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화>
그가 물어 왔다. 자일스는 내가 방금 한 말에 대해 확인받고 싶어 했다. 그래…… 마치 몸에 맞지 않는 옷처럼 어색하고 내 입에서 나와선 안 될 말처럼 낯설기는 했지만, 난 분명히 그를 사랑한다고 말했다.
생각해 보니 이런 경험은 처음이었다.
누군가를 사랑한다고 직접 말하는 경험 말이다.
나는 요한 마이어에게조차 사랑한다고 말하지는 않았다. 사실상 그는 사랑의 대상조차 아니었으니까.
“나도 내가 당신을 사랑하게 될 줄은 몰랐어.”
그 말은 진심이었다. 좁은 승용차 안에서 우리는 아주 가까이 붙어 있었다. 내가 내쉰 숨을 그가 들이마셨다. 나 또한 그의 호흡을 느낄 수 있었다. 더 이상 물러설 공간은 없었고, 자일스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가 내게 입을 맞춰 왔다. 아주 조심스럽고 느린 동작이었다. 그는 내가 조금이라도 원하지 않는 기미를 보이면 바로 물러설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건 두렵기 때문이다. 내가 그에게 완전히 마음을 주지 않았는데 저 혼자서 앞서나갈까 봐 조바심을 내는 것이다.
마치 우리 사이의 관계가 심하게 기울어져 있었을 때, 솔즈부르 저택에서 첫 입맞춤을 나누었을 적의 그날처럼.
자일스는 한 번 실수를 저지른 적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때와 같지 않았다. 내게는 더 이상 그를 두려워해야 할 이유가 없기 때문에. 또한 내가 자일스를 믿기 때문이었다.
사실을 고백하자면 나는 사랑이라는 감정에 대해 잘 모른다. 마음과 정신을 비옥하게 만들고, 영혼이 충만해지도록 살찌우는 그 감정에 대해 배운 적도 없고, 그런 감정을 진실되게 느낀 적도 없었다.
그래서 내가 자일스에게 느끼는 감정이 곧 사랑이 맞는지조차 실은 확신할 수 없었다. 적어도 그가 내게 입을 맞추었고…… 나는 그를 거부하고 싶지 않다. 그렇다면 이것이 바로 사랑일까?
나는 자일스가 머뭇거리기를 바라지 않았다. 자신의 행동이 옳은 방향으로 가고 있는지 확신하지 못한 채로 두려워하기를 바라지도 않았다. 그래서 나는 자일스를 두 손으로 붙잡고 서툴게나마 호응해 주었다.
우리 둘 모두 말이 없었다. 언어 따위가 끼어들 틈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와 나는 곧 입맞춤만으로 만족할 수 없어졌다. 무언가 더한 것이 필요했다.
호흡이 가빠지고, 몸에 열이 올랐다. 서서히 피어오르는 열락을 채우기 위해 우리는 서로의 몸을 조급한 손길로 더듬으며 탐닉했다.
한참 동안이나 행위에 집중하던 자일스가 어느 순간 입술을 떼고 나를 바라보았다. 열띤 얼굴이었다. 그의 검은 눈동자가 집중하는 것이라곤 오직 나뿐이었다. 주변의 사물들은 전부 의미 없는 배경으로 전락한 지 오래였다.
“안나.”
그가 내 이름을 불렀다. 평소와는 확연히 다른, 짙은 남성의 목소리였다. 나를 갈구하는 것 같으면서도, 동시에 애원하는 것 같기도 한 목소리가 또 하나의 자극으로 다가왔다.
나는 본능적으로 깨달을 수 있었다. 자일스는 내 의사를 묻고 있는 것이다. 그가 나의 더욱 깊은 곳을 탐해도 될지 허락을 구하고 있었다.
이미 그는 한계에 도달한 것 같았다. 무서워야 하는데 전혀 그렇지가 않았다. 오히려 나는 그가 내 허락을 애타게 바라고 있다는 사실이 만족스럽기까지 했다.
“……여기선 안 돼.”
