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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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일스 헤센은 언제나 그렇듯 이른 아침에 눈을 떴다. 커튼 새로 푸른 빛이 희미하게 새어 들어오는 걸 보니 이른 새벽녘의 어스름이 이제 막 가신 참이었다.
안나는 아직 잠에서 깨지 않았다. 지난밤에 잡았던 손을 아직도 놓치지 않은 채로. 다행히 그녀는 악몽을 꾸지 않고 잘 자고 있었다.
언제쯤 잠에서 깰까? 적어도 스스로 일어나기 전에 깨우고 싶지는 않았다. 자일스는 출근을 해야 했고, 아무래도 작별 인사 없이 집을 나가야 할 것 같았다.
나가기 전에 아침 식사라도 간단히 차려 놓고 갈 심산으로 그는 조심스레 손깍지를 풀었다.
부엌에는 계란이 있었다. 계란으로 만들 수 있는 요리는 많았다. 그는 식빵을 옆에 꺼내 놓고서 노른자를 푼 계란을 가열한 팬 위에 부었다. 주걱으로 팬 위를 뒤적거리면서 그는 생각에 잠겼다.
어젯밤에 나누었던 대화가 못내 신경 쓰였다. 만일 어떤 이유로든 안나의 입지가 위험해진다면. 물론 그런 일은 없어야 하겠지만, 안나는 틀린 말을 하지 않았다. 애써 외면하는 건 해결책이 아니었다.
빈센트가 안나에게 뒤틀린 관심을 보이는 게 문제였다. 대놓고 반항심을 드러내도 무관심으로 방치했던 게 이런 식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설득이나 협박은 당연히 통하지 않을 게 뻔했다. 유일한 해결책은 안나에게 쏠리기 시작한 관심을 다시 그에게로 돌리는 것뿐이었다.
그가 안나에게 집중하지 못하게 만들어야 했다.
빈센트만 처리한다면, 당분간 안나는 안전할 것이다. 그 누구도 엘로이즈 비스마르가 살아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못할 테니까.
몰락한 백작가의 막내 영애는 이미 모두의 기억에서 잊힌 지 오래였다. 아무도 의심하지 않을 것이다. 아무도 신경조차 쓰지 않을 거다.
빛나는 무대 위에서 아름다운 음악을 연주하는 신예 피아니스트를 끌어내리고 싶어 할 자가, 과연 있을까?
스크램블 에그가 완성되었다. 따뜻할 때 먹으면 제일 좋겠지만 계란 하나 때문에 안나를 깨우고 싶지는 않았다. 자일스는 접시에 적당히 구운 식빵 두 쪽과 방금 요리한 계란을 세팅하고 식탁 위에 올려놓았다.
제복을 주워 입고 곧 떠나려던 참이었던 자일스는 문득 유일하게 커튼을 치지 않은 창 쪽에 눈길을 주었다.
누군가와 눈이 마주쳤다.
그 사실을 인지하자마자 반대쪽에서 커튼을 드리웠다. 이제 그들을 훔쳐보는 이는 아무도 없었지만 자일스는 제자리에서 움직일 수 없었다.
분명 착각이 아니었는데.
감시당하고 있는 건가? 적어도 그들에게 원치 않은 관심을 가지는 자가 있었다. 아니, 정확히는 안나에게.
그녀도 이 사실을 알고 있었을까?
알았든 알지 못했든, 사실은 명백했다.
안나는 안전하지 않았다.
안나는 위협받고 있었다.
그건 누구였지? 자일스는 아침에 목격했던 일에 대한 생각을 하루 종일 떨쳐 버릴 수가 없었다. 찰나였지만, 자일스는 기억도 나지 않는 낯선 이의 시선을 도저히 잊지 못했다.
평소 같았다면 사소한 일 취급하고 금방 잊었을지 몰랐다. 우연히 이웃 사람과 눈이 마주쳤다는 사실 하나로 결론지을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을 테니까.
