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화>
마침내 안전하다는 생각이 들었을 즈음에야 멈춰선 자일스가 걱정 어린 눈으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안나, 무슨 일 없었어?”
나는 고개를 저었다. 뒤늦은 탈력감이 온몸을 덮쳤다. 두 다리가 떨려서 가만히 서 있는 것조차도 힘들었다. 나는 겨우 그에게 물었다.
“저놈, 나한테 왜 저러는 거야?”
“내가 널 사랑한다는 이유로 시비를 걸어오는 것 같다.”
“아냐, 그게 아니야…… 아무래도 내가 누군지 눈치챈 것 같아. 알아챈 게 틀림없어. 내, 내 머리카락 색이 가짜인 것도 알았단 말이야.”
“안나, 괜찮아.”
“안 괜찮아! 그가 정말 알아 버린 거면 어떻게 해야 해?”
“그놈은 아무것도 몰라. 내가 장담할게. 너에 대한 정보는 내가 다 없애 버렸어. 괜찮아. 너는 입스윈 출신 피아니스트잖아. 그렇지? 너는 피아니스트야, 안나.”
그가 나를 품에 끌어안고 다독였다. 자일스를 껴안고 있으니 조금 진정되는 것 같기도 했다.
“다시는 혁명군을 만나고 싶지 않아.”
“미안하다. 이런 일이 있도록 놔둬선 안 되는 거였는데.”
“……쉬고 싶어, 자일스.”
“그래. 가자.”
내가 사는 연립 주택은 연습실에서 멀지 않았다. 나는 그와 손을 잡고 함께 거처로 향했다. 자일스는 이미 내 거처를 찾으려면 어디로 가야 하는지 익숙히 꿰고 있었다.
집으로 돌아온 후에도 나는 방금 전 있었던 일에 대한 생각을 쉬이 떨쳐 버릴 수 없었다. 나를 바라보던 빈센트의 눈빛이 아직도 눈앞에 선했다. 명백한 의심의 눈길이었다.
그가 내게 물으려던 게 뭔지 끝까지 들었어야 했는데. 그랬다면 조금이라도 마음이 편했을까?
나는 담요를 뒤집어쓰고 앉아 자일스가 타 준 차를 마셨다. 그런 식으로 몸을 데우니까 불안이 한층 가시는 느낌이었다. 물론 따뜻한 차 한 잔이 현실까지 바꿔 줄 수는 없는 법이다.
나는 결국 참지 못하고 물었다.
“만약 군인들이 와서 나를 잡아가면 어떡하지? 지금 당장이 아니라더라도 말이야. 나중에 그런 일이 일어날 수도 있잖아.”
한편 자일스는 나와 마주 보고 앉아 있었다. 그가 제복을 입고 있는 모습을 보노라면 나는 가끔 기이한 느낌을 받고는 했다. 내가 제일 두려워하는 사람들과 같은 옷을 입은 남자를 가장 신뢰하는 현실이 퍽 아이러니해서였다.
하지만 적어도 그는 내 편이다. 어느 기점 이후로 나는 그 사실을 전혀 의심하지 않게 되었다.
왜냐하면 그는 두 번이나 내 목숨을 구했으니까.
“그런 일이 절대로 일어나지 않을 거라 장담할 순 없을 거 아냐.”
“넌 무사할 거야.”
“어떻게 그리 확신해?”
“내가 무슨 짓을 해서든 막을 테니까.”
“당신이 노력했는데도 결국 그들을 막지 못하면?”
자일스는 이런 주제에 대해 별로 이야기하고 싶어 하지 않는 것 같았지만 나는 끝까지 굽히지 않았다.
나는 낙관주의와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무슨 일이 생기든 나는 항상 최악의 상황을 상상했다. 그래야 대비할 수 있을 테니까. 나라고 처음부터 이랬던 건 아니었지만 삶이 나를 그렇게 만들었다.
그가 마지못해 내게 대답했다.
“너는, 그러니까 네 예전 신분은 공식적으로 사망 처리되었어. 아무도 네가 살아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못할 거야. 그러니 구태여 네 행적을 수색하려고 하지도 않겠지.”
“누군가는 내가 엘로이즈와 똑같이 생겼다는 걸 알아챌지도 몰라.”
“안나.”
자일스가 내 손을 잡으며 만류했다. 그는 내 생각의 타래가 점점 길게 뻗어 나가는 일에 대해 우려하고 있었다.
자일스의 검은 눈동자가 나를 가만히 응시했다.
“자꾸 그런 생각 하지 마. 네게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칠 뿐이야.”
“난 현실적으로 생각하려 하는 것뿐이야.”
