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화>
9. 벨담으로
나는 거칠게 숨을 들이마시며 눈을 떴다. 흡사 죽다 살아난 사람처럼 말이다. 그러자 누군가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속삭였다.
“레이디, 조금만 더 쉬세요. 아직 이른 새벽이에요.”
나는 고개를 저으며 횡설수설 말하려 했다.
“아니에요, 나는…… 나는 쉬고 싶지 않아요. 나는…….”
“괜찮아요. 이제 모든 것이 괜찮아졌어요.”
이름 모를 여자의 위로는 내 눈을 감기기에 충분했다. 나는 눈을 감자마자 현실의 장벽 너머로 가라앉았다.
이제 내 눈앞엔 자일스가 있었다. 자일스 헤센. 나를 몇 번이나 괴로움에 몸서리치도록 만든 남자. 지금도 그랬다. 나는 자일스 때문에 괴로웠다. 하루 종일 소리 내어 울어도 부족할 만큼.
그가 나를 붙잡고 말했다.
“안나, 기억해. 네가 나를 벨담으로 데려온 사람이라는 걸 알면 그들이 너를 반드시 보호해 줄 거야. 벨담에서 가장 증오하는 배신자가 바로 나니까. 너는 벨담 정보국도 하지 못한 일을 해낸 거야. 보호받지 못할 이유가 없어.”
아니야, 난 그러고 싶지 않아. 살기 위해 당신을 낭떠러지 아래로 밀어 버리고 싶지 않아.
나 때문에 당신이 비참하게 죽게 되는 건 싫어.
“벨담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해. 자일스 헤센이 너에게 앙심을 품고 죽이려 들었다고. 그래서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 국경까지 도망쳐 왔다고 해. 복부에 부상을 입은 것도 다 나 때문이었다고 말해.”
내가 왜 그래야 해! 내가 왜 그런 비열한 거짓말을 해야 해?
나는 소리쳤지만 마치 영화 속 주인공에게 말을 거는 것처럼 내 말들은 자일스에게 전달되지 않았다.
“절대 나를 옹호하지 마. 내 편이 되지 마, 안나. 나는 온 국가의 증오를 받는 몸이야. 거기에 휘말려 들어서는 안 돼.”
싫어. 당신은 내게 이런 짓을 할 권리가 없어.
난 거짓말을 하지 않을 거야.
당신이 죽지 않았으면 좋겠어. 나와 함께 살아남았으면 좋겠어. 왜냐하면…….
“벨담으로 가서 살아. 네가 누리지 못했던 것들이 그곳에서 널 기다리고 있을 거야. 부디 행복하게 살아. 그곳에선 아무도 널 붙잡으려 하지 않을 거야.”
난 아직 당신을 좋아한단 말이야.
나에게 그런 짓을 시키지 마.
자일스는 눈물을 흘렸다. 나는 항상 감정 표현에 인색하던 그가 진정으로 슬퍼하며 눈물을 흘리는 것을 그 날 처음 보았다.
“안나, 미안해. 너에게 고통을 주려던 건 아니었어. 다만 나는 널 잃게 될 것이 죽을 만큼 두려웠던 거야. 그래서 너를 가둔 거였어. 그리고 그게 전부 너를 위한 거라고 스스로를 정당화시켰어. 미안해. 나는 결국 내 자신을 위해 널 악몽 속에 빠뜨리고 말았어.”
사과는 나중에 해, 자일스.
그게 네가 죽어야 할 이유가 되지는 못해.
나는 그의 품에 안겼다. 자일스는 마지막으로 나를 껴안으며 떨고 있었다. 그도 두려운 것이다. 자일스가 그토록 피하려 애썼던 죽음이 다가오고 있었다.
“괜찮아. 나는 이제야 모든 것을 원래 그래야 했던 대로 돌려놓는 것뿐이야. 나는 죗값을 치를 테고, 너는…… 넌 그곳에서 행복할 거야. 널 진정으로 생각한다면 뭘 해야 하는지 이제야 알았어. 나는 아주 오래전부터 너를 놔줘야 했어. 너를 품에 끌어안고 있으려 해선 안 되는 거였어.”
