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화>
어느새 방송이 끝났을 땐 자일스가 나를 바깥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그와 함께 방송국 주변을 걸었다.
커다란 군인과 함께 걷고 있으니 확실히 혼자 걸을 때와는 달랐다. 적어도 지나가는 사람들이 간격을 두어 주는 데다 웬 남자가 수작질을 걸어 대는 일이 전혀 일어나지 않았던 것이다.
봄은 하루하루 무르익어 가고 있었다. 냉기가 서려 있던 바람은 이제 사랑하는 이의 손길만큼이나 온화해졌다. 죽어 있는 것만 같았던 나무들은 새 잎을 틔웠고, 길가에서 잔꽃들이 피어났다.
우리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여전히 곁에서는 그의 존재감을 느낄 수 있었다. 편안했다.
“여긴 웬일이야? 말도 없이. 갑자기 찾아올 줄은 몰랐어.”
“사실은 계획에 없던 일이었어. 문득 너와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지. 그래서 무작정 찾아온 거야. 혹시 내가 널 놀라게 한 건가?”
“나야 당신 얼굴 매일 보는 입장이라 괜찮지만, 같이 일하는 사람들은 안 그런 것 같던데. 그 사람들 표정 봤어?”
말과는 달리 나는 킬킬거리며 웃음을 터뜨렸다. 매사에 진지하고 웃음기라곤 없던 방송 관계자들이 그의 등장 하나만으로 마치 코미디 상황극에 돌입한 것 같아서 나는 웃지 않을 수가 없었다.
“다음부턴 좀 더 주의하도록 하지.”
“아냐, 그러지 않아도 돼. 적어도 나한텐 정말 웃겼거든. 당신이 그런 상황을 의도하지 않았다는 사실 때문에 더 웃겨. 앞으로 그런 해프닝 좀 많이 만들어봐. 평소에 웃을 일이 별로 없다 보니까 이런 사건 하나하나가 귀하단 말이야.”
그런 나를 말없이 바라보던 자일스가 불쑥 물어 왔다.
“점심은 해결했어?”
“아니, 아직. 왜? 벌써 점심 먹을 시간이야?”
“그런 것 같아. 먹고 싶은 거라도 있나?”
“글쎄……. 뭐가 좋을까.”
곰곰이 생각하던 나는 어느 순간 무언가를 떠올리고는 외쳤다.
“그래! 우리 정크 푸드 먹으러 가자. 어때?”
“뭐?”
“내가 이 근처에 아는 곳이 있거든. 같이 가자.”
자일스는 어느 쪽의 대답도 건네지 못한 채 얼떨떨해 보였지만 결국 나를 따라 5분 거리에 떨어져 있던 가게로 들어갔다. 가게 안은 온갖 사람들로 가득했다. 우리는 겨우 자리를 잡아 앉을 수 있었다.
뭘 고를까 고민하던 나는 문득 자일스가 매우 뻣뻣한 자세로 앉아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마치 자신이 있어선 안 될 곳에 들어왔다는 듯이 굴고 있었다.
“왜 그래?”
“그러니까…… 이런 곳은 처음 와 봐서.”
“말도 안 돼. ‘랜치 앤 서머스’야말로 이 근방에서 제일 훌륭한 음식점인데! 당신 설마 햄버거를 나이프로 썰어 먹는 부류는 아니지?”
놀랍게도 자일스는 내 눈길을 피할 뿐 대답하지 않았다.
“이제 보니 당신, 정말 도련님이구나.”
“그냥 이런 음식에 익숙하지 않을 뿐이야.”
“그럼 오늘부터 내가 알려 주면 되겠네. 당신이 나보다 잘 모르는 것도 있고, 웬일이야?”
나는 직원을 불러 감자칩을 포함한 메뉴를 주문했다. 가게 안은 시끌벅적한 음악 소리와 사람들의 말소리로 활기찼다. 확실히 제복을 말끔하게 차려입은 도련님 출신 고위 장교와는 어울리지 않는 곳이었다. 나는 또다시 웃음이 나오려는 걸 겨우 참아야 했다.
메뉴가 나오기까지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나는 그가 음식들을 생소한 눈길로 훑어보는 모습을 포착했다. 이윽고 그가 말했다.
