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화>
자일스가 나를 방문해 준 덕분에 오랜만에 그의 차를 얻어 탈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새까만 승용차 조수석에 올라탄 나는 그가 운전을 하는 동안 창밖 풍경을 구경하고 있었다. 잡담 좀 하다 보니 벌써 태양의 빛깔이 불그스름하게 변해 가고 있었다.
“있잖아, 내가 저택 안에서만 살던 때엔 말이야. 전쟁이니 혁명이니 하는 기사만 읽고 저택 바깥세상이 완전히 망해 버린 줄로만 알았어. 적어도 신문 기사에는 그런 사진만 실려 있었거든. 쑥대밭이 되어 버린 도시 말이야.”
“입스윈은 아주 양호한 편이야. 적어도 주요 격전지에 속하지는 않았으니까. 네가 본 사진은 아마 다른 참전국에서 가져온 사진일 확률이 높아.”
“벨담이 그렇게 되었을까?”
자일스는 잠시 대답하지 않았다. 나는 불쑥 내뱉은 말이 어쩌면 그의 기분을 상하게 했을 수도 있겠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고는 사과했다.
“미안.”
“……사과할 필요 없어. 어차피 난 더 이상 벨담 사람도 아니니까.”
그가 정말로 괜찮은지 아닌지 판단하기가 어려워서 나는 잠시 그의 눈치를 보았다.
“저기, 한 가지만 물어봐도 될까?”
자일스가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운전 중이었던 탓에 전방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내가 볼 수 있는 건 오직 그의 날카로운 옆모습뿐이었다.
“그러니까, 너도 원래는 벨담에서 살다가 왔다고 했잖아. 혹시 몇 살에 입스윈으로 옮겨 온 거야? 난 입스윈에서 태어나서 한 번도 이 땅을 벗어난 적이 없거든. 나도 엄연히 벨담 사람이기는 하지만…… 벨담이라는 나라가 당최 상상이 안 가서 말이야.”
어쩌면 그가 이야기하는 걸 꺼릴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지만, 내 생각과는 달리 자일스는 흔쾌히 대답해 주었다.
“여섯 살 즈음에 가족과 함께 이사를 왔어. 아버지의 결정이었지. 본가를 완전히 옮긴 건 아니었지만 어쩌다 보니 이곳에 꽤 오래 눌러앉게 되었던 것 같다.”
“혹시 벨담은 어땠는지 기억나? 그냥, 네가 기억하는 벨담의 모습 같은 것 말이야.”
그때 나는 내가 실수했다는 걸 알아차렸다. 그는 어릴 적 일들은 거의 다 잊었다고 했는데. 그러나 자일스는 내가 무어라 다시 말을 꺼내기도 전에 먼저 대답했다.
“우리는 수도에 지어진 타운하우스에 살았어. 따뜻한 갈색 외벽에 암녹색 지붕을 가진 3층짜리 집이었지. 계단을 오르다 보면 맨 위층까지 갈 수 있었는데, 나는 꼭대기까지 오르는 걸 좋아했어. 난간을 타고 미끄러져 내려가는 재미가 상당했거든.”
“……가족들이 싫어하지는 않았어?”
“물론, 들키면 혼이 났지. 하지만 그때마다 셀레스트가 날 변호해 줘서 크게 혼이 나지는 않았어.”
셀레스트라면 그의 누나의 이름이 분명했다. 나는 드레스 살롱에서 그녀에 대해 잠시 들은 적이 있었다. 그의 말을 끊고 싶지 않아서 나는 그냥 고개만 끄덕였다.
“벨담이라고 해서 입스윈과 많이 다른 건 아니야. 아무래도 둘은 서로 이웃한 나라니까. 하지만…… 수도가 정말 활기찬 도시였다는 사실만은 기억나. 내 방은 창밖 시야가 탁 트여 있는 위치에 있었지. 창문을 열면 수많은 건물들과 사람들을 한눈에 볼 수 있었어. 가옥들이 늘어선 곳은 붉은 물결로 가득한 것처럼 보였고, 도시 정중앙에 우뚝 선 성당에서 커다란 종을 울리면 그 소리가 내 귀에 똑똑히 들려왔지. 그 소리가 들리면 나는 종소리가 끊길 때까지 셀레스트와 술래잡기를 했어.”
“당신 누나 말이지?”
“맞아.”
