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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을 사랑한 건 살아남기 위해서였다-54화 (54/93)
  • <54화>

    8. 행복한 결말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온몸이 저리고 식은땀이 흘렀다. 내가 밀폐된 공간에 갇혔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사방의 벽이 나를 향해 점점 좁혀져 오는 듯 환각이 밀려들며 숨이 막혔다.

    또다시 이런 일이 벌어지다니, 그럴 수는 없어. 그보다 더욱 당황스러웠던 건 내가 버티지 못하고 무너졌다는 사실이었다. 저택에 있었을 땐 상황이 더 심각했는데. 나는 마룻바닥 밑이나 몸을 최대한 웅크려야만 하는 벽장 안에서도 잘 버틸 수 있었는데.

    그에 비하면 침대와 책장이 있는 이 고급스러운 방은 황제의 침실이나 다름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산산조각 났다. 내가 나약해졌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바닥에 드러누워 웅크린 채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러고 있으니까 그나마 숨을 제대로 쉴 수 있었다. 최대한 아무 생각도 하지 않으려 했다. 내가 갇혔다는 사실도, 모든 통로가 막힌 이 방의 생김새도. 모든 생각을 차단하자 버틸 만해졌다.

    누군가는 구하러 오겠지.

    반드시 그럴 거야.

    실낱같은 희망에 매달려 죽은 사람처럼 움직이지 않은 지 몇 시간이나 흘렀을까. 나는 거인의 발에 짓눌린 사람처럼 저려 오는 고통에 몸부림치면서도 꿋꿋하게 버텼다. 아무리 그렇다 해도 말이지, 이대로 까무러쳐 죽을 수는 없는 일이지 않은가.

    오고 있을 거야. 내가 없어진 걸 알고서 나를 찾는 중일 거야.

    그때였다. 나는 누군가 열쇠를 넣고 돌리는 소리를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땀에 흠뻑 젖은 채로 벌떡 몸을 일으키는 순간, 문이 열리고 한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자일스였다. 평소와는 달리 제복을 입지 않고 있었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나는 어지러운 와중에도 기뻐서 그의 이름을 불렀다.

    “자일스!”

    그가 문을 닫았다. 뭐, 상관없었다. 그가 나를 데리고 나가 줄 테니까. 나는 그를 향해 다가가려다 그만 휘청거리며 쓰러지고 말았다. 바닥으로 추락하려는 내 몸을 자일스가 간신히 붙잡았다.

    “안나, 괜찮아?”

    그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어 왔다. 나는 잠시 갈등했다. 그렇다고 해야 하나, 아니라고 해야 하나? 물론 내 상태는 전혀 괜찮지 않았지만 그가 나를 구하러 왔다는 사실만으로도 모든 게 괜찮기도 했다.

    “당신이 올 줄 알았어.”

    “아픈 건 좀 어때?”

    “뭐가? 난 괜찮아. 봐 봐, 멀쩡하잖아.”

    “네게 진통제를 놔 줬어. 효과가 있는 것 같아 다행이다.”

    난 그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도 알아듣지 못했다.

    아무튼 중요한 건 따로 있었다.

    “나가자.”

    내가 그의 손을 잡아끌며 말했다.

    “이 빌어먹을 곳에서 나가자고. 지금 몇 시야? 하늘을 보고 싶어 죽겠어.”

    “안 돼.”

    “뭐?”

    “안 된다고.”

    나는 할 말을 잃고서 그의 얼굴만 빤히 쳐다보았다. 자일스는 한 치도 물러서지 않을 것처럼 단호하게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왜 그런 눈으로 나를 보는 거지? 나는 그가 내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고 생각했다.

    “무슨 말이야? 내 말은 바깥으로 나가자는 거야. 봤어? 어떤 미친놈이 창문에 판자를 못질해 놓은 거.”

    “넌 여기 있어야 해.”

    “장난칠 기분 아니니까 그만해.”

    “미안해. 하지만 당분간은 이곳에서 나갈 수 없어.”

    “장난 그만 치라니까!”