“야채가 없는데.”
“여기 있잖아.”
내가 케첩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 그 순간 그의 얼굴 위에 떠오른 표정 때문에 결국 웃음을 참지 못한 내가 깔깔 웃었다.
“당신 진짜 웃긴다! 정말 샌님 같아.”
“나도 케첩이 뭔지는 알아, 안나.”
“그래, 야채로 만들었잖아. 그리고 여기 감자튀김! 이것도 야채로 만든 거야. 그러니까 똑같은 거지. 건강에 좋은 거니까 많이 먹어.”
그는 전혀 수긍하는 기색이 아니었지만 어쨌든 내 권유를 받아들였다. 튀김을 몇 개 집어 먹던 그가 나직이 말했다.
“별로 질 좋은 음식 같지는 않아.”
“그게 무슨 상관이야, 맛있는 데다 저렴하잖아.”
“안나, 나중에 파인 다이닝 레스토랑을 소개해 줄 테니까 같이 가자. 너도 마음에 들어 할 거야.”
“싫어.”
그러나 나는 단호하게 거절했다. 그의 성의를 무시하고 싶은 건 아니었지만 진심으로 내키지가 않았다.
“나이프로 고기 썰고 애피타이저니 메인 디쉬니 하는 곳 말이지? 난 그런 곳 별로야. 물론 그곳에 가면 양질의 음식을 먹을 수 있겠지. 하지만 싫어. 질적으로 차이가 많이 난다는 건 알지만, 그런 걸 생각하더라도 여전히 싫어.”
“……왜 그렇지?”
“그냥 그런 식으로 높은 사람들 입맛에 맞게 차려져 있는 음식을 보면 속이 안 좋아지니까.”
나는 감자튀김을 집어 먹으면서 계속 말을 이었다. 그가 이해할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난 내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가끔은 아무에게도 털어놓지 못했던 속이야기를 꺼내 줘야 하는 법이다.
“어렸을 때, 가족들이 날 귀하신 분께 시집보내려고 상류층 문화를 가르쳤어. 개중엔 식사 예절도 있었어. 나이프를 펜 잡듯이 쥐는 여자애를 받아 줄 높으신 분들이 어디 있겠어? 겉치레에 환장하는 족속들인데. 그 당시에 가족들은 마음이 급했고, 절대 실수 따위 용납하지 않았어. 결국 나는 몸에 익지도 않은 예절을 지키느라 급급하면서 식사를 해야 했지. 그랬으니 소화가 제대로 될 리가 있었겠어? 아직도 혼자 끙끙대다가 먹은 걸 다 게워 내곤 했던 날들이 생각나.”
자일스는 아무 말도 않고 잠자코 내 이야기를 들어 주었다. 한번 이야기를 시작하니까 멈출 수가 없어졌다. 나는 나를 가르쳤던 가정 교사를 과장되게 흉내 내며 말했다.
“나이프와 스푼, 포크는 바깥부터 코스별로 하나씩 쓰는 거예요. 나이프는 연필이 아니에요! 그렇게 들지 마세요. 세워서 들어야 해요. 이번엔 음료를 담는 잔의 종류를 알려 드릴게요. 아, 물론이죠. 화이트 와인, 레드 와인, 디저트 와인, 물, 소다를 전부 다 다른 잔에 담아야 한답니다. 그래야 위신이 사는 법 아니겠어요? 미친놈들이지, 아주. 내 눈엔 다 똑같아 보여서 금방 외우지도 못했어. 아무튼 식사 시간은 내겐 고문이나 마찬가지였어. 그래서 싫다고 하는 거야. 어두운 시절을 떠올리게 만드니까.”
“……그들이 너를 미워하고 괴롭혔다는 이야기는 들었어.”
“왜 날 괴롭혔는지에 대해서도 들었어?”
그는 고개를 저었다.
