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화>
우리는 더욱 몸을 사렸지만 걸음을 멈추지는 않았다. 나는 자일스를 계속 따라가며 물었다.
“당신도 표적이 된 거야?”
“네가 귀족인 걸 알면서도 도왔으니까. 지금도 너를 데리고 도망치고 있고.”
“그럼 잡히면…….”
그 또한 죽게 되겠구나. 처음부터 예견된 일이기는 했다. 그래서 나는 더 이상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자일스가 내 안위에 그토록 신경을 썼던 것 또한 내 일이 더 이상 남의 일이기만은 아니었기 때문이리라.
“헤센, 당장 항복해!”
혁명군이 다시 외쳤지만 자일스와 나는 못 들은 척 계속해서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아무리 걸어도 숲이 끝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나는 점점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우리 제대로 가고 있는 거 맞아?”
“걱정 말고 따라와. 조금만 더 가면 그들도 더 이상은 따라오지 못할 거야.”
“말해 봐, 날 어디로 데려가는 거야?”
“국경.”
“뭐?”
“우린 국경으로 갈 거야.”
그 순간 나는 반사적으로 자일스의 손을 뿌리쳤다. 국경 너머에 무엇이 있을지는 굳이 말해 주지 않아도 뻔했다.
“당신 지금 미쳤어?”
“안나, 이러고 있을 시간 없어!”
“벨담으로 가겠다는 말이잖아. 내 말이 틀려?”
“다른 방법이 없어.”
가슴이 답답했다. 나는 내 눈앞에 있는 저 남자를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당신이 죽게 돼!”
“넌 아니겠지. 그들이 널 죽이지 않을 거란 사실만은 확실해. 그러니까 어서 따라와. 이대로 있으면 우리 둘 다 죽어.”
“당신은 어떡할 셈인데?”
자일스는 말없이 내 손을 잡아끌었다. 나는 그에게 끌려가면서도 이게 과연 옳은 결정인지 확신할 수가 없었다. 다른 방법을 생각해 보자고 외치고 싶었지만, 그러기엔 이미 늦었다. 혁명군이 뒤따라오고 있는 상황에서 자일스의 말대로 다른 방법 따윈 없었다.
“벨담으로 가면 그들이 당신을 쳐 죽이려 할 거야.”
“나도 알아.”
“그런데도 가겠다고? 나 때문에?”
“여기서 멈추면 두 명이 죽어. 하지만 국경을 넘으면 적어도 한 명은 살 수 있겠지. 뭐가 더 현명한 선택인지 뻔히 보이잖아.”
“그럼 나는 어떡하라는 말이야? 당신이 죽는 걸 눈앞에서 봐야 하는 나는?”
이런 말을 하면서도 스스로가 어처구니없었다. 안전 가옥에 갇혀 있을 때만 해도 자일스를 영원히 떠나겠다고 마음먹었었는데. 그랬던 나는 그의 죽음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가 죽지 않기를 바랐다.
잠깐 동안 고개를 들었던 증오는 이미 제 목소리를 잃고 심연 속으로 가라앉아 버렸다.
“당신인 걸 알면 그 자리에서 총을 쏠지도 몰라.”
“그렇다 해도 상관없어.”
“나는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았단 말이야!”
당신이 죽는 걸 마주할 준비가 되지 않았어. 그렇게 말하는 순간 자일스는 몸을 돌리고 나를 마주 보았다. 그가 내 어깨를 붙들고서 단단히 일렀다.
“정신 차려, 안나. 너는 살아야 해. 지금껏 살아남기 위해 분투해왔잖아. 여기서 멈추면 끝이야. 너도 그 사실을 알고 있잖아.”
“당신 걱정은 안 해?”
당장 자신의 죽음을 앞두고서 나를 걱정하는 그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제 얼마 후면, 어쩌면 몇 분 안에 총살당할지도 모르는 일인데. 그는 오히려 내게 살아남으라고 종용하고 있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왜 당신 걱정은 하지 않는 거야? 죽는 게 무섭지도 않아? 내가 나를 우선시하듯이 당신은 당신 목숨을 가장 우선으로 생각해야 하는 거잖아. 왜 당신은 안중에도 없는 거야?”
그러자 놀랍게도 자일스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기쁨과는 거리가 먼, 자조적인 웃음이었다.
“그렇게 해서 어떤 비극이 일어났는지 우리 둘 다 알고 있잖아, 안나.”