자일스도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했다. 우리는 차에서 내려 손을 붙잡고 연립 주택 계단을 올랐다. 퍽 조급한 발걸음이었다. 순식간에 나는 내가 머무르는 집으로 통하는 대문 앞에 섰다.
나는 열쇠를 꺼내 문을 땄다. 그리고 나에게만 허락된 공간으로 그를 초대했다.
문이 닫히기가 무섭게 그가 나를 껴안고 목에 입술을 묻었다. 생경한 감각에 내 입에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그는 한 팔로 내 몸을 안고 다른 한 손으로 내 다리를 허벅지에 감았다. 다리 사이로 그의 단단한 신체가 맞닿는 것이 느껴졌다. 내가 몸을 떠는 것을 느꼈는지 그가 나를 보았다.
나는 그를 안심시키듯 먼저 입술을 포개었다. 사실상 쓸데없는 걱정이었다. 이 집에 발을 들였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 그도 알 텐데.
자일스는 나를 안은 채로 들어 올렸다.
그가 어디로 향할지, 이미 우리는 알고 있었다.
옷을 벗는 시간마저 지금 이 순간엔 낭비였다. 나를 침대 위에 눕혀 놓은 자일스가 먼저 제복을 벗었다. 딱딱하고 절제된 제복이 바닥에 아무렇게나 떨어지고, 이내 셔츠 자락마저 그 위를 덮었을 때 나는 처음으로 드러난 그의 상체를 볼 수 있었다.
단단한 남성의 모습이 내 시야를 가득 채웠다. 다른 여자들이야 어떨지 몰라도, 나는 생전 처음 보는 것이었다.
군더더기 없는 모습이었다. 널찍한 대흉근 아래로 펼쳐진 모습은 마치 조각상을 방불케 했다. 나도 모르게 발가락이 곱아들고 다리 사이가 조여들었다. 부끄러웠지만…… 지금은 그런 걸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그가 내게 다가왔다. 나를 그의 몸 아래에 가두고 반쯤 엎드려 내 눈을 응시했다. 이윽고 허락의 시선을 읽어 낸 그가 나를 품에 끌어안고 내 입술을 빨아들였다.
그가 옷을 입은 상태에서 안기는 것과 맨몸의 피부가 고스란히 느껴지는 상태에서 안기는 건 너무나도 달랐다.
나는 조심스레 그의 팔뚝을 어루만졌다. 그의 힘줄을 손끝으로 따라 그렸다. 자일스의 숨이 거칠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다리 사이로 그의 존재감이 뭉툭하게 나를 찔러 왔다.
평소엔 생각조차 하지 않던 일이었지만, 나 또한 이미 제정신이 아니었다. 내 몸을 감싸고 있는 천 조각이 거슬려서 미칠 것 같았다. 빨리 치워 버리고 싶었다. 다급하게 블라우스와 하의를 벗었지만 이번엔 속옷이 문제였다.
쉿, 그가 나를 달래듯이 귓가에 속삭여 왔다. 자일스가 나를 안은 채 브래지어 위로 손을 뻗었다. 툭, 툭. 걸려 있던 고리가 힘없이 풀어지는 동시에 속옷이 내 몸에서 떨어져 나갔다.
이제 나는 그와 맨살을 맞대고 있었다.
“안나. 힘 빼.”
그가 밑에서 나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어떻게 하는지 예전에 가르쳐 줬잖아.”
물론, 나도 기억하고 있었다. 기차 안에서 그가 내 복부를 어루만져 주었지. 마디가 굵은 손이 부드러운 살갗 위를 조심스럽게 내리누르는 감각을 기억해 낸 나는 순간적으로 숨을 하아, 내뱉었다.
“옳지.”
그때도, 그 순간에도 그는 나를 칭찬해 주었다. 하지만 지금 내 귀에 들려오는 자일스의 목소리는 절대로 예전과 같지 않았다. 그가 온 힘을 다해 절제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일스는 이미 한계에 다다른 것 같았다. 그리고 그건 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나는 바보가 아니었다. 경험이 없을 뿐이었지 남자와 한 침대 위에서 뭘 하게 되는지쯤은 알았다. 그는 나를 너무 배려하고 있었다. 뭔가를 단단히 착각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자일스.”