하지만 안나는 평범한 사람이 아니었다. 언제 감시가 붙어도 이상하지 않을 사람이란 말이다. 물론 누군가 안나의 정체를 알아챘을 가능성은 미약했지만, 그래도 여전히 안나는 귀족의 딸이었다. 그녀가 말했듯이 영원히 들키지 않으리란 보장은 없었다.
게다가 만약 우연이었다면, 그는 어째서 자일스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커튼을 내렸나? 그들을 지켜보고 있던 낯선 이는 자신의 신분이 드러나기를 원하지 않았다. 평범한 이웃이었다면 그렇게까지 철저하게 자기 자신을 숨기려고 했을까?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만약 혁명군에서 안나를 의심하고 있다면, 왜 당장 체포하지 않고 감시원을 붙이는 수고를 하는 거지? 의심할 만한 명백한 증거가 있다면 말이다. 이런 건 혁명군이 일하는 방식이 아니었다.
자일스는 혁명군 이외에 안나에게 적의를 품을 만한 세력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안나가 오리엔트 특급열차 작전에 긴밀하게 연루되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그녀는 작전을 위한 핵심적인 도구였다. 하지만 자일스를 위해 알베르트 레만을 배신했고, 자일스를 납치하려는 벨담 정보국의 작전은 처참히 실패로 돌아갔다.
그 때문에 안나가 새로운 표적이 된 거라면? 혹은, 그가 안나를 사랑한다는 사실을 확인한 벨담 측에서 아직 안나를 포기하지 못한 거라면?
지금 당장이라도 안나에게 나쁜 일이 생길지 모른다고 생각하니 머리가 아파 왔다. 안나를 잃게 되는 일은 상상조차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 일이 생긴다면 도무지 살아갈 수 없을 것 같았다. 그가 포기하지 않고 살아가는 건 오로지 안나 때문이었다.
누군가 사무실 문을 두드렸다. 책상 주변을 서성이던 자일스는 자리에 앉아 대답했다.
“들어와.”
놀랍게도 빈센트 모너건이 문틈 새로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차갑도록 무표정한 얼굴로 형식적인 경례를 올려붙이고는 문을 닫았다.
자일스는 빈센트가 건넨 서류를 받아 들었다.
취조 허가 요청서였다.
“아직도 그 벨담 요원들한테서 들을 것이 남아 있나?”
“어쩌겠습니까? 대위님께서 레만 놈에게 친히 죽음을 선사해 주시지만 않았다면 벌써 깔끔하게 끝났을 일을 가지고 질척여야 되는 제 입장도 좀 생각해 주시죠.”
“송환일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이제 와서 뭘 더 어쩌겠다는 거지?”
“마치 제가 그들을 심문하기를 바라지 않으시는 것처럼 말씀하시는군요?”
자일스는 대꾸하지 않았다. 솔직히 말하자면 껄끄러운 건 사실이었다. 그래서는 안 되는 일이지만, 이 사건에 연루된 벨담 요원들이 어서 본국으로 돌아갔으면 하는 바람도 있었다.
하필이면 빈센트가 이들의 취조를 맡았다는 사실마저도 불안했다. 혹시라도 안나가 꼬투리를 잡힐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자일스는 빈센트가 뜬금없이 안나를 물고 늘어지는 이유가 혹시 이 작전 때문은 아닌가 생각한 적도 있었다.
본래대로라면 안나가 알베르트 레만에 협력하기 위해 기차에 탔던 건 사실이니까.
“내가 왜 그들에게 자비를 베풀고 싶어 한다고 생각하는 거지? 이건 이미 종결된 사건이야. 벨담으로 밀입국하려던 이들을 송환하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고.”
“아직 시간은 남았잖습니까.”
“송환 대상에는 요원들도 포함되어 있다. 벨담은 그들이 무사히 돌아오기를 원해.”
“팔다리는 멀쩡하게 둘 테니까 걱정 마시죠.”
