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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을 사랑한 건 살아남기 위해서였다-49화 (49/93)

<49화>

그가 왜 나를 찾아왔지? 나는 그러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당황한 티를 내고 말았다. 무엇보다 나는 자일스 이외의 군인을 마주치면 굳어 버리는 습관이 있었다. 한때 나는 그들을 피해 다녀야 하는 입장이었으니까.

그가 먼저 말을 꺼내기를 기다렸지만 빈센트는 그저 나를 가만히 쳐다보기만 했다. 왜 여길 찾았는지, 내게서 원하는 게 뭔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그의 눈빛을 읽을 수가 없었다.

대체 뭘 원하는 거지?

두려웠다. 나는 그와 한 공간에 갇혀 있었다.

마침내 그가 느릿한 어조로 말했다.

“계속하세요.”

빈센트는 예의 바른 신사의 말투를 사용했지만 그는 절대 신사가 될 수 없는 남자였다. 난 그걸 느낄 수 있었다. 머리를 반듯하게 자르고 고급 정장을 걸친다고 해서 본질까지 바꿀 수 있는 건 아니다.

그는 사람을 공포로 휘어잡는 것을 즐기는 남자였다. 지금 나를 대하는 태도만 보아도 알 수 있었다. 국가에서 공식적으로 용인한 살인마가 있다면 바로 그가 아닐까.

“내가 방해가 된 겁니까?”

“여긴 어떻게 알고 온 거예요?”

“방송국 관계자들이 알려 주던데. 내가 알아내지 못할 건 없습니다. 당신도 아시다시피…….”

“나라를 구한 혁명 영웅이니까.”

그가 원하는 대답이었는지 확신할 수는 없었으나 적어도 빈센트는 미소를 지었다.

“당신 목소리로 그런 말을 들으니 감회가 새롭군요.”

빈센트가 나를 향해 성큼성큼 걸어왔다. 나는 당장 내 물건을 챙겨 들고서 도망치고 싶은 충동을 겨우 억눌러야만 했다.

그가 내게 억지로 키스한 인물이라서가 아니었다. 그라는 사람 자체가 나를 두렵게 했다. 그는 혁명군 제복을 입고 있었고, 또……

“안나.”

……누군가 자신 때문에 겁에 질려 있는 상황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남자였기 때문이었다.

빈센트가 내 이름을 불렀지만 나는 그를 볼 수 없었다.

“안나?”

그가 이번에는 더욱 부드러운 목소리로 나를 재촉했다. 그 목소리가 어쩐지 섬뜩하게 들려서 나는 고개를 들어 그와 눈을 마주쳤다. 잿빛 눈동자가 나를 주시하고 있었다. 그때와 똑같았다. 연회장에서 춤을 출 때도 그는 나를 똑같은 시선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이윽고 그의 눈매가 웃음기를 띠고 가늘어졌다.

“떨지 말아요. 지난번 일은 이미 용서했으니까.”

“용서?”

“당신이 나를 때렸던 일 말입니다.”

“당신은 내게 강제로 키스했잖아요! 내 허락도 없이!”

“그러니 용서했다는 겁니다. 내가 저지른 무례를 당신 스스로 청산한 거니까.”

“내게 하고 싶은 말이 뭐예요?”

나는 그와 대화다운 대화를 나누기를 포기하고 물었다.

“왜 날 찾아온 거냐고요.”

“당신을 만나고 싶었으니까.”

“그러니까 그 이유가 뭐냐고 묻는 거잖아요.”

“꼭 이유가 있어야 합니까?”

그는 사람을 미치게 만드는 데에 재주가 있었다. 나는 진짜 하고 싶은 말을 목구멍 뒤로 삼키고 꾸역꾸역 다시 물었다.

“그럼 왜 날 만나고 싶었던 건데요?”

“저번에 말하지 않았습니까. 당신이 마음에 든다고.”

“나는 자일스와 만나는 사이예요.”

“얼마 후엔 그러지 않게 될 수도 있잖습니까.”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예요?”

슬슬 화가 나기 시작했다. 나는 이제 알았다. 빈센트는 나의 마음을 얻고자 하는 게 아니었다. 만약 그랬다면 이런 식으로 내게 접근해 오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는 나를 원했지만 내가 그에게 마음을 주어야 관계가 성립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 부류였다.

