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화>
국경과 멀지 않은 곳에 지어진 안전 가옥은 처음부터 그런 용도로 만들어진 건물은 아니었다. 자일스는 아무도 살지 않게 된 집을 오랫동안 찾아다녔다. 안나를 사랑하게 된 것이 바로 그 동기였다.
수많은 귀족들을 체포하고 처형하던 그가 귀족 출신 여자를 사랑하게 되었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아이러니 같았다. 그래서 더더욱 자일스는 철저하게 대비하고자 했다. 언젠가 안나에게도 숨을 곳이 필요하게 될 테니까.
물론, 안나를 위한 안전 가옥을 만들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배신자로 낙인찍힐 게 분명했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지금껏 혁명군의 신분이 그를 살렸다면 이제 그를 살리는 존재는 안나였다.
안나를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배신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자일스는 버려진 집을 이곳저곳 보수하고 단장해서 안나가 살 수 있을 만한 공간으로 바꾸어 놓았다. 벽지를 바꾸고, 가구를 들여놓고 어릴 적의 기억을 최대한 떠올려서 인테리어까지 꾸몄다.
완벽하지는 않았지만, 그런대로 만족스러운 변화였다.
무엇보다도 오직 그만이 아는 곳에 안나를 숨겨 뒀다는 사실이 그를 크게 안심시켜 주었다. 그가 모르는 사이에 누군가 안나를 해치려 들거나, 납치 시도를 할 가능성이 차단된 것이니까. 이젠 마음 놓을 수 있었다.
어찌 되었든 신변에 이상만 생기지 않는다면, 그것으로 충분했다.
수 년간 혁명군으로 살아온 자일스에게 그보다 중요하게 느껴지는 일은 없었다.
차에서 내린 자일스는 자물쇠를 따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밖에서 안을 들여다볼 수 없도록 모든 창문을 막아 놓은 탓에 온 집 안이 어두컴컴했다. 안나는 꼭대기 층의 제일 넓은 방에 있을 터였다.
온통 암흑인 데다 쥐 죽은 듯이 고요해서 계단 오르는 소리마저도 커다란 소음이 되었다. 자일스는 안나가 지내고 있을 방 앞에 섰다. 기척이 들렸을 게 분명한데도 안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열쇠로 문을 열자 환하게 조명을 켜 놓은 안락한 방이 드러났다. 그가 제일 공을 들여 꾸며 놓은 방이었다.
안나는 구석에 틀어박혀 쪼그리고 앉아 있었다. 얼굴을 팔 사이에 묻고 있어서 언뜻 자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자일스는 가방을 내려놓고 안나의 어깨를 흔들었다.
“안나.”
“꺼져.”
날 선 대답이 돌아왔다. 그러나 마음이 상하기는커녕, 자일스의 머릿속엔 기력을 잃지는 않은 것 같아 다행이라는 생각뿐이었다.
“날 여기서 꺼내 줄 게 아니라면 당장 꺼지라고, 미친 새끼야.”
“미안하지만 아직은 그럴 수 없어.”
“그럼 됐네. 너랑은 볼 일 없어. 말라 죽는 한이 있더라도 다시는 네 얼굴 보고 싶지 않아.”
그라고 안나의 심정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었다. 화가 많이 났겠지. 안전을 위해서라곤 하지만, 어쨌든 이건 감금이나 다를 바가 없었으니까.
“뭐라도 먹어야지, 안나.”
“두고 가. 알아서 할 테니까. 날 혼자 내버려 둬.”
안나가 절대로 마음을 풀 것 같지 않아 보였다. 사람을 어르고 달래는 기술 따위 전혀 알지 못하는 자일스는 한숨과 함께 가방을 내려놓고 잠시 갈등하다 결국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방을 떠나려던 그때였다. 무언가 날아와서 그의 머리를 아슬아슬하게 스쳤다. 책이었다. 뒤를 돌아보니 어느새 두 발을 딛고 서서 그를 노려보는 안나가 있었다.