나는 당신에게 돌을 던지고 싶지 않아.
자유든, 행복이든…… 사랑하는 이를 희생함으로써 얻어져서는 안 되는 거잖아.
자일스는 내게 마지막 인사를 건넸다.
“행복해야 해, 안나. 내가 널 사랑했다는 사실을 잊지 마.”
내가 그에게 무어라 대답하려던 그때였다. 자일스는 이미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후였다. 그가 사라졌다. 이제 다시는 돌아오지 않으리란 사실을 아는 순간…….
나는 잠에서 깨어나 눈을 떴다.
내가 누워 있는 곳은 아주 크고 화려한 병실이었다. 커다란 창을 반쯤 가린 린넨 커튼이 바람에 흔들렸고, 하얀 대리석으로 만든 벽을 갖가지 유화가 장식하고 있었다. 내 옆 테이블에는 튤립을 정성스레 꽂아 놓은 화병이 있었다.
아침 햇살을 받으며 가만히 누워 있던 것도 잠시. 나는 명백한 목표 하나를 떠올렸다.
“자일스.”
자일스를 찾아야 했다. 그가 총에 맞고 쓰러지는 걸 내가 봤다. 하지만 아직 죽지는 않았으리라. 그가 죽었을 리 없었다. 너무 늦기 전에 내가 먼저 그를 찾아야 했다.
침대에서 빠져나가려던 그 순간, 하얀 앞치마를 두른 간호사가 식사가 든 쟁반을 들고 병실로 들어왔다. 그녀는 나를 보자마자 환하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레이디, 일어나셨군요. 마침 식사하실 시간이었는데 잘되었어요.”
“내 옷 어디 있어요?”
“괜찮아요. 잃어버린 것 하나 없이 저희가 잘 보관해 두었으니까요.”
“식사는 됐어요. 난 여기서 나갈 거예요.”
“어디로 가시려고요?”
“찾으러 가야 할 사람이 있어요. 그가, 그 사람이…….”
“아, 안 그래도 지금 오고 계시는 중이에요. 조금만 기다리시면 곧 이곳에서 만나게 되실 겁니다. 그러니까 진정하고 식사하세요. 배고프시잖아요.”
간호사는 침대를 벗어나려는 나를 다시 얌전히 앉혀 놓았다.
그녀가 들고 온 쟁반 위에 따뜻한 야채수프와 커다란 빵 몇 조각이 있었다. 간호사의 말대로 배가 고픈 건 사실이었다. 이럴 시간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나는 하는 수 없이 수프를 떠먹었다.
간호사는 그런 나를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레이디 엘로이즈 비스마르, 그동안 고생 많으셨지요? 이제 안심하셔도 돼요. 레이디께서는 안전하게 벨담에 도착하셨으니까요.”
“뭐라고요?”
나는 숟가락으로 수프를 뜨던 것을 멈추고 그녀를 쳐다보았다.
“맞아요, 여긴 벨담이에요. 정말 믿기지 않으시죠?”
“그게 아니라…… 방금 나를 뭐라고 부른 거예요?”
“레이디 엘로이즈 비스마르. 비스마르 백작가의 가주이자 상속녀이신 분이잖아요.”
내가 할말을 잇지 못하는 사이, 또 다른 사람이 병실 문을 밀고 들어왔다. 처음 보는 남자였다. 정장을 반듯하게 차려입은 그는 중년으로 들어서는 나이대의 남자였는데, 나는 그가 지위 높은 계급을 가졌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간호사가 그를 보자마자 자리에서 일어나 물러났기 때문이다.
남자가 간호사에게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이제 자리를 비우셔도 됩니다.”
간호사는 군말하지 않고 병실을 나가 버렸다.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는 사람은 나뿐이었다. 생각해 보니 나는 내가 정확히 어디로 옮겨 온 건지도 모르고 있었다.
남자는 간호사가 앉았던 자리에 착석해 나를 바라보았다. 가까이서 보니 그는 날카로운 인상의 소유자였다. 회색 눈동자가 쉬이 다가가기 힘든 인상을 한층 더 고조시키고 있었다.
“저는 신경 쓰지 말고 드시죠. 아마 식으면 맛이 없어질 겁니다.”