    내가 소리를 질렀지만 자일스는 그런 반응마저도 다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 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현실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던 나는 그를 뿌리치고 문을 향해 튀어 나갔다. 하지만 내가 문고리를 잡기도 전에 그가 내 몸을 붙잡았다.

    “이거 놔!”

    “안나, 진정해.”

    “놓으라고! 미친 새끼, 내 몸에서 손 떼!”

    아무리 몸부림을 치고 그의 팔뚝을 떼어 내려 해도 단련된 군인의 무지막지한 완력 앞에서는 소용이 없었다. 믿을 수 없었지만 믿어야 했다. 나를 가둔 미친놈이 바로 자일스였다. 그는 나로 하여금 이 끔찍한 방에서 지내기를 원했다.

    “……네가 한 거야? 네가 날 납치한 거냐고.”

    “납치한 게 아니야.”

    “이게 납치가 아니면 뭔데! 저 판자는 어떻게 설명할 셈이야? 완전히 폐쇄된 곳이잖아! 나를 왜 이런 곳으로 데려온 거야?”

    “네 안전을 위해서라면 어쩔 수 없었어.”

    “웃기고 있네.”

    나는 씹어 뱉듯이 쏘아붙이며 온 힘을 다해 그에게서 떨어졌다. 그는 여전히 문 앞을 막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내 안의 뭔가가 와르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다.

    처음부터 이렇게 될 운명이었나.

    “솔직하게 말해. 그들이 나를 처형하라고 말한 거야? 이럴 거면 애초부터 그냥 죽여 버리지 그랬어. 그동안 나를 갖고 놀았던 거야?”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아.”

    “나는 널 믿었어, 자일스. 널 믿었다고.”

    나는 새빨개진 얼굴로 눈물을 뚝뚝 흘리며 말했다. 슬퍼서는 절대 아니고 화가 났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그가 이런 짓을 저질렀다는 사실이 화가 나서 참을 수가 없었다.

    “내게 사랑한다고 말했잖아. 내가 죽길 원하지 않는다고 그랬잖아. 난 그 말을 전부 믿었어. 당신이 극악무도한 살인자라고 해도 상관없었어. 우린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유일한 사이라고 생각했으니까. 그런데 당신이 내게 무슨 짓을 했는지 봐! 내 꼴을 보라고!”

    자일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꾸할 가치도 없다고 느끼는 건지도 모르겠다. 난 이제 알았다. 우리 사이를 연결해 주고 있던 끈은 이제 끊어져 버렸다.

    “내게 좋은 일들이 생길 거라 믿었던 내가 멍청한 년이지. 이럴 줄 알았어야 했는데. 당신을 믿는 게 아니었어.”

    “나를 미워해도 좋아. 하지만 지금은 내 말을 들어줘야 해. 너도 네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아야만 하니까.”

    “이제 와서 내가 무슨 말을 듣길 원하는 건데?”

    “안나, 제발.”

    1초도 더는 그와 상종하고 싶지 않았지만 나는 결국 한 발자국 물러섰다. 그가 나를 배신한 게 아닐지도 모른다는 미약한 희망에 매달리고 싶었던 걸까? 아직 자일스에게 미련이 남은 걸까.

    “그래, 말해 봐. 네가 외워 온 그 잘난 대본 좀 읊어 보라고. 물론 네 말을 받아들일지 말지는 내가 판단할 거야.”

    “너를 해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있어. 아직 자세한 건 알아내지 못했지만 네가 위험에 처해 있다는 사실은 확실해. 그들이 누군지 밝혀 낼 때까지 당분간 이곳에 있어 줘. 이곳에서라면 안전할 거라고 장담할 수 있으니까.”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너는 공연장에서 거의 죽을 뻔했어. 기억 안 나?”

    나는 기억을 되살려 보려 했지만 제대로 떠올릴 수 있는 게 거의 없었다. 연주를 위해 무대 위로 입장하던 것까지는 기억났다. 문제는 그 이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전혀 기억할 수 없다는 거였다.