“혹시 그 셀레스트라는 분은 지금 어디에 있어? 벨담으로 돌아간 거야?”
어릴 적 이야기를 전해 주며 잠시나마 그리운 회상에 젖어 있던 자일스의 낯빛이 다시금 어두워졌다. 옛 시절의 흔적은 완전히 자취를 감추었다. 그는 무어라 이야기를 꺼내야 할지 망설이는 눈치였다.
길고도 짧은 침묵 끝에, 그가 짤막하게 대답했다.
“어디로 갔는지는 나도 몰라.”
“생이별을 한 거야?”
“……그렇다고 볼 수 있겠지.”
“멘델 부인한테 들은 적 있어. 당신 누나에 대해서 말이야. 부인은 그녀가 밝고 긍정적인 사람이라고 했어. 햇살 같은 기운을 주변에 뿌리고 다니던 사람이라고…… 당신을 동생으로서 정말 사랑했다고 하더라.”
자일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눈에 띄게 말이 없어졌다. 나는 그가 침묵하는 것도 단순히 운전에 집중하느라 그런 줄로만 알았다.
“언젠간 소식이 닿을 거야. 그렇지? 자일스.”
“아니. 그러진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나는 의아해서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어째선지 자일스의 표정을 읽기가 어려웠다.
“내 생각에 셀레스트는…… 아주 먼 곳으로 가 버린 것 같아.”
“외국으로 떠났다는 말이야?”
“그보다 멀리.”
어느새 승용차가 내가 사는 연립 주택 앞에 도착했다. 차를 완전히 세운 그는 운전석에 우두커니 앉아 핸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의 안색이 전혀 괜찮아 보이질 않아서 나는 도저히 그를 두고 차에서 내릴 수가 없었다.
“당신 괜찮아?”
자일스가 일부러 미소를 꾸며 내 보였다. 하지만 내 기분 탓인지, 그의 미소가 어쩐지 비참해 보인다는 생각이 들었다.
“걱정할 것 없어.”
“지금 내 눈에 당신 얼굴이 어떻게 보이는지 직접 보여 줄 수 있다면 좋을 텐데. 말해 봐, 문제가 뭔지. 혹시 내가 괜한 이야기를 꺼내게 만든 거야?”
“아니야. 네 잘못은 어디에도 없어.”
“말해 봐, 자일스.”
내가 그의 오른손을 잡고 말했다. 그는 놀란 얼굴을 했다. 내게 대충 넘어갈 생각이 없다는 사실을 그도 느꼈는지, 그가 어렵게 말을 꺼냈다. 마음속의 산을 한 번 넘고 두 번 넘어, 자일스가 꽉 막힌 것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안나, 사실은 네게 거짓말을 했어. 내가 과거의 일들은 다 잊어버렸다고 했지. 껴안고 있으면 미칠 것 같아서, 내 머릿속에서 전부 지워 버렸다고…… 그건 사실이 아니야. 나는 다 기억하고 있어. 행복했던 순간이든, 잊고 싶은 순간이든…… 전부 다. 그래서 방금 전에도 아무렇지도 않게 이야기할 수 있었던 거야. 내가 잊어버린 건 단 하나도 없었으니까.”
“그럼…… 그걸 다 기억하고 있었다면…….”
나는 자일스가 해 온 일들에 대해 안다. 그는 살아남기 위해 혁명에 가담했다. 그리고 혁명군으로서 해야 할 일들을 했다. 벨담 사람들을 체포하고 처형하는 것.
한때 그를 이루던 정체성을 박살 내는 일이자 과거로 돌아가는 길을 제 손으로 끊는 일이나 마찬가지였다.
“……당신은 괜찮았던 거야?”
“아니. 괜찮지 않았어. 매일 밤마다 잠에 드는 게 두려웠지. 좋았던 시절이 꿈에 나타날까 봐 겁이 났으니까. 그런 꿈을 꾸고 나서 다음 날 일어나 사람들을 심문하고 해칠 자신이 남아 있을지 확신할 수 없었어. 꿈속에 나타났던 사람을 내가 직접 고문해야 하는 건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일이었으니까. 일전에 말했던 대로야. 옛 기억을 끌어안고 있는 건 나를 미치기 직전까지 몰아붙였어. 하지만 난 도저히 그 기억들을 놓아줄 수가 없었어. 그것들조차 잃어버리면 나는 더 이상 자일스 헤센이 아닌 다른 존재가 되어 버릴 것만 같았어.”