내가 할 말을 잃은 사이 그는 다시 웃음기가 가신 얼굴로 나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다른 건 생각하지 마. 이것이 우리가 내릴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야.”
“왜…… 당신은 왜…….”
폭풍이 찾아오기 전에 그렇듯이, 주변은 고요했다. 나뭇잎끼리 바람에 부딪히는 소리조차 귀에 들리지 않은 지 오래였다.
오랫동안 묻고 싶었다. 왜 나를 살렸는지. 어째서 내가 떠나게끔 내버려 두지 못하고 스스로를 위험 속에 내던지면서까지 따라올 수밖에 없었는지. 왜 당신은 그렇게…….
“왜 당신은 나를 그리 필사적으로 살리고 싶어 하는 거야?”
어떻게 하면 스스로의 생사 따윈 아무렇지도 않을 만큼 남에게 매달릴 수 있는 걸까? 나는 평생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나라면 절대 그런 짓 따윈 하지 않을 테니까.
자일스는 소중한 것을 대하듯 내 얼굴을 바라보더니 말했다.
“내 영혼은 이미 죽었어. 아주 오래전에. 어쩌면 나는 작년 겨울에 스스로 죽음을 택했을지도 몰라. 하지만 내가 그 대신에 살아갈 수 있었던 건 바로 너 때문이었어. 그대로 삶을 포기하기엔 네가 자꾸만 마음에 걸렸어. 저택에서 사라졌을 때도, 벨담으로 향하는 기차에 탔을 때도…… 나는 네가 걱정되어서 삶을 포기하지 못했던 거야. 당장 내일이라도 무슨 일이 생길 수 있는 법이니까.”
“……자일스 헤센.”
“어쩌면 너를 사랑하게 된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을지 모르지. 나로 하여금 살아가게끔 만드는 유일한 끈이 바로 너였으니까. 그래서 난 너를 사랑할 수밖에 없었을지 몰라.”
놀랍게도 자일스는 다시 웃었다. 또한 그는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스스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고 내게 마지막 고백을 하고 있었다.
“너를 사랑한 건, 살아남기 위해서였어.”
그는 나를 끌어안고 귓가에 속삭였다. 그러니까 내 마지막 부탁을 들어줘. 끝까지 살아서 내 노력이 헛되지 않았음을 증명해 줘, 안나.
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한 채 그의 품에 안겨만 있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자일스의 고백은 나를 더욱 혼란스럽게 만들 뿐이었다.
나는 그를 두고 혼자 살아남고 싶지 않았다…….
“우린 계속 가야 해.”
시간이 많지 않았다. 자일스는 다시 내 손을 잡고 단호한 발걸음을 이어 나갔다. 매 순간마다 우리는 점점 국경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자일스가 죽게 될 순간 또한 마찬가지였다.
*
빈센트는 한 손에 권총을 들고서 부하들과 함께 우거진 숲을 헤쳤다. 자일스 헤센이 애인과 함께 숲으로 도망쳤다는 건 매우 확실해 보였다.
그놈 머릿속에 대체 무슨 생각이 든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숲에서 추격전을 벌여 봤자 뭘 하겠다고? 이곳에 들어온 이상 자일스가 갈 수 있는 곳은 없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부하들은 숲을 포위하고 있었고, 포위망 반대쪽에 있는 거라곤 국경뿐이었다.
자일스는 생각보다 그의 손에 쉽게 잡혀 주지 않았다. 여러모로 짜증스럽게 만드는 놈이었다. 하지만 빈센트는 불만 따윈 없었다. 그는 오히려 즐거웠다. 아주 오랜 시간 동안 이런 순간만을 기다려 왔었다.
자일스 헤센을 그의 손으로 사냥할 기회를!
드디어 그는 빈센트의 표적이 되어 주었다. 언젠가는 반드시 이런 순간이 올 줄 알았다. 그 더러운 핏줄이 어디 가 버릴 리는 없었으니까.
그는 반드시 자일스를 잡고 싶었다. 아니, 그는 잡힐 것이다.
그리고 본래 그의 운명이 그리 되어야 했던 것처럼, 빈센트의 발밑에 무릎 꿇고 자비의 말들을 갈구하겠지. 마침내 모든 것이 정상으로 돌아갈 것이다.
벌써부터 피가 끓는 기분이었다.
자일스가 쉽사리 나타나 주지 않는 것도 즐거움의 일부분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빈센트는 숲을 가로지르며 외쳤다.
