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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을 사랑한 건 살아남기 위해서였다-52화 (52/93)

<52화>

*

빈센트는 휘파람을 불면서 음산한 복도를 성큼성큼 가로질렀다. 벨담 치하 시절부터 오래 묵은 죽음의 냄새가 밴 곳이었다. 이곳을 거닐던 그는 생각했었다. 동향 사람들의 흔적을 완전히 덮고도 남을 만큼, 제 몫의 희생자들을 철저히 밟아 주겠노라고.

오직 그런 생각만을 하며 일해 왔다. 하지만 오늘은 좀 달랐다.

다른 벨담 놈들이 어떻게 되든, 그런 건 빈센트의 관심 밖이었다. 그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인물은 단 한 명이었다.

그는 자일스 헤센이 미웠다. 혐오스러웠다. 귀한 집안에서 자라 온 태가 기름처럼 좔좔 흐르는 반반한 낯짝도, 제 주제도 모르고 처음부터 입스윈 혁명의 일원이었던 양 임무를 수행하는 모습도…….

말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애초에 혁명군이 저놈을 거둬들여 주었다는 사실 자체가 빈센트가 보기에는 크나큰 모순이었다.

이대로라면 자일스는 제 과거를 완벽히 청산한 채로 혁명 영웅으로 거듭날 것이 뻔했다.

그런 꼴은 절대 보고 싶지 않았다.

저놈에게도 약점 하나쯤은 있을 텐데. 그는 배를 깔고 먹이를 기다리는 뱀처럼 오랫동안 그를 주시해 왔다. 조금이라도 틈을 보이면 그가 딛고 선 위태롭기 짝이 없는 기반을 무너뜨릴 작정이었다.

오랜 시간을 기다려 온 끝에…… 마치 보상처럼 흥미로운 인물이 그의 눈앞에 나타났다.

안나 키팅. 아름답고 유망한 피아니스트. 자일스 헤센은 그녀를 통해 행복을 얻었다. 처음에는 분노가 치밀었고, 그다음부터는 소유욕이 스멀스멀 밀려들었다. 만약 그의 품에서 안나를 빼앗는다면 헤센이 어떤 표정을 지을지 몹시 궁금해졌던 것이다.

하지만 그런 흥미는 쉽게 식어 버렸다. 빈센트는 본래 이성과의 교제에 관심을 두는 남자가 아니었다. 여자랑 시시덕대느니 한 명의 벨담 놈을 더 괴롭히는 것이 나았으니까.

아이러니하게도 빈센트의 그런 성향이 도리어 안나에게 더욱 커다란 관심을 갖도록 만들었다.

그는 취조실 문을 열어젖혔다. 불쌍한 꼴을 한 남자가 의자에 묶인 채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빈센트는 남자의 맞은편에 앉아 책상 위에 놓인 녹음기의 버튼을 눌렀다.

잡음이 섞인 대화가 취조실 안을 가득 채웠다.

‘그럴 리가 없어.’

‘뭐가.’

‘협상이 결렬되었을 리가 없다고! 넌 거짓말을 하는 거야. 분명 나를 고문하기 위해 그런 말을 하고 있는 거겠지. 난 벨담을 믿어. 조…… 조국이 나를 버렸을 리가 없어.’

‘네가 얼마나 대단한 존재라고, 벨담이 너 같은 놈 하나 때문에 아등바등하고 있을 것 같나?’

비웃는 소리가 적막을 갈랐다.

‘넌 아무것도 아니야. 너 하나쯤 없어도 그 나라는 잘만 돌아간다고. 아니지, 오히려 모든 걸 다 잃고 폭삭 내려앉았는데 국민 몇 명쯤 더 잃는 건 일도 아니지 않겠어?’

‘씨발, 더러운 입스윈 새끼가!’

둔탁한 파열음과 함께 비명이 울렸다.

‘자, 진정하시고. 내 말의 요지는 말이야. 어차피 얼마 지나지 않아 본국으로 돌아갈 테니 그 어떤 정보도 털어놓지 않겠다는 개소리 따윈 집어치우라는 거였어. 왜냐하면 벨담이 먼저 널 버렸으니까. 이제 여기서 개죽음당하게 생겼는데 이제 와서 신의 따위가 무슨 소용이야, 안 그래?’

‘…….’

‘내가 원하는 건 단 하나야. 기차 안에서 있었던 일들. 네가 보고 들은 모든 것들. 단 하나도 빠짐없이 말해.’

