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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을 사랑한 건 살아남기 위해서였다-57화 (57/93)
  • <57화>

    “그게 사실인가?”

    해링턴은 심각하게 물으며 자일스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제야 해링턴이 그의 거처까지 걸음 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를 비밀리에 만나야 했기 때문이다.

    자일스는 더 이상 신변이 안전한 인물이 아니었다.

    “키팅 양이 비스마르 백작가의 영애라는 게 사실이냔 말이야.”

    “……보고서를 올린 게 누구였습니까?”

    “내 질문에 대답부터 해! 자넨 알고 있었나? 키팅 양의 진짜 신분이 무엇이었는지를?”

    그러나 해링턴은 이미 정답이 무엇인지 파악하고 있었다. 자일스는 구태여 거짓말을 하거나 자기 자신을 방어할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알고도, 그 여자와 만났다고? 자네 지금 제정신인가?”

    “…….”

    “이건 아주 심각한 사안이야, 자일스. 안 그래도 자네 출신 성분을 걸고넘어지지 못해 안달 난 놈들이 그득한데 이런 실수를 하면 어떡하냔 말이야! 자네는 곧 체포될 거야. 어쩌면 벌써 자네를 처형하라는 명령서가 내려왔을지도 모른다고.”

    자일스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서류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마치, 언젠가 이런 일이 일어날 줄 예상하고 있었던 사람처럼.

    “자네는 이리 심각한 상황에서도 아무런 할 말이 없나?”

    “죄송합니다.”

    “대체 뭐가? 내 신의를 저버린 일이? 지금 그런 건 중요한 게 아니야.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을 잘 듣게. 혁명군이 자네를 잡으러 오면 반항하지 말게. 순순히 그들이 시키는 대로 해. 그리고 비스마르 영애에 관해 묻는 질문에는 그 여자에게 속은 거라고 말하게. 자넨 아무것도 몰랐던 거야.”

    “그리고 안나를 제 손으로 직접 죽이라는 말씀이시군요. 마치 예전에 똑같은 일이 있었듯이.”

    “지금 뭐라는…….”

    “그럴 순 없습니다.”

    자일스는 서류를 내려놓고 해링턴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그는 얼굴에 아무런 감정도 내비치지 않았다. 오직 확고한 신념만이 있을 뿐이었다. 아주 오래전부터 마음속에 굳혀 왔던 결정이었다.

    자일스가 과연 제정신으로 선언한 건지 가늠하려 하던 해링턴은 그만 아연실색했다.

    “헤센!”

    “기대를 저버려서 죄송합니다. 하지만 저는 그럴 수 없습니다.”

    “그럼 뭘 어쩌겠다고? 이대로 죽기라도 하겠다는 건가?”

    “필요하다면 그럴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완전히 미쳤군.”

    해링턴이 중얼거렸다. 그는 차라리 자일스가 경황이 없는 탓에 저런 말을 내뱉는 거라고 믿고 싶었다. 하지만 그러기에는 자일스의 안색이 너무나도 편안했고, 또 안정적이었다.

    그는 차분한 시선으로 해링턴을 바라보고 있었다. 사형 선고를 담담히 받아들이는 피고인처럼.

    “살기를 바랐던 게 아니었나? 나는 자네를 잘 알아. 벨담인으로서 혁명군이 되기를 자처했던 것도, 누구보다 더 열정적으로 과업에 임한 것도 전부 그들과는 같은 운명을 맞고 싶지 않아서였잖나. 그러기 위해서 직접 누이를 죽게 한 것 아니었나! 그런데 이제 와서 모든 걸 포기하겠다고?”

    “저는 제 삶보다 더 중요한 가치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뿐입니다.”

    “그게 설마 안나 양…… 비스마르 영애라고 말할 셈은 아니겠지?”

    “죄송합니다.”

    해링턴은 그만 할 말을 잃어버린 사람처럼 이마를 문지르며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자일스에겐 그의 선언을 물릴 생각이 없었다.