그는 억눌린 감정이 바깥으로 터져 나오지 못하도록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어느새 나는 자일스가 내 손을 꽉 붙들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손자국이 남을 만큼.
“나는 단 한 번도 잊은 적이 없어. 다만 떠올리지 않으려고 노력할 뿐이었지. 나는 무언가 다른 것에 집중해야만 했어. 현실도, 과거도 잠시 잊게 만들어 줄 수 있는 것에…… 정신을 놓아 버리지 않으려면 그래야만 했어.”
“그럼 당신은 무엇에 집중하며 버텼어?”
자일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에 고개를 돌려 나를 보았다. 그 순간 나는 정말 바보 같은 질문을 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가 집중했던 대상은 바로 나였다.
자일스는 분명 멀끔한 모습을 하고 있었지만 동시에 만신창이가 된 사람처럼 보였다. 그의 얼굴이 그랬다. 나는 차라리 그가 눈물이라도 흘리기를 바랐다.
“내가 온전히 살아남을 수 있었던 건 너 때문이었어. 너를 만나고 나서 나는 아주 잠시나마, 모든 걸 잊을 수 있었으니까. 너를 보고 있으면, 네 생각을 하고 있을 때면 그 순간만큼은 내가 겪어야 했던 모든 일들로부터 해방될 수 있었어. 그래서 네가 사라졌을 때 미친 사람처럼 네 뒤를 쫓았던 거야. 나에겐 네가 필요했으니까. 너만이 나를 살릴 수 있었으니까.”
나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그가 처음부터 내게 진심이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자일스는 그의 가장 깊은 내면 속에 숨겨져 있던 진심 어린 말들을 건져 내었다. 오랫동안 전해지지 못한 채 햇빛조차 들지 않는 심해를 유영하고 있던 말에는 다른 이가 흉내 내지 못할 특별한 울림이 있었다.
“안나. 너를 사랑하는 건 나 자신을 구하는 일이었어. 그래서 나는 단 한 순간도 너를 사랑하지 않은 적이 없어. 너를 사랑한 건 내가 살아남는 일과도 같았으니까. 네가 없으면 내가 어떻게 될지 나조차도 장담할 수 없었으니까…….”
“자일스.”
“너는 나를 살렸는데, 내가 너를 몹시 두렵게 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내가 느꼈던 감정은…… 어떻게 말로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다. 물론 나는 너와 함께하기를 원했지만, 만약 네가 그걸 원치 않는다면 물러서야 마땅했어. 나는 이미 수많은 사람들을 해쳤어. 너까지 해치고 싶지는 않아.”
그는 뭔가를 각오한 것처럼 나를 바라보았다. 내게서 어떤 대답이 들려와도 감당하겠다는 것처럼 말이다.
“안나, 내가 아직도 너를 두렵게 해?”
“그게 무슨 소리야?”
“아직 조금이라도 그런 생각이 들게 한다면…….”
“안 그래. 더 이상은 아니야. 그러니까 그런 걱정은 하지 마. 애초에 내가 당신을 두려워했던 건 당신에 대해 오해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던 거잖아.”
“내가 그동안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알잖아.”
“자일스 헤센! 정신 차려.”
나는 그 쪽으로 몸을 기울여 두 손으로 그의 어깨를 잡았다. 그는 정말 쓸데없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를 해칠 게 분명한 허상이었다. 나는 그것들을 자일스의 머릿속에서 몰아내야만 했다.
“당신이 무슨 짓을 했든 상관 안 해. 내가 듣고 싶은 대답은 단 한 가지야. 한 번이라도 내게 상처 주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어? 다른 목적이 있어서 나를 만나는 거야?”
“절대 그렇지 않아.”
“그럼 난 그걸로 된 거야. 다른 생각은 할 필요 없어. 그러니까 쓸데없는 생각하지 마. 지금 내 앞에 있는 건 혁명군 장교가 아니라 너니까. 내가 사랑하는 사람도…….”
그 순간 자일스와 눈이 마주친 나는 잠시 말을 잃었다. 그와 나는 아주 가까이에 있었다. 자일스의 검은색 눈동자가 내게 집중하고 있었다. 외로움에 잠긴 색이었다.
“안나, 나를 사랑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