양 말이야.”
안나의 이름이 나오자 자일스의 움직임이 잠시 멎었다. 무기력하게 죽어 있던 눈동자에 잠시나마 빛이 돌아왔다. 자일스는 루이제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웃고 있었다.
“안나를 사랑했잖아. 당연히 궁금할 거라 생각했는데.”
“알고 있는 게 있다면 말해.”
“어디에 있는지 알려 줄 수는 없지만 적어도 안전하다는 사실만은 말해 주지. 그런데 말이야, 자일스. 내가 흥미로운 이야기를 전달받아서 그러는데…… 사실인지 네 입으로 확인시켜 줄 수 있나?”
루이제는 팔꿈치를 식탁 위에 올려놓고서 자일스 쪽으로 살짝 상체를 기울였다.
“벨담으로 기어들어 온 게 네 의지였다는데, 그게 사실이야?”
“……뭐라고?”
“안나를 살리기 위해 죽음까지도 감수하고 벨담 국경으로 향했다는 게 사실이냔 말이야.”
그녀가 왜 진실을 알고 있지? 뭔가가 잘못되었다. 원래대로라면 안나는 자일스를 피해 국경으로 도망쳐 온 사람이어야만 했다.
“그걸 누구에게서 전해 들었지?”
“안나가 직접 그렇게 말했다던데.”
자일스의 표정을 살피던 루이제가 돌연 웃음을 터뜨렸다.
“오해하지 마, 절대 심문 절차 같은 건 안 밟았어. 안나는 아주 편안한 환경에서 지내고 있어. 다 자의로 말한 거라고. 내 질문에 대답부터 해 봐, 자일스. 정말 그게 사실이야?”
여기서 거짓말을 해 봤자 무슨 의미가 있을까? 루이제는 이미 모든 것을 다 알고 온 게 분명했다. 안나가 직접 진실을 말했다는 건 믿기지 않는 일이었으나, 자일스는 결국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 사실이야.”
“그럼 처음부터 알베르트 말이 맞았던 거네. 너를 쥐고 흔들 수 있는 약점이 있다면 그건 안나뿐이었어.”
“제발 그녀를 건드리지 마. 그녀에겐 아무 잘못도 없어.”
“알아, 알아. 진정해. 안나는 괜찮을 거야.”
냅킨으로 입을 닦은 그녀는 옆자리 의자 위에 놓여 있던 노트 비슷한 책을 자일스에게 건넸다.
“남은 시간 동안 이거나 읽어 봐. 너도 바깥세상에서 너에 대해 뭐라고 떠들어 댔는지 알 권리는 있으니까.”
자일스는 책을 펼쳤다. 그것은 신문 기사를 스크랩해 놓은 것이었다. 온통 그를 낱낱이 파헤치고 물어뜯는 기사뿐이었다. 내용을 빠르게 훑던 자일스는 어느 지점에서 시선을 멈추었다.
신문 기사에 안나의 이름과 사진이 들어가 있었다.
*
아렌트가 한 차례 예고했었던 대로, 사람들은 내가 바깥에 나가도록 내버려 두지 않았다. 나는 의사의 허락이 떨어질 때까지 병실에 갇혀서 생활해야만 했다.
병실에서 할 수 있는 일들은 제한적이었다. 간호사가 내게 카드놀이를 가르쳐 주겠다고 제안했지만, 그조차 오래가지는 못했다. 애초에 간호사가 병실에 머무르는 시간은 길지도 않았다.
혼자서 카드를 뒤적거리던 나는 제풀에 지쳐 카드를 든 손을 무릎 위로 떨어뜨렸다. 내게 카드놀이를 가르쳐 준 간호사는 실력이 썩 좋은 편이 아니었다. 그녀가 횡설수설하는 바람에 나는 아직도 규칙을 헷갈리고 있었다.
나는 눈을 감았다. 자일스라면 명료하게 설명해 주었을 텐데. 그가 옆에 있었다면 어땠을까? 내 옆자리에 앉아 특유의 담담한 목소리로 각 카드의 역할을 설명하는 자일스를 상상했다.
나는 지금도 자일스의 얼굴을 생생하게 그려 낼 수 있는데 그는 내 곁에 없었다. 어쩌면 영영 돌아오지 않을지도 몰랐다. 그게 현실이었다.
밤사이 잠도 자지 않고 생각을 해 보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생각만 들었다. 분명 자일스는 경비가 삼엄한 감옥에 갇혀 있을 텐데 내가 무슨 수로 그를 구한단 말인가?
온 나라가 그의 처형을 원하고 있었다. 벨담이라는 거대한 국가를 앞에 둔 나는 힘없고 무능한 존재로 느껴졌다.
이제 아무도 나를 죽이려 들지 않게 되었지만, 나는 울고 싶어졌다. 안전한 삶이라는 목표를 이루었는데 전혀 행복하지 않았다. 물론 자일스는 많은 사람들을 죽였다. 누군가의 눈에는 정말 악마로 비칠지 몰랐다. 하지만 적어도 내게는 아니었다…….
자일스는 내 목숨을 살렸다. 머리맡에서 사랑한다고 속삭이던 그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뭐라도 해야 하는데, 나는 발만 동동 구르고 있을 뿐 그를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정작 자일스는 내 생존을 위해 모든 것을 바쳤는데.
내가 혼자서 무력감에 빠져 있을 때, 간호사가 식사가 든 쟁반을 들고 들어왔다. 나는 이제 그녀의 이름이 로테라는 사실을 알았다.
로테는 환하게 웃음 지으며 내 옆에 쟁반을 내려놓았다. 나는 메뉴가 뭔지 궁금하지도 않았다.
“자, 어서 드세요. 잘 먹어야 빨리 낫죠. 어서 저택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으세요? 제가 그런 저택을 갖고 있었다면 한시라도 빨리 돌아가려고 회복에 힘썼을 거예요.”
“잘 모르겠어요.”
“하긴, 아가씨께서는 아직 그 저택이 얼마나 멋지고 커다란지 모르시겠군요. 저라고 잘 아는 건 아니에요. 다만 상상만 해 볼 수 있을 뿐이죠.”
내가 대답하지 않자 로테는 걱정스런 낯빛으로 나를 살폈다.
“왜 그러세요? 입맛이 없으세요? 아니면 어디 불편하신 데라도 있으신 건가요?”
“그냥…… 식사를 해 봐야 무슨 소용인가 싶어서요.”
나는 결국 그녀에게 본심을 털어놓고 말았다. 정말로 그런 생각이 내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조금이라도 진정할라치면 자일스가 총살을 당할 날이 가까워지고 있다는 사실이 불쑥 떠올랐다.
그런 생각들은 나를 한없이 무기력하게 만들었다.
로테는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아차린 것 같았다. 내 안색을 관찰하던 그녀가 조심스레 물어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