안나는 얼굴이 새빨갛게 물든 채로 울고 있었다. 눈가가 짓물러서 엉망이 된 걸 보니 하루 종일 울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 모습을 보는 순간 자일스는 그만 심장이 내려앉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안나에게 잘못을 저지르고 있다는 건 알았지만…….
“내가 널 죽일 거야. 반드시 죽이고 말 거야.”
자일스는 무어라 대답하지도 못하고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이런 상황에서 대체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미안하다는 말? 조금만 더 참아 달라는 말? 그런 말들이 정당하든 그렇지 않든, 안나의 귀에는 잔인한 말들로 들릴 것이 뻔했다.
“적어도 나와 상의를 했어야지. 나를 이 망할 집에 가두기 전에 내 의사 정도는 물어봤어야 하는 거 아니야?”
“이건 네가 싫다고 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야.”
“나는 네 물건이 아니야! 네가 기르는 강아지가 아니라고! 네 맘대로 나를 휘두를 수 있는 권리가 어디 있는데? 이젠 잘 알겠어. 너는 나를 같은 사람으로 여기지 않은 거야. 그러니까 멋대로 나를 이런 곳에 가둔 거겠지. 반지를 잃어버릴까 봐 꽁꽁 숨겨 두는 데에 반지의 의견 따윈 필요하지 않잖아, 안 그래?”
“난 너를 지키고 싶은 거야, 안나. 이렇게 하지 않으면 아무도 네 안전을 보장할 수가 없어. 너도 그 사실은 이해해야만 해.”
“나를 걱정하는 게 맞기는 한 거야?”
안나가 코웃음을 치며 물었다. 그것도 잠시, 얼굴 위에서 웃음기를 싹 지우며 그녀가 다시 질문했다.
“넌 나를 위해 이런 짓을 저질렀다고 말했지. 하지만 정말로 말해 봐. 넌 내가 걱정되는 거야? 아니면 만에 하나 나를 잃고 나서 상처 받을 너 자신을 걱정하는 거야? 둘은 엄연히 다른 거야. 그 잘난 입 좀 놀려 봐, 이 위선자야.”
그 순간 자일스는 당황했다. 안나가 그를 모욕하려 했기 때문은 아니었다. 그녀의 질문을 듣는 순간 자일스는 가장 수치스러운 부분을 강제로 까발려진 듯한 느낌을 받았다.
스스로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단 한 번도 그런 문제에 대해서 생각해 본 적이 없었음은 사실이었다.
“내 안전을 위해서라고, 웃기는 소리. 넌 그냥 나를 잃고 싶지 않을 뿐이잖아. 네가 아끼는 예쁜 인형을 잃어버릴까 봐 구석진 데에 숨겨 둔 거잖아. 안 그래? 내가 다치는 걸 원하지 않는 것도, 내 안위를 걱정하는 것도 사실은 다 네가 상처 받는 일을 막기 위해서인 거잖아. 네가 진정으로 걱정하는 건 내가 아니라 너 자신이야.”
“그런 게 아니야.”
“뭐가 아닌데? 내가 틀린 말을 했다면 당당히 반론해 봐! 넌 그냥 네가 그만큼 역겨운 위선자라는 걸 인정하고 싶지 않은 거겠지!”
안나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여전히 울고 있었다. 스스로는 울지 않으려 노력하지만 잘 되지 않는 것 같았다. 자일스는 그녀를 위해 뭔가 해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머리를 얻어맞은 것처럼 온몸이 굳어 버린 탓이었다.
“내가 느꼈을 절망을 생각해 봐. 난, 나는 평생 동안을 그렇게 살았어. 아무도 나를 동등한 사람으로 대해 주지 않았다고. 나는 너만큼은 다른 줄 알았어. 너는 적어도 나를 한 인간으로서 생각해 주는 줄 알았는데…… 그게 다 내 착각이었던 거야.”
“안나.”
“할 말 없으면 그냥 가. 어차피 넌 마음을 바꾸지 않을 거잖아. 꼴도 보기 싫으니까 당장 꺼져.”