    “저는 예전에 한 번 비겁한 선택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날 이후로 단 한 번도 후회하지 않은 적이 없었습니다. 다시는 똑같은 실수를 하고 싶지 않을 뿐입니다.”

    “……그냥 한 여자일 뿐이야. 평범한 여자라고, 자일스.”

    “제게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 영애를 사랑하는군.”

    구태여 대답할 필요도 없는 말이었다. 자일스는 안나를 사랑했다. 생전 처음으로 죽음까지 불사할 만큼 누군가를 사랑해 본 일이 있다면 그건 바로 안나에 대한 사랑이었다.

    이것은 단순히 사랑이라는 말 한 마디로 치부할 수 있는 감정이 아니었다. 안나는 삶이자 구원이었고, 암암한 어둠 속에 홀로 빛나는 별이었다. 길을 잃은 그에게 나아가야 할 방향을 가르쳐 주는 길잡이 별이었다.

    그리고 지금까지도 자일스는 스스로가 걷고 있는 길에 대해 단 한 치의 의심조차 하지 않았다.

    그는 안나를 살리고 싶었다.

    “저를 체포하실 겁니까?”

    해링턴은 그의 물음에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는 자일스가 내린 결정에 크게 실망한 게 분명했다. 오랫동안 자일스를 부하로 두었던 탓일까. 혹은 자일스가 다른 부하들과는 조금 달랐기 때문일까. 해링턴은 자일스를 불필요할 정도로 아끼게 되었다.

    지금 당장 자일스를 총으로 쏴 버릴 수 없는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물론 자네는 체포될 걸세. 이제 입스윈 내에서 자네가 있을 곳이란 없어. 어디로 도망치든 분명 잡히게 될 거야. 지금까지 혁명군의 신뢰를 얻으려 했던 모든 일들이 물거품이 되고 말겠지.”

    “상관없습니다.”

    “자넬 미워하는 사람이 많아. 곱게 보내 주려 하진 않을 거야.”

    “전부 다 알고 있습니다.”

    그를 바라보는 자일스의 시선에선 조금의 망설임도 찾아볼 수 없었다. 해링턴은 자일스를 위해 아무것도 해 줄 수 없었다. 그는 혁명군의 수뇌부에 있는 자였다. 적국 출신 장교 하나를 위해 혁명군을 배신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단, 마지막 자비를 베풀 수 있을 뿐이었다.

    “비스마르 영애는 지금 어디에 있지?”

    “안전한 곳에 있습니다.”

    “나는 자네를 부하로서 아꼈네. 자네는 언제나 내 충성스러운 심복으로서 역할을 다했지. 스스로 원하는 최후를 맞을 수 있도록 시간을 주겠네. 하지만 내가 자네 목숨을 구해 줄 수는 없어.”

    자일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것이 해링턴과의 마지막임을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다시는 그를 마주할 일이 없으리라는 것도.

    “가.”

    해링턴이 그를 떠밀며 말했다.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해야 할 일을 하게.”

    *

    나는 고요 속에서 숨을 죽이고 있었다. 자일스가 갖다 준 음식에는 손도 대지 않은 채였다. 이상하게도 전혀 배가 고프지 않았다. 공허한 상실감만이 텅 빈 속을 채우고 있을 뿐이었다.

    혼자 있는 내내 많은 생각을 했다. 그리고 마침내 나는 결론지을 수 있었다. 이제 더 이상은 아무도 사랑하지 않겠노라고. 만약 여기서 나가게 되면, 자일스가 나에게 자유를 허용한다면…… 나는 미련 없이 그를 떠날 생각이었다.

    과연 자일스가 그걸 받아들여 줄지가 의문이었다. 하지만 그도 어렴풋이 알고는 있을 거다. 그가 내게 아주 못된 짓을 했으니, 그에 응당한 결말을 맞이하리라는 사실을 말이다.

    그를 떠나서, 홀로 살아갈 것이다. 다른 사람과의 미래 따윈 그리지 않을 거다. 그런 건 온통 고통으로 얼룩진 선택지일 뿐이었다. 난 더 이상 상처 받고 싶지도, 고통 받고 싶지도 않았다.