    “……누가 나를 쏘기라도 했다는 거야?”

    “조명 장치가 추락했어. 너는 그 파편에 맞았고. 출혈이 너무 심각해서 조금이라도 지혈이 늦었다면 정말 죽었을지도 몰라.”

    나는 문득 내 몸을 더듬어 보았다. 멀쩡한 줄 알았던 복부에 붕대가 감겨 있었다. 진통제 운운했던 게 다 그런 뜻이었던 건가?

    “그럼 의사는 지금 어디 있는데?”

    “의사는 없어. 내가 직접 처치한 거야.”

    “당신이 직접 의사 역할을 했다고?”

    “군인들은 모두 야전 의술을 훈련받아. 특히 상처를 꿰매고 피를 멎게 하는 기술들을. 언젠가는 전장에서 의무병 없이 동료를 살려야 할 순간이 올 테니까.”

    흐느끼던 목소리가 귓가에 들리는 듯했다. 죽지 말아 달라고 애원하던 목소리도. 이제야 자일스가 왜 그런 말들을 했는지 이해가 갔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그를 용서할 수가 없었다.

    “조명 장치가 추락했다고?”

    “네가 연주를 시작하려던 그때 일어난 일이야.”

    “그냥 사고였을 수도 있는 일이잖아.”

    “사고가 아니야. 누군가 고의적으로 손을 댄 게 분명해. 너를 노리고 일을 벌리려 한 거야, 안나. 사고라기에는 때와 장소가 정확히 들어맞아.”

    “아직 확실하게 아는 건 아무것도 없다며!”

    “너는 거의 죽기 직전이었어! 그 누구도 우연하게 죽음을 맞이하지는 않아! 다른 사람도 아닌 네 경우에는 더더욱 우연일 수가 없어! 그건 사고가 아니었다고! 너도 알잖아, 안나. 언제 위협받을지 모른다는 걸!”

    “그래서 날 이곳으로 데려다 놓은 거야?”

    그는 나를 감옥에 가둬 놨다. 내 안전을 명분 삼은 채. 자일스가 안전할 거라 생각하는 이 빌어먹을 방이 나를 제일 먼저 죽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그는 알아채지 못한 것 같았다.

    “다른 곳일 수는 없었어?”

    “네가 안심하고 지낼 수 있는 곳은 여기뿐이야.”

    “안심하고 지낸다고?”

    그의 말에 다시 화가 치밀어 올랐다. 나는 두꺼운 커튼 쪽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여기는 창문조차도 없잖아!”

    “어쩔 수 없는 일이었어.”

    “뭐가? 이것도 내 안전 때문이야? 창문에 판자를 못질하고, 바깥에서 문을 걸어 잠그는 게? 내가, 내가 뭘 두려워하는지 잘 알면서도 당신은…….”

    그 어떤 이유가 있더라도 자일스를 이해할 수는 없었다. 이해하고 싶었지만 도저히 그럴 엄두가 나지 않았다. 나를 지켜 주고 싶었다면, 적어도 이런 식은 아니어야 했다.

    “내가 말했잖아. 내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다 말해 줬었잖아. 차라리 몰랐다면 모를까, 당신은 나에 대해 속속들이 알잖아! 당신도 결국 그놈들이랑 똑같은 거야. 날 죽이고 있는 거라고!”

    자일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를 애써 무시하려는 건지도 모르겠다. 나는 차라리 그가 죄책감이라도 느끼기를 바랐다. 그리고 나를 이곳에서 꺼내 주기를 바랐다.

    “나가게 해 줘. 두 번 다시 갇히고 싶지는 않아.”

    “널 매일 살피러 올게.”

    “그딴 게 무슨 소용이야!”

    “안나! 이해가 안 돼? 널 해치려 하는 놈들이 저 바깥에 있다고 했잖아! 그 어디에 있든, 넌 언제든지 다시 공격받을 수도 있어. 죽을 수도 있다고! 나는 너를 잃고 싶지 않을 뿐이야! 너도 내게 살고 싶다고 말했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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