“헤센, 넌 이미 끝장났어! 시간 낭비만 하고 있는 거다!”
당연히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지만 빈센트는 확신할 수 있었다. 그가 가까이에 있다. 이제 모든 건 시간문제였다.
빈센트와 함께 수색 중이던 부하가 머뭇거리며 말을 걸어왔다.
“이대로 괜찮으시겠습니까?”
“뭐가.”
“곧 있으면 국경 지대로 진입하게 됩니다. 계속 나아가면 아마 국경에 배치된 군인들과 대치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넌 그래서 뭘 말하고 싶은 거지? 이대로 철수라도 하자는 거야?”
“그게 아니라…… 미리 말씀드리고 싶은 겁니다, 저는.”
“그 정도는 나도 알고 있어. 벨담 놈들이 뭐라 생각하든 무슨 상관이야.”
이미 패망한 국가 주제에. 빈센트는 속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입스윈을 공포에 떨게 만들었던 거대한 국가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벨담은 더 이상 빈센트에게 그 어떤 의미도 가지지 못했다.
그에게 중요한 건 오로지 자일스 헤센을 그의 손으로 체포하는 것뿐이었다.
그렇게 몇 분 동안 숲만 뒤지던 때였다. 빽빽했던 나무들이 점점 잦아들면서 시야가 확보되던 그 순간. 저 멀리 사람의 형체가 보였다. 절대 그의 부하들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저들이 누구인지는 뻔한 사실이리라.
빈센트는 고민할 것도 없이 권총으로 그들을 겨누었다. 그러자 부하가 그를 말렸다.
“안 됩니다!”
“이거 안 놔?”
“여기서 총격전을 벌일 수는 없습니다! 국경이 바로 코앞입니다!”
함부로 총을 쐈다간 부하의 말대로 크고 작은 충돌이 일어날 수도 있었다. 빈센트는 욕지거리를 하며 권총을 다시 허리춤에 집어넣고서 명령했다.
“따라와!”
그들은 함께 목표물들을 향해 달렸다. 뭔가 낌새를 눈치챘는지 자일스와 그의 애인 또한 움직임에 속도를 더했다. 그러나 그들은 여전히 느렸다. 조금만 더 따라잡으면 체포하는 건 일도 아니었다.
다만 문제가 하나 있었다.
그들이 국경과 정말로 가까워졌다는 사실이었다.
입스윈의 군인인 이상 빈센트는 적국이나 마찬가지인 벨담 국경에 함부로 진입할 수가 없었다. 국경을 넘겠다고 우기지 않는 이상 커다란 문제야 생기지 않겠지만, 적어도 상대편 군인들이 그를 귀찮게 굴 것이다. 그럼 자일스를 잡는 데에도 차질이 생긴다.
국경에 진입하기 전에 신속히 그를 체포해야만 하는데…….
이상했다. 자일스 또한 조금만 더 가면 벨담 국경이라는 사실을 절대 모를 리가 없었다. 그러나 그는 포기하기는커녕 국경 쪽으로 성큼성큼 나아가고 있었다.
마치 벨담으로 진입하겠다고 마음먹은 사람처럼 말이다.
미친 건가? 자일스는 벨담에서 매일같이 물어뜯는 살인자였다. 그가 벨담으로 떠나면 무슨 일을 당할지는 뻔해 보였다.
자신의 손에 당하느니 차라리 조국에서 죽음을 맞겠다는 건가?
이가 갈렸다. 분을 참을 수 없었던 빈센트가 그의 이름을 외쳤다.
“헤센!”
그러나 그의 외침은 자일스의 움직임을 막기에 턱없이 부족했다.
어쩔 수 없었다. 여기서 머뭇거리다간 자일스 헤센을 놓쳐 버리고 말 것이다.
빈센트는 부하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총을 들었다.
*
국경에서 근무를 서던 빌헬름은 귀를 의심했다. 옆을 돌아보니 동료들도 다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건 분명히 총격이었다. 누군가 이 근처에서 총을 쏜 것이다.
모두가 사태를 파악하고 얼마 안 가 비상이 걸렸다. 빌헬름은 동료와 함께 총격이 발생한 지점으로 이동하며 중얼거렸다.
“미친 거 아냐?”
대체 어떤 놈이 난동을 부리고 있는 거지? 국경 반대편에는 입스윈이 있었다. 아무리 그들의 위세가 약해졌다지만, 입스윈 놈들이 그들을 너무 얕잡아 보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러지 않고서야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지지는 않을 거다.