“당신은 누구죠?”
“벨담 정보국에서 나왔습니다. 아렌트 홀츠만입니다.”
“정보국 사람이 나한테는 무슨 볼일이에요?”
“보호를 받고 싶어서 벨담 국경까지 도망쳐 나오신 것 아니었습니까?”
그 순간 자일스가 했던 말이 겹쳐 들렸다. ‘벨담이 너를 보호해 줄 거야.’ 나는 자일스의 목숨을 대가로 벨담에서 안전하게 살 권리를 얻은 것이다. 깨어진 유리 파편처럼 정신없이 흩어졌던 의식이 다시금 가지런히 제자리를 되찾았다.
나는 현명하게 행동해야만 했다. 선택 또한 내 몫이었다.
이대로 내가 바라 마지않았던 평온한 삶을 누릴 것인가. 아니면 자일스를 포기하지 않을 것인가…….
지금 당장 내가 알고 싶은 건 자일스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 그는 어떻게 되었는지, 그리고 살아 있기는 한 건지였지만 아렌트에게 물어도 될지 확신할 수 없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접근하기로 했다.
“여기가 정확히 어딘지부터 알려 줘요.”
“당신은 수도로 옮겨 왔습니다. 이곳은 홀슈타인의 슐레스비히 국립병원입니다. 상처를 크게 입으신 것 같아 먼저 치료를 진행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홀슈타인이라고요?”
“예, 말씀드린 대로 당신은 수도에 있습니다.”
“그럼…… 자일스는, 자일스 헤센은 어디에 있죠?”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이제 당신에게 접근하지 못할 테니까요.”
나는 그가 죽었을까 봐 두려웠다. 보통 총을 맞은 사람은 살아남기 힘들다는 사실을 안다.
“그는, 죽었나요?”
아렌트는 얼른 대답하지 않고 속을 알 수 없는 눈동자로 나를 잠시 쳐다보았다. 그의 눈에 자일스를 걱정하는 것처럼 비쳤을까 봐 불안했다.
잠시 후 그가 대답했다. 무감한 표정과 목소리는 그대로였다.
“저도 그런 소식을 들려드릴 수 있었다면 좋겠지만 유감스럽게도 아직은 살아 있습니다. 하지만 안전한 곳에 구금해 놓았으니 헤센에 대해서는 더 이상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는 세상과 격리되었습니다. 어쩌면 헤센에게도 다행스런 일일지 모르죠. 벨담에서 그를 싫어하지 않는 사람을 찾기도 힘들 테니까요.”
“아직은 살아 있다는 건, 그를 곧 죽이겠다는 건가요?”
“사형 선고가 내려지면 그렇겠죠.”
적어도 아직 자일스를 죽일지 살려 둘지 결정은 내려지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자일스는 재판을 받게 될 것이다. 하지만 나는 높은 확률로 그가 사형 선고를 받을 거라고 생각했다.
앨버트는 내게 말했었다. 자일스는 패망한 국가에 대한 분노를 우회해 줄 아주 좋은 제물이자 희생양이라고.
하지만…… 내가 뭘 어찌할 수 있을까? 난 자일스를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를 만나러 갈 수 있다고 해도 반가워하는 기색조차 내지 못할 것이다.
가슴이 답답했다. 자일스는 내게 안온한 삶을 선물해 줬는데 나는 전혀 고마워하지도, 기뻐하지도 못하고 있었다.
나는 말 그대로 그를 제물로 바쳐서 평화를 얻었다. 그건 옳지 못한 일이었다. 자일스는 두 번이나 내 목숨을 구했고, 비록 내게 수많은 잘못을 저지르기는 했지만 언제나 내게 사랑을 표현하고 싶어 했다.
그런 사람의 피로 얼룩진 자유 같은 건 의미가 없었다.
내 몸은 자유를 찾을지언정 내 영혼은 영원히 죄책감이라는 무거운 사슬에 묶인 채 고통스런 비명을 지를 테니까.
내가 원한 건 내 손으로 직접 쟁취해 낸 승리와도 같은 자유였지, 타인을 희생하는 게 아니었다. 절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