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을 사랑한 건 살아남기 위해서였다-60화 (60/93)

<60화>

“재판은…… 언제 열리는데요?”

“헤센에 대해 궁금한 게 많으신가 보군요.”

“관심이 없다면 그게 더 이상한 것 아닌가요? 내게도 알아야 할 권리가 있어요. 난 그를 이곳으로 데려온 사람이라고요.”

내가 항의하자 아렌트는 군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여전히 그는 어떠한 감정도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

“아직 확실한 건 아무것도 없습니다. 헤센이 지금 당장 벨담으로 돌아오리라는 건 저희도 예상치 못한 일이었으니까 말입니다. 준비가 되면 모든 절차를 밟게 될 겁니다. 레이디께서는 지켜보시기만 하면 됩니다.”

그가 자세를 고쳐 앉았다. 우리가 대화를 나누는 도중에도 수프는 천천히 식어 가고 있었다. 아침 식사 따위는 모두의 관심 밖으로 사라진 지 오래였다.

“바라시는 대로, 저희는 당신의 신변을 보장해 드릴 겁니다. 단순히 헤센을 데려오셨다는 이유만으로는 아닙니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당신에 대해 알고 있습니다. 자일스 헤센의 연인으로서 말입니다. 벨담 역사상 최악의 반역자와 엮이는 게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설명드리지 않아도 아시겠지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자일스 헤센이 사랑한 여자라는 타이틀은 내게 독이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나도 그쯤은 알고 있었다.

“아마 언론에서 당신을 포섭하기 위해 몰려들 겁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벨담에서 가장 화제가 되는 인물과 사랑을 나눈 여자의 이야기가 신문에 실린다면 그 신문사는 얼마나 많은 돈을 거머쥘 수 있겠습니까? 찍어 낼 새도 없이 불티나게 팔릴 겁니다. 저희는 그런 불필요한 일이 일어나는 걸 원치 않습니다.”

“나를 어떻게 보호하겠다는 건가요?”

“사저에 가 계십시오. 당분간은 나오지 말고 그 안에서만 지내시는 게 좋을 겁니다. 아직 당신의 얼굴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혹시 모르니까요. 저희 쪽에서도 조치를 취할 겁니다.”

아렌트가 내 표정을 빠르게 훑더니 덧붙였다.

“비스마르 백작가의 저택 말입니다.”

“저택이 아직 남아 있단 말인가요?”

“선대 백작께서 잠시 입스윈으로 거처를 옮기셨지만, 그분은 여전히 벨담에 본적을 둔 귀족입니다. 미처 정리하지 못하신 재산 일부가 벨담에 있습니다. 이제는 살해당하셨으니 그 모든 것들이 당신의 몫이겠지요. 퇴원하실 때가 되면 사용인이 당신을 저택으로 안내하러 찾아올 겁니다.”

백작이 소유했던 모든 재산이 내 것이 되었다는 건 쉬이 와닿지 않는 사실이었다. 실질적으로 나는 가문의 일원조차 아니었는데.

나는 백작의 딸이 아니라 그에게 이용당하는 인형에 더 가까웠다.

“떠나기 전에 묻고 싶은 게 몇 가지 있습니다.”

“말씀하세요.”

“몇 달 전, 저희가 헤센을 벨담으로 호송하려 시도했던 적이 있었다는 건 아시겠지요.”

나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는 오리엔트 특급열차 작전에 대해 말하고 있었다. 원래대로라면 내가 그 작전의 주요한 역할을 맡아야 했다.

“하지만 그 노력은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입스윈 측에서 그들을 신속하게 제압할 수 있던 건 내 도움이 컸다고 들었다. 내가 피아노를 연주하였기 때문에 기차를 빨리 추적할 수 있었다고 말이다.

나는 아렌트가 무엇을 묻고자 하는지 알 것도 같았다.

“내가 왜 그랬는지 알고 싶으신 거죠?”

“달갑지 않으리란 사실은 알고 있지만, 저희 쪽에서는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는 부분이니 양해를 부탁드립니다.”