빈센트는 요원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빨리 감기 버튼을 눌렀다.

얼마 후, 다시 대화가 이어졌다.

‘정말이지 여러모로 피곤하게 만드는 놈이군. 몇 대 맞지도 않았는데 벌써 오락가락하면 어떡해?’

‘그……만.’

‘날 봐. 내 눈을 똑바로 봐! 정신 똑바로 차리라고, 멍청한 새끼. 네 이름이 뭐지? 네 이름이 뭔지 말할 수 있나?’

‘으…… 으으…….’

‘네 이름! 이름을 말해!’

‘위르겐…… 위르겐 바흐.’

‘그럼 이 사진 속 남자는 누구지?’

‘……알베르트, 레만.’

‘이 여자는? 또 헛소리하면 그땐 정말 죽여 버리겠다.’

‘엘…….’

‘그 이름이 아니잖아. 이 여자 이름이 뭐냐니까!’

남자는 계속해서 이름 하나를 중얼거렸다. 한숨 소리 끝에, 철컥 하고 총알을 장전하는 소리가 울렸다. 그러자 남자가 훌쩍이기 시작했다.

‘제발, 제발…….’

‘벨담에 대한 네 충성심은 잘 알겠다.’

‘아냐! 난 거…… 거짓말을 하지 않았어. 당신은 나, 나를 이 방에 가두고 잠 한숨 재우지 않았잖아! 다른 이름이 있었는데, 기…… 기억이…….’

‘무슨 개소리를 하는 거야.’

‘그, 그래! 성씨가 비스마르였어! 그가 그렇게 말했어. 비, 비스마르. 엘로이즈 비스마르라고…….’

‘……뭐?’

달칵. 녹음기가 다시 침묵했다. 살기 위해 아무 말이나 내뱉던 목소리의 주인은 반쯤 정신이 나간 눈으로 빈센트를 멀겋게 쳐다보고 있었다.

빈센트는 펜과 종이 한 장을 그의 앞에 내밀었다.

“서명해. 네 이름을 서명하면 약속대로 벨담으로 보내 주지.”

남자는 덜덜 떨리는 손을 들어 펜을 잡았다. 서명이 끝나기까지는 생각보다 오랜 시간을 기다려야만 했다. 그가 마지막 글자를 적는 순간, 빈센트는 책상 위에서 종이를 채 가듯이 집어 들었다.

「나는 녹취록의 진술이 전부 사실이며, 내가 알고 있는 사실들을 그대로 진술했음을 명백히 확인합니다.」

종이 위에 적힌 문구와 그 밑에 쓰인 애처로운 서명 덕에 흡족해진 빈센트는 비릿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앞으로 일어날 일들이 이렇게나 기다려진 적이 얼마 만이었던가?

어쩐지 그 여자만 싸고돌더라니.

분명 그런 놈일 줄 알고 있었지!

이제 달콤하고 만족스러운 순간만이 기다리고 있었다.

빈센트가 할 일은 증오스러운 남자의 몰락을 그저 앉아서 지켜보는 것뿐이었다.

*

불안감이 가시질 않았다.

당장이라도 불길한 일이 터질 것만 같았다. 마치 시한폭탄을 껴안고 있는 기분이었다. 빈센트가 의미심장한 말을 건넨 이후로는 더 그랬다. 나쁜 예감을 떨쳐 낼 수가 없어서, 지금 당장 안나를 어디론가 숨겨 둬야 하나 생각도 해 보았다.

그러나 그의 걱정이 기우라도 된다는 듯, 그 후로 며칠간은 아무런 징조도 혹은 변화도 없었다. 그는 매일같이 안나를 방문했다. 그 때마다 안나는 멀쩡했다. 그와는 달리 심하게 불안해하는 기색도 없었다.

다만 안나는 머지않아 열리게 될 연주회에 더욱 정신이 팔려 있었다. 그녀의 주의를 온통 사로잡은 오케스트라와의 협연 때문에 그녀를 둘러싼 현실을 잠시나마 내려놓은 것 같았다.

자일스는 굳이 안나를 방해하지 않았다. 안나가 무언가에 몰두하며 즐거워하는 순간을 망쳐 버리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주위를 경계하는 건 그 혼자서도 충분했다.

안나는 누구보다 음악에 열정적이었다. 어릴 적 유일한 위안이자 취미가 되어 주었던 피아노는 지금까지도 시름을 잊기 위한 출구이자 도피처였다.

