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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을 사랑한 건 살아남기 위해서였다-55화 (55/93)
  • <55화>

    결국 그가 큰 소리로 화를 냈다. 자일스가 내게 소리를 지른 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 물론 내게 이토록 모질게 대하는 것도, 전부 다. 가슴이 아파 오는 걸 보니 내가 그에게 마음을 주기는 했던 모양이었다. 보통 사람 같았다면 코웃음 치는 것으로 응수했을 텐데.

    그에게만은 그럴 수가 없었다.

    내가 다른 사람에게 함부로 마음을 내주었다는 사실, 그리고 그 사람이 기어이 내게 하지 말아야 할 짓을 저질렀다는 사실이 지독히도 처참한 현실이 되어 돌아왔다.

    “……여기서 당신을 기다리는 내내 죽을 것처럼 힘들었어. 제대로 숨조차 쉴 수 없었다고. 당신 말을 알아듣지 못한 게 아니야. 남들이 나를 죽이기 전에 내가 먼저 죽을 수도 있다는 걸 말하고 있는 거야.”

    자일스는 고개를 돌리고선 갈등하는 모습을 보였다. 제발, 그가 내 심정을 이해해 주기만 한다면. 뒤늦게라도 좋으니까 이게 최선의 방식은 아닐 거라는 사실을 깨닫기만 한다면 아무래도 좋을 것 같았다.

    “제발…… 당신이 내게 이러지는 말아야 하는 거잖아.”

    자일스는 침묵했지만 그가 내 부탁을 들어주어야 할지에 대해 깊이 고민하고 있다는 사실만큼은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짧지만 긴 시간이 흐른 끝에, 그가 다시 나를 보았다.

    눈이 마주치는 순간, 그의 눈동자에 서렸던 깊은 갈등의 흔적이 무서운 기세로 모습을 감추었다. 잔인하리만치 어두운 검은색 눈동자만이 나를 응시하고 있을 뿐이었다.

    결국 자일스가 냉정한 목소리로 선을 그었다.

    “차라리 내 통제 하에 있는 편이 더 안전할 거야.”

    “자일스.”

    “내가 허락할 때까지 여기에 있어. 편안하게 머물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할 테니까.”

    “안 돼, 그러지 마!”

    그가 매몰차게 문을 닫고 나갔다. 열쇠 돌아가는 소리가 내 귀에 생생히 들려왔다. 나는 그가 문을 완전히 잠그기 전에 문손잡이를 잡고 돌리려 했지만 이미 문이 잠긴 후였다.

    나는 필사적으로 문을 때리며 외쳤다.

    “열어 줘! 열어 달라고! 자일스, 좋은 말로 할 때 열어!”

    물론 그가 절대 마음을 바꾸지 않을 거란 사실은 알았다. 나를 대하는 눈빛을 보자마자 깨달았다. 난 더 이상 그의 연인이 아니었다. 그는 나를 완수해야 할 임무처럼 대하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쓸데없는 저항을 그만두고 털썩 주저앉았다. 다시 혼자가 되니 몸이 떨려 왔다. 내 안전을 바란다면서, 그는 내 곁에 조금이라도 더 머무르는 대신 문을 잠그고 떠나는 쪽을 택했다.

    이젠 뭘 사랑하고 뭘 믿어야 할지조차 모르겠다.

    *

    “정말 괜찮겠어?”

    그녀가 물어 왔다. 괜찮겠느냐, 그런 말에는 여러 가지 의미가 담겨 있을 것이다. 자일스는 복잡한 물음에 확답할 자신이 없었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확신할 수 있는 건 셀레스트는 괜찮을 거라는 사실이었다. 자일스가 조국을 배반한 덕에 그들은 목숨을 부지했다. 자일스가 혁명군 장교로서 부임하는 동안은 지도부가 셀레스트의 신분을 보장해 줄 것이었다.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모든 것이 괜찮았다.

    “걱정하지 말고 가.”

    “너 혼자 어떻게 살려고 그래.”

    “나는 어린애가 아니야, 셀레스트.”

    빛나는 금발을 한 갈래로 묶어 늘어뜨린 그의 누이는 곧 울음이라도 터뜨릴 것 같았다. 가족이 누리던 부의 규모에 걸맞도록 커다란 옷장에 질 좋은 옷들을 한가득 갖고 있던 셀레스트가 가진 거라곤 이제 저 조그마한 짐 가방에 든 것이 전부였다.