    그때였다. 다급히 계단 오르는 소리가 들리더니 문이 벌컥 열렸다. 나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당연한 일이겠지만, 내 앞에 선 남자는 자일스였다. 그는 내가 무어라 반응하기도 전에 내 팔을 잡고 일으켰다.

    “이거 놔, 지금 뭐 하는 거야?”

    “나가야 해.”

    “뭐?”

    “이곳에서 나가야 해. 그래야 네가 살 수 있어.”

    “갑자기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물론 바깥으로 나가게 해 주겠다는 선언은 반가웠지만, 갑자기 그가 마음을 바꾼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불길함이 엄습했다.

    자일스는 내 손을 잡고 계단을 내려갔다. 마침내 햇빛을 다시 마주하는 순간, 나는 손으로 눈을 가리고 인상을 찡그렸다.

    그 와중에도 자일스는 어디론가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무언가가 이상했다.

    “자일스, 대체 무슨 일인데?”

    “네 신분이 들통났어. 이곳도 더는 안전하지 않아.”

    나는 입을 다물었다. 결국 올 것이 왔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언젠가는 이런 일이 일어날 줄 알았다. 나도 영원히 발 뻗고 살 수 있을 거란 생각은 하지 않았으니까.

    “날 어디로 데려갈 셈이야?”

    “아직 너를 안전하게 지켜 줄 사람들이 남아 있어. 그들에게 가야 해. 그것도 최대한 빨리. 시간이 많지 않으니 어서 따라와.”

    “그러니까 그 사람들이 누군데?”

    우리가 근경의 숲으로 들어서는 순간, 자일스가 뒤를 돌아보았다. 나는 그의 시선이 향하는 곳으로 몸을 돌렸다.

    새까만 승용차 몇 대가 안전 가옥 근처에 멈춰 서는 것이 보였다.

    “나를 따라온 거야. 이젠 정말 시간이 없어.”

    자일스가 속삭였다. 그는 내 손을 붙잡고 절박하게 나를 바라보았다.

    “지금은 아무것도 묻지 말고 도망치는 데에만 집중해.”

    우리는 숲을 헤치고 나아갔다. 길이 들지 않은 야생 숲은 몸을 숨기기 좋았지만 그만큼 속도를 내기 쉽지 않았다. 자일스는 확실한 목적지를 정해 뒀는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나를 데리고 앞으로 나아갔다.

    “당신이 말한 그 사람들, 내가 믿을 만한 자들인 건 맞아?”

    “걱정하지 않아도 돼. 분명히 너를 보호해 줄 거야.”

    “하지만 입스윈 안에서 혁명군에 대항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있을까?”

    자일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어쩌면 내 질문에 일일이 대답하기에는 신경이 곤두서 있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추적자들이 바짝 따라붙지는 않았는지 파악하기에도 바쁠 테니까.

    그러나 나는 도무지 그의 발걸음을 따라갈 자신이 없었다. 하루 종일 굶은 데다 마취가 풀리면서 복부의 통증이 올라오고 있었다. 내 속도가 느려지자 자일스가 걸음을 멈추었다.

    “걸을 수 있겠어?”

    “조금만 천천히 걸어야 할 것 같아.”

    이대로 주저앉아선 안 된다는 사실은 나도 잘 알고 있었다. 나는 다친 곳이 너무 아프지 않을 정도로만 걸었다. 그러나 그마저도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부상당한 부위가 쿵쿵 울려 대는 것만 같았다.

    “조금만 더 버텨. 머지않아 도착할 테니까.”

    나는 간신히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더 버티기 어려워지기 전에 도착할 수 있다면 좋을 텐데. ‘믿을 만한 사람들’이 누구인지 자일스가 말해 주지 않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난 대체 어디로 가고 있는 거지?

    그때였다. 멀찍이서 남자의 외침이 들려왔다. 혁명군이 분명한 그는 들으란 듯이 경고하고 있었다.

    “헤센! 쥐새끼처럼 굴지 말고 순순히 나와! 넌 시간만 끌고 있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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