한마디로 그는 일방적이었다. 그에게 있어서 나는 갖고 싶은 대상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정말 모르는 겁니까? 내가 당신을 마음에 들어 한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

그는 점점 더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이제 더 이상 내가 물러날 자리는 없었다.

그렇다면 이제는 맞서 싸우는 수밖에 없었다.

“내 진심을 듣고 싶어요?”

빈센트는 말할 테면 말해 보라는 듯이 어깨를 으쓱였다.

나는 지지 않고 쏘아붙였다.

“난 당신이 싫어요. 지독하게.”

“싫다고?”

“당신이 혐오스럽다고요.”

그다음에 일어난 일은 순식간이었다. 의자는 넘어졌고, 나는 바닥에 그대로 쓰러졌다. 한편 빈센트는 나를 제 몸 아래에 가둔 채로 조명을 등지고서 형형한 눈빛을 하고 있었다.

그는 웃는 건지 분노한 건지 구분하기 힘든 얼굴로 넥타이를 느슨하게 잡아 풀었다.

“헤센이 그러던가? 내가 혐오스러운 인간 말종이라고?”

나는 그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손으로 바닥을 짚었지만 곧 그가 내 오른쪽 손목을 붙잡았다.

“이거 놔요!”

“다들 내게 그런 말은 잘 안 하는데. 싫다는 말.”

“놓으라니까!”

“그래서 그런 말을 들으면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잘 모르겠단 말이지. 익숙하지가 않아서.”

그는 나를 붙잡아 놓고 물건을 감상하듯 위에서부터 천천히 훑어 내려갔다. 내 몸을 훑는 그의 눈길이 역겨워서 나는 차라리 눈을 감아 버렸다.

“어렵군. 당신의 무엇이 헤센을 변하게 만든 거지?”

빈센트가 중얼거렸다. 그는 비꼬는 게 아니라 정말로 궁금하다는 듯이 말했다.

“예쁘긴 하지만 다신 못 만날 미인인 건 아니고.”

“……놔주세요.”

“당신이 얌전히 있겠다고 한다면.”

나는 약속할 수 없었다. 지금 당장만 해도 그의 얼굴을 있는 힘껏 때리고 도망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은데. 하지만 다른 수가 있겠는가? 난 거짓말이라도 해야 했다. 내가 입을 열려던 그 때였다.

“금발이…….”

그는 손을 들어 올려 내 머리카락 언저리를 만졌다.

다음에 이어진 말은 내 심장을 망치로 내려치는 듯했다.

“당신, 염색한 겁니까?”

그 순간 내가 대면하고 있는 이가 혁명군 요원이라는 사실이 다시금 떠올랐다. 멍청하게도 감정에 휩쓸려 상대가 누군지 잊을 뻔했다. 새 신분을 만들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내가 진짜 누구였는지 들키지 않으리란 보장은 없었다.

나는 황급히 나 자신을 다독였다. 괜찮아. 금발로 염색하는 여자들은 많잖아. 난 예뻐 보이려고 염색했을 뿐이야. 다른 사람들처럼.

하지만 빈센트는 내 생각보다 훨씬 눈치가 빨랐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자일스의 말에 의하면 그는 사람의 머릿속에 꽁꽁 숨은 진실을 파헤치는 것을 업으로 하는 남자였다.

그의 두 눈이 가늘어졌다.

“당신…….”

그때였다.

철컥. 빈센트의 등 뒤에서 기계성의 소음이 울렸다. 그가 몸을 돌린 덕에 나는 뒤늦게 나타난 이가 누군지 직접 확인할 수 있었다.

자일스가 총을 들고 빈센트를 향해 겨누고 있었다. 언뜻 보면 무덤덤해 보이지만 그는 화가 나 있었다. 그의 목소리를 듣고 알았다.

“뭐 하는 짓이지?”

낮게 가라앉은 그의 목소리 너머에서 분노가 일렁이는 것이 느껴졌다. 지금 당장 총에 맞아 죽는다 해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었지만 빈센트는 반항적인 미소를 지어 보일 뿐, 내게서 비켜서는 시늉조차 하지 않았다.