    하지만 자일스는 셀레스트가 재산을 빼앗겨서 속상해하는 것이 아님을 알았다.

    “같이 있는다고 해서 나빠질 건 없잖아.”

    “내가 앞으로 하게 될 일들을 생각해 봐. 누나를 똑바로 볼 수도 없어질 거야. 나도 더 이상 평범한 남동생으로 보이지 않게 될 테고.”

    “그게 대체 무슨 말이야? 내가 널 증오하기라도 할까 봐 겁나니, 자일스?”

    “제발 고집 그만 피워.”

    “너야말로 다시 한 번만 생각해 봐. 내가 널 떠나는 게 옳은지 말이야.”

    “날 증오하지 않을 자신이 있어? 나는 이제부터 우리가 알고 지냈던 수많은 사람들을 죽이게 될 거야. 그중엔 누나의 친구들도 있을 거고, 심지어 우리 친척들이 표적이 될지도 모른다고. 내가 베티나를 죽이고 오는 길이라고 생각해 봐! 그때도 아무렇지 않은 척할 수 있을 것 같아?”

    셀레스트는 그의 말에 적잖이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그러나 곧 마음을 다잡은 그녀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꺼내 왔다.

    “그런 건 중요한 게 아니야. 생각해 봐, 자일스. 우리에게 남은 게 뭔지 말이야. 주변을 둘러보라고. 아무것도 남질 않았어. 심지어 우리가 어릴 적부터 지내 온 집도…….”

    감정이 북받쳤는지, 셀레스트는 잠시 말을 잇지 못하며 한 손으로 입을 가렸다. 이제 그녀의 목소리엔 울음기가 서려 있었다.

    “다 불타고…… 없어졌잖아. 우리에게 남은 건 이제 서로뿐이란 말이야. 우린 한 번도 홀몸으로 살아가야 했던 적이 없어. 그런 외로운 삶을 전혀 알지 못한다고. 그러니까 더더욱 서로가 곁에 있어야 해. 나중엔 생사도 알지 못하게 될 수도 있잖아. 그땐 어떡할 건데?”

    자일스는 셀레스트의 손을 힘 있게 잡았다. 그는 누이가 용기를 얻기를 바랐다. 유일하게 남은 가족에 대한 미련을 떨쳐 버릴 만큼 강해지기를 바랐다.

    “누나는 괜찮을 거야. 나도 그렇고.”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지금 누나가 이러고 있는 것조차 내가 누나의 발목을 잡고 있다는 증거야. 나로부터 벗어나. 그리고 자유롭게 살아. 아무도 모르는 곳에 가서 누나가 원하는 일들을 해. 난 누나에게 그런 삶을 주기 위해 모두를 배신한 거야. 그걸 이해한다면 내 부탁을 들어줘.”

    셀레스트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녀는 자일스를 붙잡고 한참을 운 끝에, 짐 가방을 들고 그녀만이 아는 곳으로 떠나는 차에 올라탔다.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자일스는 다시는 셀레스트를 만날 수 없었다.

    만나기를 원치도 않았고, 그녀가 어떤 식으로든 자일스가 하는 일에 휘말리지 않기를 바랐다.

    그저 혼자서 자유를 누리기만을 원했을 뿐이었다.

    그것이 자일스가 원했던 단 하나의 소원이었다. 누이에게 자유를 주는 것. 전쟁 혹은 혁명이라는 해일에 휩쓸릴 일 없이 평범하고 소박한 삶을 누리게 되는 것.

    실제로도 자일스는 셀레스트가 잘 살고 있을 거라 믿었다. 그가 가진 모든 재산을 넘기는 동시에 셀레스트의 목숨을 약속받았으니까.

    지금은 눈물을 흘리겠지만 언젠가는 결혼도 하고, 안락한 가정을 꾸릴 수 있게 될 거라 생각했다.

    세월이 흐르고 흰 눈이 빗발치는 겨울이 찾아왔다.