“아니에요. 나도 이해해요. 당연히 묻고 싶겠죠. 엄밀히 말하자면 나는 그때 당신들을 배신했던 거니까요, 그렇죠?”

아렌트는 대답하지 않았다. 굳이 답을 할 필요도 없는 질문이었으니까.

자일스가 했던 말이 다시 떠올랐다. 내 편이 되지 마, 안나.

나는 온 국가의 증오를 받는 몸이야.

거기에 휘말려 들어서는 안 돼.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자일스를 버릴 수 없었다. 버리고 싶지 않았다. 안온한 일상, 자유 그리고 막대한 재산…… 모든 것을 얻었다는 기쁨보다는 그에 대한 상실감과 두려움이 더욱 나를 지배하고 있었다.

나는 본능적으로 알았다. 자일스가 죽는 모습을 보는 순간, 내가 스스로 지옥 속에 굴러떨어질 거라는 사실을. 행복을 흉내 낼 수는 있겠지만 절대 진정한 행복을 누릴 수는 없게 될 것이다.

난 한때 내 귀에 사랑을 속삭이고, 나 때문에 근근이 삶을 이어 갈 수 있었다고 말한 남자를 금방 잊을 수 있을 만큼 되어먹지 못한 여자가 될 자신은 없었다.

그래서 나는 내 마음을 정했다.

나는 자일스를 배신하지 않을 것이다.

그가 끝까지 나를 배신하지 않았듯이.

“나는 자일스가 벨담으로 가기를 원하지 않았어요. 벨담으로 가게 되면 죽을 게 뻔하니까요. 그것도 아주 처참하게 죽을 거라 생각했어요.”

“그가 죽기를 원하지 않았다는 말씀이십니까?”

“저는 그를 사랑했으니까요. 아니, 지금도 그래요.”

“자일스 헤센을 사랑한다고요.”

자일스는 내게 제 편을 들지 말라고 했지만 나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그가 온 국가를 적으로 돌렸으니 나 하나만이라도 그의 편이 되어야 했다. 이게 현명한 선택인지는 확신할 수 없지만, 그래도 나는 자일스에게 돌을 던지고 싶지 않았다.

전략적으로 옳든 옳지 않든, 나는 내 진심에 대해 거짓말을 하고 싶지 않았다. 할 수 없었다는 쪽이 더 정확할 것이다. 자일스가 죽게 될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나는 도저히 거짓을 꾸며 낼 수가 없었다.

“그럼 왜 그런 겁니까?”

“뭘요?”

“당신은 자일스 헤센을 벨담까지 데려온 장본인이 아닙니까. 그를 사랑한다면, 왜 그런 일을 벌인 거죠?”

“살아야 했으니까요. 입스윈이 우리를 죽이려 들었으니까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어요. 그곳에 남으면 우리 둘 다 죽을 게 뻔하니까. 사실 나는 벨담으로 오고 싶지 않았어요. 이곳에 스스로 잡혀 들어온 건 오로지 자일스의 선택이었어요. 그는 날 살리기 위해서 스스로 죽음을 선택한 거예요.”

아렌트는 내 이야기가 참 흥미롭다는 듯이 집중하고 있었다. 그도 벨담 사람인 이상, 내 이야기를 듣는다고 해서 자일스에 대한 입장을 바꾸게 될 거라 기대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나는 말해야만 했다.

“그게 진실이에요.”

그도 누군가에게는 평범한 인간이었다는 사실을 말하고 싶었다.

인간을 넘어서서, 사랑받을 가치가 있었던 존재였음을.

적어도 내게는 그랬다. 그리고 나는 그 사실을 내 손으로 변질시키고 싶지 않았다.

내가 마지막으로 자일스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그거라면, 나는 마땅히 그 일을 할 것이다.

*

자일스 헤센은 새하얀 방에서 눈을 떴다. 처음에는 현실 감각을 되찾기가 쉽지 않았다. 그가 눈을 떴다는 사실 자체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자일스는 국경 앞에서 총을 맞은 사실을 기억했다. 그때 죽었어야 했는데…… 왜, 나는 이곳에서 다시 깨어난 거지?