“방금 있었던 일은…….”
“굳이 그 일 때문만은 아니야. 난 항상 그런 생각을 해 왔어. 한 번도 내가 영원히 들키지 않을 거란 생각 따윈 해 본 적 없다고. 오히려 잊으려고 하면 더욱 불안해진단 말이야. 외면하는 건 결국 아무것도 바꿀 수 없으니까. 조금이라도 대안을 세워 놓는 것과는 분명 달라.”
자일스는 한숨을 쉬며 허공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윽고 생각에 잠기는 듯하던 그가 얼마 후 다시 말을 꺼냈다.
“만약 네 신분이 들통난다면, 혁명군 간부들이 그 사실을 제일 먼저 알게 될 거다. 물론 그중엔 나도 포함되어 있어. 그러니까 빨리 대처할 수 있을 거야.”
“어떻게?”
“너를 데리고 외국으로 망명을 신청해야지.”
“외국에서 나를 받아 주기나 할까?”
“받아 주지 않으면 밀입국이라도 해야지.”
그건 너무 무모하지 않느냐고 물으려던 나는 그를 보고는 그만 입을 다물었다. 자일스는 진심이었다. 국경에 배치된 군인들에게 들켜 총을 맞는 한이 있더라도 그는 나를 국경 바깥으로 내보낼 참이었다.
“외국으로 가고 싶어, 안나?”
자일스가 물었다. 지금 당장이라도 나를 차에 태우고 국경으로 달려갈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어서 나는 얼른 대답하지 못했다.
“지금 당장 가겠다는 소리는 아니야.”
“……혹시라도 무슨 일이 생기면 바로 말해. 내가 도울 테니까.”
“알았어.”
나는 서서히 식어 가는 차를 홀짝이며 그를 곁눈질했다. 싸구려 난로 불빛이 그의 얼굴을 붉게 비추고 있었다. 일렁이는 난롯불에 비치는 그의 굳은 얼굴을 바라보며 나는 자일스의 과거를 상상했다.
그가 혁명이라는 이름 아래에 귀족들을 끌어내고, 그들의 저택을 불태웠을 때도 저런 얼굴을 하고 있었을까.
온 벨담의 증오를 받을 만큼 잔인하고 지독한 사람이라는 게 상상이 가질 않았다. 내게는 한 번도 그런 모습을 보인 적이 없었으니까.
문득 무언가를 기억해 낸 내가 불쑥 말했다.
“그 계획은 취소하는 게 좋겠어. 외국으로 나가지는 말자.”
“왜 그렇지?”
“당신은 외국에 나가면 죽잖아.”
그러자 자일스 또한 무언가를 다시금 깨달은 듯 눈썹을 움찔거리더니 숨을 길게 내려놓았다. 외국에 나가는 순간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다는 사실을 그도 잠시 잊었던 것 같다.
“다른 계획이 필요하겠는데?”
“네가 입스윈에서 살 수 없게 된다면 그 방법밖엔 없어.”
“당신은 괜찮겠어?”
자일스의 시선이 내게로 와서 닿았다. 내 얼굴을 잠시 바라보던 그가 옅게 미소 지었다.
“안 괜찮더라도 끝까지 살아남을 거니까 걱정하지 마.”
차가 점점 미지근해지고 있었다. 난롯불이 점점 짙은 색으로 환히 빛났다. 어둠이 서서히 내려앉고 있다는 증거였다.
“이제 마음은 좀 편해졌어?”
그가 물어 왔다. 자일스는 한층 밝은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애써 그런 척 꾸며 내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항상 보면 그랬다. 가끔씩은 그가 어두운 면을 가진 사람이라는 사실을 내게 들키고 싶지 않아 하는 것 같았다.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조금은.”
“한숨 푹 자고 일어나면 더 나을 거야.”
“악몽이라도 꾸면 어쩌지.”
“……곁에 있어 줄게. 물론 네가 원한다면.”
자일스가 재빨리 덧붙였다. 그런 다음 내 눈치를 슬쩍 보는 모습이 어쩐지 웃기고 안쓰러워서 나는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나는 쿠션을 바닥에 깔고 누워 천장을 바라보았다. 물론 반쯤 어둠에 잠긴 집 안에서 시야에 제대로 들어오는 것들은 거의 없었다. 단 한 사람을 제외하고선 말이다.
내 눈길이 우두커니 앉아 있는 자일스 쪽으로 향했다. 밑에서 올려다보니까 또 달라 보였다. 생각보다 길게 머무르는 시선이 부담스러웠던지 그가 먼저 물어 왔다.
“왜 그래?”