    이제 셀레스트는 피투성이가 된 채로 자일스의 몸 아래에 누워 있었다. 얼굴 반쪽은 검게 그을리고, 나머지 멀쩡한 쪽도 그가 알던 예전의 셀레스트와는 전혀 다른 사람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자유를 얻기를 바라면서 그녀를 저 멀리 있는 세상으로 날려 보냈다. 아니, 정확히는 자유를 주었다고 믿었다.

    죽은 생선처럼 허공을 바라보고 있던 셀레스트의 시선이 자일스 쪽으로 옮겨 왔다.

    “왜 나를 붙잡지 않았어?”

    “셀레스트.”

    “내게 자유를 준다고 했잖아. 나를 혼자 보내 놓고서, 내가 어떻게 살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관심조차 없었던 거야? 그저 나를 잊어버린 거지? 나를 눈앞에서 치우고 싶었던 거지?”

    “미안해…… 미안해, 셀레스트…….”

    “나를 네 곁에 두었다면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 텐데. 다 네 잘못이야. 다 네 잘못이라고. 내겐 아무 잘못이 없어. 죽어야 할 사람이 있다면 바로 너였잖아.”

    자일스는 차마 대답할 수 없었다. 그는 누이의 시체를 내려다보면서 하염없이 눈물만 뚝뚝 흘렸다. 셀레스트가 맞았다. 그의 안일함이 셀레스트를 죽게 만든 원인이었다. 자일스 때문에…… 셀레스트가 죽었다.

    다시 눈을 떴을 땐 시체의 모습이 조금 달라져 있었다. 셀레스트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대신 그 자리에 누워있는 인물은 안나였다.

    놀란 자일스가 안나의 이름을 소리쳐 불렀다.

    “안나, 안나! 정신 차려!”

    하지만 안나는 끝내 눈을 뜨지 않았다. 싸늘한 시체는 곧 눈발이 되어 바람에 흩날렸다. 이제 자일스의 곁에 있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괜찮을 거라고, 아무 일 없을 거라 믿고서 자유를 주려 했던 결정이 결국 셀레스트를 죽였다. 어찌 보면 정해진 운명이기도 했다. 자일스는 동등한 혁명군조차 아니었으니까. 얼마나 충성했든, 언젠가는 버려질 일이 다분한 벨담 지주의 핏줄이었으니까.

    셀레스트 또한 그들의 눈에는 결국 벨담 출신 여자에 불과했을 것이다.

    누이의 말이 맞았다. 그녀를 곁에 두었어야 했다. 진정으로 지키고 싶었다면 그렇게 하는 게 옳았을 텐데.

    나는 어째서 그런 결정을 내리지 않은 거지?

    소중한 이를 잃는 경험은 한 번으로 충분했다. 똑같은 일을 두 번 겪을 수는 없었다.

    이제 그의 곁에 남은 사람은 안나뿐이었다. 안나를 지킬 수 있는 이 또한 그밖에 없었다. 안나가 무어라 말하든 그녀를 안전하게 지켜야만 했다. 자일스를 향해 울부짖고 저주를 퍼붓는다 해도 어쩔 수 없었다.

    자유는 더 이상 아무도 구할 수 없었으니까.

    안나의 생존은 곧 자일스의 생존과도 같았다. 안나가 죽는 모습을 볼 바에는 차라리 그녀의 미움을 사는 편이 훨씬 나았다.

    그는 알고 있었다. 안나가 밀폐된 곳에 갇히는 걸 극도로 싫어한다는 사실을. 안나는 그 안에서 눈물을 흘릴 것이다. 어쩌면 그들이 솔즈부르의 저택에서 처음 만났던 그 시절처럼, 자일스를 다시 증오하게 될지도 몰랐다.

    자일스는 그렇다 해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다. 죽어 가는 안나로부터 마지막 사랑의 속삭임을 듣는 것보다 그를 증오하며 살아가는 모습을 보는 편이 더 낫지 않겠는가.

    그 편이 안나에게도 이로울 거라 믿었다.

    죽으면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된다.

    안나가 기절했을 때, 그녀의 흰 드레스가 핏물에 젖어 드는 모습을 두 눈으로 보았을 때 자일스는 비로소 다시 한번 확신했다.

    그는 안나가 죽기를 원하지 않았다.

    그 무엇을 대가로 희생해야 한다고 해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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