그의 동료인 제바스티안이 말했다.
“분명해. 놈들이 술 한잔 걸친 거야. 대낮부터 팔자도 좋군그래.”
“무슨 말이야?”
“저번에 말이야, 야간 근무 설 때 비슷한 일이 있었거든. 갑자기 총격이 들려서 가 봤더니 입스윈 놈들이 코끝까지 새빨개진 채로 낄낄대고 있더라고. 우리와 눈이 마주치니까 무슨 노래를 불러 젖힌 줄 알아? 우리 국가였어. 그 주정뱅이 놈들이 우리 국가를 불러 댔다고. 우린 놈들에게 조롱거리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닌 거야.”
제바스티안은 한숨을 쉬며 이번에도 똑같을 거라고 장담했다. 빌헬름은 대낮부터 술에 취한 군인들을 마주치는 광경을 상상했다. 만약 그런 일이 일어나게 되면 어떻게 대처해야 하나?
“그래서 그때 어떻게 했어?”
“뭘 어떻게 해, 그냥 돌아올 수밖에 없었지. 우리가 그놈들 머리라도 쥐어박았겠어?”
나라 꼴 한번 잘 돌아간다. 제바스티안이 욕지거리를 섞어 내뱉었다. 그들은 총을 들고 대열을 맞춰서 앞으로 나아갔다. 이런 일이 한두 번 벌어진 것이 아니었는지 동료들의 얼굴 위엔 짜증스러운 기색만이 가득할 뿐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눈앞에 나타난 건 술에 취한 군인들 따위가 아니었다. 웬 금발머리 여자 하나가 덜덜 떨면서 다가오고 있었다. 여자의 배는 피로 빨갛게 물든 채였다.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이 벌어지자 당황한 동료들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빌헬름은 여자를 부축하며 물었다.
“무슨 일입니까?”
여자는 사색이 된 채로 얼른 입을 열지 못했다. 뭔가 말하고 싶은 게 있지만 모종의 이유로 확신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말씀하십시오. 공격을 받았습니까?”
“……살려 주세요.”
“뭐라고 하셨습니까?”
“제발, 죽이지 말아 주세요. 살려 달란 말이에요.”
울음 섞인 목소리로 애원하던 여자가 어느 순간 고개를 돌렸다. 빌헬름은 여자의 시선이 닿는 곳을 보았다. 그곳엔 다른 남자가 있었다. 검은 머리에 검은 눈…… 처음 보는 사람이었지만 매일 보던 사람처럼 낯설지가 않았다.
그는 무감한 얼굴로 천천히 그들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별안간 제바스티안이 외쳤다.
“저놈, 그 남자 아니야?”
“누구?”
“그 배신자 말이야, 자일스 헤센!”
그제야 빌헬름은 기시감의 정체가 무엇인지 알아냈다. 제바스티안의 말을 들으니까 그제야 기억이 났다. 신문에 며칠이고 오르내리던 얼굴과 이름. 온 국가의 미움을 산 남자. 죽어 마땅한 비열한 배신자, 자일스 헤센. 그가 눈앞에 있었다.
그는 동료들과 함께 반사적으로 총을 겨누었다. 국경에 이토록 가까이 접근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하거늘 상대는 심지어 자일스 헤센이었다. 이제 그들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는 뻔했다.
“손 들어!”
그들이 외쳤다. 그러나 자일스는 명령에 응하지 않았다.
여자가 옆에서 무어라 외치는 것도 같았지만 아무도 귀를 기울이고 있지 않았다. 그와 동시에 자일스의 손이 허리춤의 권총을 향했다.
탕! 총성과 함께 비명이 울렸다.
잠시 주변이 고요해졌다. 동료들은 총을 내리고 쓰러진 남자를 바라보았다.
투둑, 투둑. 하늘에서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비가 어깻죽지를 적실 즈음이 되어서야 빌헬름은 정신을 차리고 눈앞의 남자를 향해 다가갔다.
가까이에서 내려다본 남자는 확실히 신문에서 봤던 그 남자가 맞았다. 자일스 헤센은 죽은 사람처럼 미동도 없이 쓰러져 있었다.
도무지 현실감이 들지 않았지만 그가 동료들에게 일렀다.
“……중위님 모셔 와. 심각한 일이 벌어졌다고 말씀드려.”
벨담을 집어삼킨 어두운 그림자가 정점을 찍던 날.
자일스 헤센이 잡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