“여기서 뵐 줄 알았습니다, 대위님.”

“당장 물러나.”

“손끝 하나 대지 않았는데요. 이 여자에게 물어보시죠.”

“물러나라고 했다.”

자일스가 빈센트를 겨눈 채 가까이 다가왔다. 그제야 빈센트는 마지못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나는 겨우 일어나 앉았지만 그 이상의 행동을 하기에는 너무 놀라 있었다. 그가 마지막에 무슨 말을 하려 했던 거지? 내 신경은 오로지 그 생각에만 쏠려 있었다.

알아챈 건 아니겠지.

한편 빈센트는 두 손을 들어 보인 채로 자일스와 마주하고 있었다. 물론 그는 전혀 겁에 질린 것 같지 않았다.

“여긴 왜 찾아온 건지 말해.”

“안나 양을 만나려고 왔습니다만. 지난날의 회포를 좀 풀고 싶어서 말이죠.”

“안나에게 계속 집적거리는 이유가 뭐야?”

“말이 심하십니다. 개인적으로 찾아온 건 이번이 처음인데. 너무 과민 반응 하시는 것 아닙니까?”

그는 총구를 마주한 채 특유의 뱀 같은 눈으로 자일스를 뚫어지게 쳐다보더니 말했다.

“당신이 이렇게 쉬이 흥분하는 사람이 아닌데.”

“지금 뭐라고 했나?”

“뭐가 당신을 이렇게 만든 겁니까? 말해 보십시오. 이 여자가 그렇게 특별한 이유가 뭔지.”

나는 자일스가 곧 빈센트를 쏴 버릴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빈센트를 잠시 노려보았을 뿐, 곧 권총을 허리춤에 집어넣고서는 말했다.

“난동 피우지 말고 가라.”

자일스는 빈센트를 지나쳐 반쯤 쓰러진 채인 나를 향해 다가왔다. 그가 나를 부축해 일으켜 세워 주는 모습을 빈센트가 의미심장한 눈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빈센트를 무시하고 연습실을 함께 빠져나가려던 참에, 그가 다시 한번 자일스를 도발했다.

“일주일만 빌려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그 여자가 궁금해서 잠도 안 올 지경입니다.”

“너는 안나가 물건으로 보여?”

“사람은 못 빌린답니까?”

“이만하지.”

“아니면…… 뭔가 숨겨야 할 사실이라도 있는 건지.”

그 말을 들은 나는 자일스의 팔을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아무래도 그가 눈치를 챈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도저히 나 자신을 진정시킬 수가 없었다.

내가 쓸데없는 행동을 한 탓인지, 자일스는 빈센트를 그대로 지나치지 못하고 응수했다.

“지금 나를 상대로 음모라도 꾸미겠다는 건가?”

“제가 말했잖습니까, 궁금하다고.”

뚜벅뚜벅. 그가 걸어오는 소리가 가까워져 왔다. 다시 자일스 앞에 선 그는 이제 자일스가 아니라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매사에 감흥도 없고, 감정 변화도 거의 나타내질 않고. 사람 만나는 일이라면 눈에 띄게 질려 하고. 그러던 사람이 갑자기 여자 하나를 싸고돌면서 안 하던 흥분까지 해 대는데 제가 안 궁금할 리가 있겠습니까?”

그가 나를 보고 있었다. 그의 회색 눈동자 속에 갇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다른 곳을 보고 싶은데 그럴 수가 없었다. 마치 빈센트가 내 눈을 통해 머릿속을 훤히 들여다보는 것만 같았다.

“누굽니까? 이 여자.”

질린 눈으로 빈센트를 바라보던 자일스는 간단히 대답했다.

“피아니스트. 입스윈 콩쿠르를 석권한 음악가다. 나는 그녀를 사랑하게 되었을 뿐이고. 물론 넌 그 감정을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자일스는 나를 끌어안듯이 부축한 채 등을 돌려 연습실을 나섰다. 그리고 등 뒤로 덧붙였다.

“신문 좀 읽어라, 모너건.”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계속해서 그와 함께 걸었다. 정황상 빈센트는 우리를 뒤따라오지 않는 것 같았다. 우리는 연습실에서 완전히 멀어질 때까지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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