“계속 그렇게 앉아만 있을 거야?”
그는 내 질문의 의도를 파악하지 못한 듯 혼란스러워 보였다. 그의 얼굴에 ‘그럼 내가 뭘 하고 있어야 하지?’라는 글씨가 크게 쓰여 있는 것만 같았다.
“여긴 네 집이잖아.”
“그래서?”
“내가 마음대로 행동할 수는 없다는 뜻이야.”
“왜 그리 새삼스럽게 굴어? 며칠 전에 여기서 섹스도 했으면서.”
별생각 없이 던진 말이었는데 자일스가 화들짝 놀라 귓불을 붉혔다.
“안나!”
“내가 뭐 잘못 말했어?”
“그런 게 아니라…….”
무어라 항변하려는 듯싶던 그는 결국 포기하고 이마를 문지르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막상 할 때는 그렇게 저돌적일 수가 없던 남자가 뒤늦게 부끄럼 타는 모습을 보니 웃기기도 하고 뭔가 괘씸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있잖아, 방금 곁에 있어 준다던 말 말인데.”
“……그게 왜.”
“여기서 또 하겠다는 말은 아니지?”
아, 이번엔 장난이 조금 선을 넘은 것 같다. 자일스가 나를 힐난하는 눈으로 노려보는 모습이 퍽 억울해 보여서 나는 이쯤에서 그만두기로 했다.
“알았어, 알았어. 장난이니까 화내지 마.”
“화낸 적 없어.”
“그렇다고 치자. 아무튼 사람 무안하게 앉아 있지 말고 옆자리 좀 데워 봐. 공기가 차가워서 신경 쓰이니까.”
“난로 켜 놨잖아.”
“자일스.”
할 수 없이 그가 불편한 제복 재킷을 벗었다. 흰 셔츠 차림으로 내 옆에 누운 그는 어쩐지 어정쩡해 보였다. 침대 위에 있었을 땐 안 이랬는데. 하지만 침대 얘기를 한 번이라도 더 꺼냈다간 자일스가 집에서 뛰쳐나가 버릴 수도 있을 것 같아서 참았다.
“당신, 관짝에 누운 사람 같아.”
“난 원래 이렇게 누워.”
“진짜로 오늘 밤 내내 여기 있어 줄 거야?”
“네가 악몽을 꿀까 봐 걱정된다며. 그럼 옆에 있어 줘야지. 누군가는 널 악몽에서 깨워 줘야 할 테니까.”
그가 제복을 벗고서 내 옆에 누워 저런 말을 하고 있는 걸 듣고 있자니 한결 마음이 놓였다. 확실히 그는 제복을 입지 않는 편이 더 나아 보인다. 마치 온몸을 짓누르는 무게를 내려놓은 것처럼 가벼워 보인달까.
“내가 혼자서 악몽을 이겨 내야 할 때는 나만의 방법이 있었어. 가령 꿈속에서 누군가 나를 죽이려고 쫓아온다든가, 그런 일이 생기면 난 바로 알아챌 수 있었거든. 이건 현실이 아니라 악몽이라고 말이야. 그럼 난 스스로에게 이건 꿈일 뿐이라고 중얼거리면서 내 몸을 마구 꼬집었어.”
“그런 게 효과가 있었어?”
“일단 그게 꿈이라는 걸 알기만 하면 깨는 건 쉽게 할 수 있어.”
“그러지 마. 적어도 오늘 밤은 그럴 필요 없어.”
나는 손을 아무렇게나 움직이며 가벼운 장난을 치다가 문득 무언가 부드러운 것에 닿았음을 느꼈다. 그의 손이었다. 내 손보다 커다랗고 각이 진 손. 나는 무심코 그의 손을 잡았다. 그러자 그가 내 손안에서 어색하게 움찔거렸다.
괜한 짓을 했나. 그런 생각이 들어서 손을 놓은 찰나, 이번엔 그가 먼저 내 손을 잡아 깍지를 꼈다. 이번엔 우리 둘 다 손을 풀지 않았다.
나는 그의 손 모양이 어떻게 생겼는지, 굳은살은 얼마나 박였는지 조심스레 탐구했다. 궂은일 한 번 해 본 적 없는 티가 나는 영락없는 도련님 손이었다.
그의 손을 잡고 난로 옆에 누워 있으니까 어느덧 졸음이 밀려왔다. 자일스가 옆에서 뭐라고 말을 거는 것도 같았지만 이미 귀에 잘 들리지 않았다. 나는 그가 덮어 준 담요 안에서 뒤척거렸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한마디만큼은 제대로 들을 수 있었다.
잘 자, 안나.
사랑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