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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을 사랑한 건 살아남기 위해서였다-53화 (53/93)
  • <53화>

    “근무 중도 아닌데 왜 매일 제복을 입고 다니는 거야?”

    “군인은 24시간 내내 근무 대기를 해야 해.”

    “와, 뭐가 그래? 끔찍하다. 안 그래도 엄청 불편해 보이는 옷인데. 숨은 잘 쉬어져?”

    “제복 때문에 호흡 곤란을 호소한 사례는 지금까지 단 한 건도 없었어.”

    “농담한 거잖아. 당신은 그것도 몰라?”

    농담할 여유가 생긴 걸 보니 그래도 이전보다 기운을 차린 모양이었다. 자일스는 그저 웃음만 지어 보였다.

    아름다운 교향곡의 선율이 방음벽을 뚫고서 감미로운 음색을 전달했다. 그 소리를 가만히 듣고 있던 안나가 말을 꺼냈다.

    “고마워. 내 곁에 있어 주려고 해서.”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야.”

    “당신은 내가 그렇게 좋아?”

    그건 갑작스러운 질문이었다. 무슨 대답을 돌려줘야 할지는 아주 뻔했지만, 자일스는 선뜻 입을 열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그는 이런 질문에도 가감 없이 대답할 만큼 능청스러운 사람이 못 되었다.

    다행인 사실은, 안나도 그를 이해한다는 것이었다.

    “가끔은 당신이 별나게도 느껴져. 나는 사랑 받으려면 노력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거든. 그런데 당신은 내가 노력하든 노력하지 않든 늘 그 자리에 있잖아.”

    “난 네가 곁에 있다는 사실 하나로 만족해.”

    “내가 있으면 어떤 기분인데? 응? 말해 봐.”

    그때 박수 소리가 울렸다. 오케스트라의 연주가 끝난 것이다. 이제 안나가 대기실 바깥으로 나갈 차례였다.

    “잘하고 와.”

    “연주회 끝나면 내 질문에 대답해 줘야 해.”

    대기실 문이 열렸다. 잠시 무대가 어두워졌다가, 다시 밝아졌다. 이제 무대 중앙에는 커다란 그랜드 피아노가 있었다.

    안나는 자일스를 마지막으로 돌아보고는 그대로 앞으로 나아갔다. 하얀색 드레스 자락이 그녀의 걸음을 따라 물결치듯 흔들렸다.

    더 이상 대기실에 있을 이유가 없었던 자일스는 문을 열고 복도를 빙 돌아서 객석이 있는 쪽으로 향했다. 피아니스트를 맞이하는 박수 소리가 다시금 연주홀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오케스트라를 거느리고서 피아노 앞에 앉은 금발의 음악가가 보였다. 그녀가 준비되었다는 신호를 보내면, 곧 오케스트라가 연주를 시작할 것이다.

    자일스는 안나가 호흡을 가다듬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물론, 그녀가 연주를 성황리에 마칠 것이라는 믿음은 변치 않은 채였다. 안나는 훌륭한 피아니스트였다. 그 누구보다도 자일스가 제일 잘 알고 있었다.

    문득, 자일스는 안나의 몸이 묘하게 흔들리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그는 저도 모르게 미간을 좁혔다. 조명 때문에 착시가 일어난 건가? 빛이 가만히 있질 못하고 안나의 몸 위를 어른거렸다. 이게 과연 의도된 건지 아닌지 분간할 수가 없었다.

    그는 곧 뭔가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연극 무대라면 모를까 연주회 공연장에서 조명 불빛이 저리 산만하게 움직일 리는 없다. 자일스는 조명이 매달린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마치 보이지 않는 바람이 불고 있는 것만 같았다.

    자일스가 관객석을 마구잡이로 헤치고 나아가자 사람들이 불평을 쏟아 냈다. 하지만 그는 멈출 수 없었다. 심장이 뛰고 있었다. 불안이 극에 달할 때면 항상 나타나는 증상이었다. 쿵! 쿵! 쿵! 자일스는 사람들을 지나쳐 무대 쪽으로 나아갔다.