아무래도 그에게는 포기할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대체 뭘 더 듣고 싶어서 저러는 거지? 아침에 있었던 일 때문인지는 몰라도, 눈앞에 놓인 허가 요청서조차 안나에 대한 잠재적인 위협으로 느껴졌다.
하지만 허가해 주지 않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럴 만한 명분이 없었으니까. 만약 그를 돌려보낸다면 빈센트가 상부에 또 무슨 억지를 부릴지 모르는 일이었다.
할 수 없이 자일스는 펜을 들었다.
“……고문은 하지 마.”
“그런 시대는 이미 지났죠.”
그는 의외의 발언에 놀라서 빈센트를 올려다보았다. 한편, 빈센트는 자일스가 서명한 서류를 받아 들고서 한쪽 입꼬리를 끌어 올려 웃었다.
“그나저나 저번에 있었던 일은 죄송했습니다.”
“뭐가 말이지?”
“제가 안나 양께 무례를 범한 일 말입니다. 대위님께도 그렇고.”
“그 일에 대해선 더 할 말 없어.”
“괜찮다고 말씀해 주시면 뭐가 잘못됩니까?”
어이가 없어서 무어라 대답하기도 싫을 지경이었다. 이만 빈센트를 돌려보내려던 그 때였다.
“안나 양께도 대신 전해 주시죠. 잠시 의심했던 걸 미안하게 생각한다고 말입니다.”
그는 그 말을 끝으로 몸을 돌려 사무실을 나가려고 했다. 무슨 뜻이지? 빈센트를 그대로 나가게 둘 수 없었던 자일스가 그를 불러 세웠다.
“지금 그게 무슨 말이지?”
“대위님도 아시다시피 안나 양이 이번 사건과 아예 관련이 없지는 않잖습니까? 오히려 긴밀한 편에 속했으면 속했지. 저는 모든 의문점을 빠짐없이 조사해야 하고 말입니다.”
“안나에 대해 조사했다는 말인가?”
“혹시라도 안나 양이 승객들과 함께 벨담으로 밀입국하려던 자는 아닌가 싶었을 뿐입니다.”
“모너건.”
“그 사건을 기점으로 갑자기 대위님 곁에 붙어서 떨어지지 않는 것도 영 의심스러워서요.”
“안나는 처음부터 조사 대상이 아니었어.”
“그렇다고 임무에 태만하면 나중에 뒷감당하기 어렵지 않습니까. 만일 안나 양이 대위님을 속이고 레만 놈에게 붙어서 벨담으로 가려다가, 잘 안 될 것 같으니까 대위님께 다시 달라붙어서 결백을 꾸며 내는 데에 성공한 것이었다면 이걸 누가 책임지겠습니까?”
잠시 일었던 분노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자일스는 빈센트가 안나를 정말 믿게 되었다고 말하는 건지, 아니면 반어법을 쓰면서 그의 반응을 떠보는 건지 확신할 수 없었다.
억측이 아니라 그는 거의 진실에 가까운 말을 하고 있었다. 실제로 안나는 기차에 타서 외국으로 떠나려고 했다. 그 외국이 벨담이라는 사실까지는 몰랐지만, 아무튼 안나는 알베르트 레만에 가담한 사실이 있었다.
“……지금껏 안나를 만날 때마다 그런 생각을 머릿속에 품고 있었던 건가?”
“의심하고 봐서 나쁠 건 없으니까요.”
“왜 처음부터 그런 사실을 내게 말하지 않았지?”
“사실 관계가 명확해지면 말씀드리려고 했습니다. 대위님이 안나 양과 만나는 사이라는 게 좀 걸려서 말입니다. 아무튼 아닌 걸 알았으니 이제 마음 놓을 일만 남은 거죠.”
문을 향해 성큼성큼 걷던 빈센트가 다시금 물어 왔다.
“정말 안나 양을 사랑하십니까?”
“나가.”
그는 어깨만 으쓱였을 뿐 불평하지 않고 그대로 문을 나섰다.
이윽고 문이 닫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