그가 나를 보았다. 어쩌면 내가 그만하자는 말이라도 할 줄 알았나 보다. 하지만 내겐 그럴 생각이 없었다. 그가 나를 원하는 만큼 나 또한 그를 원했다.
나는 그를 가질 자격이 있었다. 아니, 가지고 싶었다. 그의 흔적을 내 몸에 새겨서 우리가 어떤 관계로 거듭났는지 분명히 하고 싶었다.
나는 그를 가까이 끌어안고 새까만 눈동자를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눈빛 언저리에 초조함이 자리 잡고 있었다. 불쌍하게도, 그는 아직까지도 완전히 확신하지 못하고 있었다.
나는 그의 귓가에 대고 무언가를 속삭였다.
그러곤 다시 그의 눈을 마주 보았다.
그러나 변화를 제대로 파악하기도 전에, 그가 나를 침대 위로 쓰러뜨렸다. 목덜미에 입술을 묻은 그의 손길이 대담해졌다. 눈앞에서 불꽃이 튀는 것 같았다.
자일스가 내 가슴을 움켜쥐는 그 순간, 나는 두 다리로 그의 하체를 꽉 끌어안았다.
금속성의 소음이 귓가를 간질이더니 이내 그가 벨트를 벗어 던졌다. 그가 바지까지 벗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다만 그는 내 골반을 잡고 그 사이에 자리를 잡았다.
“힘 빼.”
자일스가 쇳소리 섞인 목소리로 명령했다. 그의 말대로 나는 숨을 내려놓았다. 살짝 벌어진 입술 틈새로 그가 침범해 왔다. 나는 알고 있었다. 이게 끝은 아닐 것이다. 절대로.
또한 금세 끝나지도 않을 것이다.
*
여느 때처럼 나는 오늘도 피아노 앞에 앉아 있다. 다만 이번에는 라디오 방송국이 아니었다. 모건 세이지가 나를 공식적으로 초빙한 연주회가 얼마 남지 않았다.
나는 오케스트라와 합을 맞추기 전에 시내에 위치한 연습실에서 내가 연주할 피아노 협주곡을 마지막으로 다듬고 있었다.
같은 악보에 담긴 음표의 나열이라지만, 내게 이것은 단순한 음표가 아니었다. 이것은 해석을 바라는 시인의 작품이자 아직 세상에 태어나지 못한 말들의 향연이었다. 연주자가 곡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같은 악보라도 전혀 다른 작품이 될 수 있다.
나는 피아노 앞에 홀로 앉아 눈을 감고 협주곡을 연주하고 있었다. 그리고 내 손가락을 빌어 노래하는 건반의 음색을 오롯이 느꼈다.
어딘가 애달프고 외로운 듯하면서도 아직 꺼지지 않은 불꽃처럼 필사적인…… 내 머릿속을 채운 상념은 어느새 한 남자의 이름을 향해 갔다. 자일스 헤센. 나는 그의 목소리, 내 손끝으로 느껴지던 감촉, 그와의 입맞춤에 대해 생각했다.
나는 긴 숨을 내뱉으며 천천히 눈을 떴다. 여전히 피아노는 내 곁에서 노래하고 있었다. 음악에 집중해야 하는데 나는 자꾸만 그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생각하지 않으려 해도 소용이 없었다. 이 곡은 자일스를 너무나도 닮아 있다.
그때였다. 점점 가까워 오는 발소리가 들려왔다. 구두 소리인가? 아니, 이건 군화를 신은 발소리였다. 아무래도 오늘은 연습에 집중하기 틀려먹은 날이 분명했다.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고개를 돌리고 자일스를 맞을 준비를 했다. 하지만 내 앞에 서있는 건 자일스가 아니었다. 그렇다고 내가 모르는 군인도 아니었다. 자일스는 아니되, 내가 잊으려야 잊을 수 없는 또 다른 군인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잿빛 금발을 가진 남자.
빈센트 모너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