    그가 외쳤다.

    “안나!”

    이제 막 지휘자와 시선을 마주친 참이었던 안나가 그쪽으로 홱 고개를 돌렸다.

    그 순간이었다.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깨닫기도 전에 사방이 암흑으로 뒤덮였다. 동시에 무언가 추락하며 무시무시한 굉음을 울렸다. 밝게 비춰지고 있던 무대는 순식간에 사라졌다.

    사람들이 경악에 질린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몇몇은 겁에 질려서 공연장을 빠져나가려고 했다. 자일스는 그들과 정확히 반대 방향으로 달렸다.

    안나, 안나! 그가 이름을 소리쳐 불렀으나 대답이 들려오질 않았다. 그는 확인해야만 했다. 안나가 무사할까? 무사할 것이다. 고작 이런 일로 안나를 잃는다는 건 말이 되지 않았다.

    다행히 누군가가 비상 조명을 켠 덕에 그나마 앞을 볼 수 있게 되었다. 자일스는 무대 위로 올라섰다. 오케스트라 단원들이 이미 무대 바깥으로 도망쳤는지 무대가 텅 비어 있었다.

    그곳엔 단 한 사람만이 있을 뿐이었다.

    “안나……?”

    박살 난 조명 장치 근처에 안나가 쓰러져 있었다. 파편이 박힌 복부 주변으로 붉은 선혈이 천천히 번져 나가고 있었다. 자일스는 그만 그 자리에 굳어 버렸다. 그는 이러한 광경을 예전에도 목도한 적이 있었다.

    새하얀 배경에 붉은 피.

    땅 위로 희게 덮인 눈과 그 위를 적시던 혈흔…….

    정신이 나갈 것 같았다. 안나가 죽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죽은 거야. 죽고 만 것이다. 자일스는 누이를 잃었듯이 안나마저도 잃어버렸다. 과거의 잔상이 그렇게 말해 주고 있었다.

    안나가 죽었다.

    셀레스트가 그랬듯이…….

    “안나! 제발, 제발…….”

    그는 반쯤 흐느끼며 방황하다 기도하는 심정으로 안나의 동맥을 짚어 보았다. 박동이 있었다. 하지만 그마저도 오래가지는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미 출혈이 심각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사람을 부를 여유조차 없었다. 자일스는 안나를 품에 안아 들고 뛰었다. 공연장에 의료진 따위가 대기하고 있을 리 없었다. 안나를 구할 수 있는 사람은 그뿐이었다.

    같은 일이 일어나도록 둘 수는 없어.

    또다시 빼앗길 수는 없어.

    더는 안 돼.

    자일스의 머릿속엔 온통 그런 생각뿐이었다.

    *

    익숙한 남자의 목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

    ‘죽지 마, 안나.’

    ‘제발. 죽지 마.’

    정신이 온전치 않은 와중에도 안나는 속으로 대답했다. 난 안 죽어. 죽기를 원했다면 벌써 몇 년 전에 흙으로 돌아갔겠지. 왜 그런 바보 같은 질문을 하는 거야?

    난 가족들이 날 말려 죽이지 못해 안달할 때 비로소 내 마음을 정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곱게 죽어 주지는 않겠다고 말이다. 날 죽일 수 있는 건 오직 흘러가는 세월뿐이리라. 평생을 진창에 처박혀 살아야 한다고 해도, 나는 결국 사는 쪽을 택할 것이다.

    남자는 내게 계속해서 빌었다. 제발 살아남아. 죽으면 안 돼. 내 곁에 있어 줘. 기분이 이상했다. 누군가 내게 욕을 퍼부으며 죽어 버리라고 외친 적은 있어도 제발 살아 달라고 간청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가 누군지 알고 싶었다. 내 목숨을 붙잡아 놓으려는 이가 누구인지 알아야만 했다. 이게 내 망상이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해야 했다.