피아노를 칠 때면 그녀는 행복해 보였다. 굳이 표정을 살피지 않더라도 그녀가 연주하는 음악을 듣고 있으면 누구라도 바로 알아챌 수 있으리라.

오케스트라와의 마지막 리허설이 한창이었다. 안나는 리허설 현장까지 꿋꿋이 따라오려는 자일스를 향해 의미심장한 눈길을 던졌다.

“자일스, 혹시 무슨 일 있어?”

그는 안나를 불안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아무 일도 아니야.”

“당신이 평소 같지 않아서 그래.”

“평소에는 내가 너무 소홀했던 모양이군.”

“그런 말이 아니야.”

안나는 눈치가 빠르고 생존 본능이 뛰어난 여성이었다. 자일스가 아무리 숨기려 해도 안나는 결국 알아채곤 했다. 자일스는 그런 안나를 위해 끝까지 미소를 지어 보였다.

“괜찮으니까 연습 잘 하고 와.”

그녀는 무언가 묻고 싶은 게 더 남아 있는 기색이었지만 결국 그를 남겨 두고 무대 위로 향했다. 화려하게 반짝이는 드레스도, 무대를 밝게 비추는 조명도 없었지만 안나는 여전히 무대 위에서 빛났다.

피아노 앞에 앉은 안나는 거대한 연주홀의 지배자였다. 오케스트라는 뒤에서 그녀를 보조해 줄 뿐이었다. 적어도 자일스는 그렇게 생각했다. 결국 선두에 서서 음악을 주도하는 건 피아노 선율이었고, 그 선율의 유일한 주인은 안나였으니까.

그녀가 평범한 피아니스트로서 살아갈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아마 그랬다면 자일스를 만날 일도 없었을 것이다. 예술을 사랑하는 음악가와 혐오스러운 과거에 찌든 장교 사이의 접점이 있을 리 만무할 테니까.

영혼 안에 깃든 무한한 잠재력을 펼치며 행복하고 당당하게 살 수 있었겠지. 지금처럼 정체를 들킬 걱정 따위는 할 필요도 없이 말이다. 자일스 대신에 온 입스윈이 평생토록 그녀를 사랑해 주었을 것이다.

언젠가는 그런 날들이 현실로 이루어질 수 있을까.

그녀에게도 진정한 의미의 평화가 찾아올 것인가.

어느 새 완연하게 무르익은 봄.

연주회 당일이 다가왔다.

“죽을 것 같아.”

대기실 소파에 드러누워 쿠션에 얼굴을 묻고 있던 안나가 중얼거렸다. 연주홀에서는 오케스트라의 연주가 한창이었다. 관객석은 저녁 일곱 시를 기점으로 많은 사람들로 들어찼고, 연주가 끝날 때마다 우레와 같은 박수가 이어졌다.

안나의 차례는 마지막이었다. 그녀가 연주함으로써 피날레를 장식하게 되는 것이다. 안나는 특히나 그 사실 때문에 부담스러워하고 있었다. 이건 그녀만의 연주가 아니라 입스윈 필하모닉의 연주회이기도 했다.

“안나, 너는 훌륭한 피아니스트야.”

“그래도 긴장이 되는 건 어쩔 수 없어.”

“넌 잘할 거야.”

자일스는 안나를 북돋아 주기 위해 그녀 곁에 앉았다. 잠시뿐이겠지만, 안나는 간만에 빈센트나 다른 혁명군에 대한 생각에서 벗어나 오로지 연주를 성공적으로 끝마치는 데에 몰두하고 있었다. 자일스는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보며 안도했다.

“지금은 불안하겠지만 피아노 앞에 앉으면 다시 자신감을 되찾을 거야. 분명해.”

“당신이 그걸 어떻게 알아?”

“넌 한 번도 피아노 앞에서 자신 없었던 적이 없으니까.”

그 말에 안나 또한 용기를 조금 되찾은 것 같았다. 한숨을 푹 내쉬던 안나가 문득 뭔가를 생각해 내더니 말했다.

“그러고 보니 단원들이 좀 무서워하는 것 같더라.”

“뭘? 연주를 망칠까 봐?”

“아니! 리허설부터 지금까지 내내 혁명군이 들락날락하니까 그렇지. 제복 입은 군인이 자꾸만 등장하는데 누군들 안 그렇겠어.”

긴장이 풀렸는지 안나가 킥킥 소리를 내며 웃었다. 자일스가 말을 잇지 못하는 사이 그녀가 물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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