그는 스스로의 몸을 움직여 보았다. 그럴수록 살아 있다는 감각은 더욱 생생해졌다. 총을 맞은 부위가 아릿하게 아파 오는 것 또한 그랬다. 누군가 치료를 해 두었는지 피를 흘린 흔적은 말끔히 없어지고 난 후였다.

무거운 놋쇠로 만든 수갑이 그의 손목을 결박한 채로 쩔그렁거리는 소리를 냈다. 그 수갑은 침대 헤드에 쇠사슬로 이어져 있어서 그는 침대 밖을 벗어날 수조차 없었다.

자일스는 일어나 앉아서 가만히 생각하다 곧 눈을 감았다. 그렇게 많은 죄를 저지른 주제에 깔끔하게 죽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한 것이 그의 오만이었다. 그 자리에서 즉사하기에 자일스는 너무나도 많은 죄를 등에 업고 있었다.

누군가 방문을 열고 들어왔다. 자일스는 상대방이 입은 제복만 보고도 그가 벨담 군인이라는 사실을 바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군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와 눈을 마주치지도 않았다. 다만 침대 헤드에 고정되어 있던 쇠사슬을 풀어 끌어당겼을 뿐이었다.

“나와.”

자일스는 묵묵히 그의 말을 따랐다. 군인이 끌어당기는 대로 걸으면서 그는 슬쩍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곳은 감옥이라기에는 너무 호사스러운 공간이었다. 다른 죄수들 따위는 보이지도 않았다. 감옥이 아니라 저택에 더욱 가까워 보이는 곳이었다.

다만 고요하고 무거운 침묵이 저택 전체를 지배하고 있었다.

군인은 자일스를 또 다른 방으로 이끌었다. 창문이 모조리 막힌 탓에 환한 전등이 태양을 대신하고 있었다. 이제 자일스의 앞에는 음식이 차려진 식탁이 자리하고 있었다.

“데려왔습니다.”

식탁 중앙에 또 다른 군인 하나가 앉아서 자일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일반 사병이 아니라 고위 장교였다. 장교가 고개를 끄덕이자 자일스를 데려왔던 군인은 사슬을 놓고 물러났다. 그는 이제 그들과 멀찍이 떨어진 곳에 서서 자일스를 가만히 응시하고 있었다.

“앉아.”

장교가 명령했다. 자일스는 이게 무슨 상황인지 혼란스러워하면서도 그녀의 명령에 따랐다. 그는 감옥도 아닌 곳에 와있었고, 군인들은 그를 고문하는 대신 좋은 음식이 차려진 식탁 앞에 그를 대령시켰다.

어쩌면 이것은 새로운 고문 방법일지도 모른다. 그가 좋은 대접을 받고 있다는 착각을 머릿속에 심어 놓고서, 희망이 무럭무럭 자라날 때쯤 무참히 짓밟는 식의 고문 말이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장교가 말을 걸어왔다.

“배고프지 않나? 미안하지만 쇠사슬은 풀어 줄 수 없어. 그래도 포크질은 할 수 있겠지, 안 그래?”

자일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애초에 그는 음식에 대한 갈망을 전혀 느낄 수가 없었다. 살아남았다는 절망감은 오직 공허함만을 남겨 두었다.

“왜 대답이 없어.”

“……저는 괜찮습니다.”

“이건 권유가 아니야. 명령이지.”

“저는 이제 벨담 군인조차 아닙니다.”

“아무도 자네에게 퇴역하라는 허가를 내린 적 없는데.”

“제가 저지른 일들은…….”

“한때 벨담에 꼿꼿이 뿌리내렸던 귀족들을 깡그리 쓸어버렸지. 뭐, 그래. 그건 나도 알고 있어. 그러니까 굳이 설명하려 하지 않아도 돼. 벨담 사람이라면 세 살배기 아기도 자네의 화려한 전적에 대해서는 알고 있을 테니까.”

장교는 핏빛 와인을 따라 마셨다. 그녀가 무엇을 하든 자일스는 여전히 하얀 접시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음식이 마음에 안 드나 보군.”

“…….”

“계속 그렇게 나를 모른 척할 텐가, 대위?”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