    나는 한쪽 손을 들어 올리기 위해 애를 썼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내 오른손은 처량하게 움찔거리기만 할 뿐이었다.

    그러자 남자가 내 손을 힘 있게 잡았다. 그의 목소리에는 어느덧 안도감이 서려 있었다.

    “안나.”

    아, 그리고 그 순간 나는 알 수 있었다. 내 앞의 남자가 누구인지. 내가 살기를 바라는 별난 이가 누구였는지. 나는 그의 이름을 부르려 했다. 자일스. 자일스 헤센.

    나는 죽지 않을 거야.

    그러니까 제발 울지 마.

    어느 순간 정신을 차린 나는 눈을 떴다. 이번에는 앞을 제대로 볼 수 있었다. 여기는 어디지? 처음 보는 장소였지만 아늑하고 평안한 곳이었다.

    누군가 오랜 시간을 공들여 꾸민 것 같았다. 이곳의 주인이 될 사람이 마음 놓고 지내기를 바라면서 말이다. 미색 바탕에 잔꽃무늬 패턴이 그려진 벽지가 특히 눈에 띄었다. 누구를 위해 만든 공간일까?

    나는 몸을 일으켰다. 그보다 중요한 건 내가 여기서 뭘 하고 있느냐는 것이었다. 나는 기억을 복기하려 애썼다. 본래대로라면 나는 뭔가를 하고 있어야만 했다. 무언가 중요한 일을…… 하지만 그게 뭐였지?

    문득 피아노의 형상이 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그래, 나에게는 중요한 연주회가 있었다. 연주회는 어떻게 된 거지? 잘 마친 건가? 그랬다면 좋을 텐데. 그런데 왜 아무런 기억도 나질 않는 거지?

    연주를 제대로 마친 것 같지가 않았다. 정확히는 내가 피아노를 연주하는 장면조차 떠올릴 수가 없었다.

    나는 복부에 두꺼운 붕대를 칭칭 감고 있다는 사실도 자각하지 못한 채 침대를 벗어났다. 몸 이곳저곳이 쑤셔 왔지만 걷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야 했다. 분명 바깥으로 나가면 다른 사람을 만날 수 있을 거다.

    나는 문손잡이를 잡고 돌리려 했다. 하지만 문이 열리지 않았다. 철컥, 철컥. 불길한 소음만 연달아 낼 뿐이었다. 뭐지? 문이 고장 났나? 나는 문에 몸을 부딪치기도 해 보았지만 전혀 소용이 없었다.

    누군가 바깥에서 문을 잠근 게 분명했다.

    그 사실을 깨닫는 순간 내 안에 잠들어 있던 익숙한 공포가 스멀스멀 피어올라 내 몸을 잠식하기 시작했다. 그럴 리가 없어. 분명 사고가 난 거야. 나는 애써 스스로를 안심시키며 외쳤다.

    “바깥에 누구 없어요? 문이 잠긴 것 같아요!”

    대답하는 목소리는 없었다. 호흡이 가빠지고 손끝이 떨려 왔다. 조바심이 났던 나는 다른 탈출구를 찾기 위해 사방으로 고개를 돌렸다. 하다못해 창문이라도 뚫려 있다면. 나는 창이 나 있어야 할 부분으로 달려가 커튼을 젖혔다.

    그러나 내 앞에 드러난 건 꼼꼼하게 못질한 판자뿐이었다.

    갇혔어. 갇힌 거야. 이해할 수가 없었다. 왜 갑자기 이런 일이 일어난 거지? 악몽인가? 미친 듯이 살을 꼬집고 벽에 머리를 찧어 봤지만 그럴수록 꿈이 아니라는 사실만 더욱 견고해질 뿐이었다.

    절박해진 내가 다시 문손잡이에 매달렸다. 열어! 이 문 열라고! 화를 내 봤자 닫힌 문은 묵묵부답이었다. 나는 울면서 외쳤다.

    “도와주세요! 아무나 이 문 좀 열어 줘요!”

    하지만 아무도 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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