안나는 그 말을 끝으로 다시 그림자 속에 숨어 버렸다. 훌쩍거리는 소리만이 정적을 깨뜨릴 뿐이었다. 자일스는 쉴 새 없이 들썩이는 안나의 어깨만을 바라보다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차마 문을 다시 잠글 수는 없었다.
대문만을 잠그고 집을 빠져나온 그는 승용차 트렁크에 기대어 한숨을 내쉬었다. 스스로를 진정시키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안나가 했던 말이 뇌리에서 도무지 잊히질 않았다. 넌 나를 걱정하는 게 아니야. 정확히는 나를 잃고 나서 상처 받을 너 자신을 걱정하는 거지.
그리고 넌 그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을 거야.
안나의 말이 맞았다. 자일스는 절대로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그가 안나에게 모질게 굴 수밖에 없는 건 그녀가 살기를 바라서였다. 자일스는 진정으로 안나가 살아남기를 원했다.
하지만 과연 그뿐일까?
그는 안나의 죽음이 두려웠다. 그녀가 죽고 나서 스스로가 어떤 선택을 하게 될지 아무도 모르는 일이기에, 그래서 더욱 두려웠다.
결국 안나를 살리고자 하는 건 스스로를 위한 일이었던가?
그는 안전 가옥을 떠나지 못하고 주변을 서성거리다가 결국 차에 올랐다. 백미러 너머로 멀어지는 건물의 모습이 자꾸만 마음에 걸렸다. 안전 가옥으로부터, 안나로부터 멀어지는 매 순간순간 무언가 크게 잘못되었다는 불안감이 크기를 키웠다.
안나를 그곳에 두지 말아야 해. 그녀를 감금해서는 안 돼.
이건 옳지 않은 일이야.
하지만 누군가가 안나를 노리기 시작했다는 사실만큼은 명백해 보였다. 아주 잠깐 마음이 흔들려서 바깥으로 데리고 나왔다가 공격이라도 받는다면?
그때는 누가 그 일을 책임질 수 있을까?
자일스는 결국 마음을 다잡았다. 적어도 상대가 누구인지 알아낼 때까지는 필요 불가결한 일이었다. 그때까지만 안나가 참아주었으면 했다.
고통은 잠깐이지만, 죽음은 영원한 법이니까.
자일스는 그가 거주하는 연립 주택 근처에 차를 댔다. 집으로 향하는 계단을 오르는 내내 죄책감이 무거운 추가 되어 그의 발걸음을 느릿하게 만들었다. 울고 있던 안나의 모습이 아직까지도 눈앞에 선했다.
자일스는 현관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그는 눈치챌 수 있었다. 누군가 집에 있었다. 인기척을 느끼자마자 자일스는 허리춤에 매달린 총에 손을 갖다 댔다.
침입자는 제 정체를 숨기려 하지도 않았다. 그럴 필요도 없었다. 그는 자일스가 아주 잘 아는 인물이었다.
놀랍게도 해링턴 장군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장군님.”
당황한 자일스가 그를 불렀다. 해링턴은 대답 대신 차갑게 굳은 얼굴로 그를 맞았다.
“자일스. 자네가 벌써 죽어 나자빠졌을까 봐 걱정하던 참이었네. 대체 어딜 갔다 온 건가?”
자일스는 해링턴의 물음에 대답할 수 없었다. 물론 해링턴 또한 답을 듣고자 해서 물은 것은 아니었다. 그는 바로 본론으로 넘어갔다.
“어서 해명하게.”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습니다.”
“이 일이 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해명하란 말이야.”
해링턴이 품속에서 서류 한 장을 꺼내 그에게 내밀었다. 자일스는 반듯하게 접힌 서류를 펼쳐서 읽어 보았다.
녹취록을 받아 적은 사본이었다. 빠르게 내용을 훑어보던 자일스의 눈길이 어느 지점에서 멈추었다. 익숙한 이름을 발견하는 순간 서류를 든 손에 힘이 들어가고 동공이 열렸다.
엘로이즈 비스마르.
모두가 잊었어야 마땅할 이름이 바로 이 서류 안에 보란 듯이 적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