“내 남편이 되었어야 할 사람이 있었는데, 그 자식이 어느 날은 내 옷을 벗기려고 하더라고. 그래서 거절했지. 거절했다는 사실만으로도 경을 칠 노릇인데 난 한술 더 떠서 그놈을 해치겠다고 협박까지 했어. 정말 해칠 생각은 없었어. 그냥 겁만 주려고 했을 뿐이었다고. 그곳을 무사히 빠져나오려면 어쩔 수 없었어. 난 무기를 휘둘러야만 겨우 그놈을 대적할 수 있었지만 그는 한 팔로도 날 제압할 수 있는 커다란 남자였으니까. 그런데 난 내 몸을 지키기 위해 날 방어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좁은 벽장 안에 갇혀야만 했어.”
나는 그에 대해 모든 것을 말해 주었다. 그가 단편적으로 전해 듣기만 했었던 일들의 내막에 대해. 별로 숨길 것도 없었다. 내가 잘못한 건 하나도 없는데 왜 내가 부끄러워해야 하나?
숨기고 싶어 해야 할 사람이 있다면 그건 백작일 것이다. 물론 지금은 죽어서 그마저도 못 하게 되었겠지만.
“그때는 생존하는 데에 급급해서 그 모든 일들을 당하면서도 내가 괜찮은 줄로만 알았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아니었나 봐. 시간이 지나고 나니까 알겠어. 난 절대 괜찮은 게 아니었어. 다만 나를 무디게 단련해야 했을 만큼 살고 싶었던 거였어. 그래서 나는 아직까지도 문을 잠그거나 두꺼운 커튼을 치는 걸 싫어해. 좁고 어두운 곳이든, 밀폐된 곳이든…… 갇혀 있다는 느낌이 들면 정말 버틸 수가 없어져.”
나는 말하면서도 기분이 이상해지는 것을 느꼈다. 생각해 보니 다른 사람에게 내 과거를 이토록 자세히 설명하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앨버트 또한 내가 불행한 삶을 살았다는 사실을 남들에게 전해 들어 알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나마 다행이었던 건 식당 안을 비추는 밝은 조명과 흥겨운 음악 소리 덕에 분위기가 완전히 가라앉는 일을 어느 정도 방지할 수 있었다는 거였다. 자일스는 내 이야기를 듣더니 물었다.
“나를 처음 만났을 때, 악기 케이스 안에서 생존해야 하던 시절에는…… 어떤 심정으로 버텼지?”
“그땐 그래도 상황이 나았어. 저택 안에 남은 사람은 나뿐이었고, 언제든지 내가 원할 때마다 케이스 바깥으로 나갈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었으니까. 무엇보다도 그땐 케이스라도 이용하지 않으면 얼어 죽을지도 모르는 상황이었어.”
“이런 이야기를 꺼내게 만들어서 미안해, 안나.”
“괜찮아. 진짜 괜찮아. 적어도 난 살아 있잖아. 그 사람들은 전부 죽었는데 말이야. 그렇지?”
말을 많이 했더니 목이 탔다. 나는 컵에 물을 따라 마시며 목을 축였다. 그러곤 자일스가 차마 음식에 손을 대지 못하고 있는 모습을 보고 그를 채근했다.
“당신 배 안 고파? 나랑 같이 점심 먹고 싶어서 왔다며.”
“그래. 그랬지.”
그가 식기를 들었다. 하지만 여전히 눈앞에 차려진 음식들을 먹지는 못했다. 안 먹는 건가, 못 먹는 건가? 그런 생각을 하던 와중, 자일스가 물어 왔다.
“이건 이름이 뭐지?”
“햄버거. 설마 어떻게 먹어야 하는지 모르는 건 아니지?”
“먹을 줄 알아.”
그는 살짝 자존심이 상했는지 바로 대답했다. 뭐, 그렇겠지. 세상에 햄버거도 먹을 줄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 나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베이컨이 들어간 치즈버거를 한 입 베어 물며 그렇게 생각하다 문득 자일스 쪽을 곁눈질했다.
그 순간 그와 눈이 마주쳤다. 포크와 나이프를 들고 햄버거를 썰려던 그의 동작이 일순 굳었다. 물론 나는 치즈버거를 두 손으로 잘 들고 먹는 중이었다. 자일스는 괜스레 헛기침을 하고서는 얌전히 식기를 내려놓았다.
그가 햄버거를 무너뜨리지 않은 게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