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화>
7. 데자뷰
빈센트 모너건은 지루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직장에서의 시간이 으레 그렇다지만, 이토록 무료함을 느끼는 건 오래간만의 일이었다.
특히 그가 혁명군 본부 최하층에 자리한 고문실에 있을 때는 더욱 그랬다. 그는 작업에 필요한 온갖 도구들에 둘러싸인 채, 거의 정신을 잃은 것이나 다름없는 심문 대상을 앞에 두고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살살 달래서 필요한 정보만 빼내라는 상부의 명령이 있었기에 그는 제법 점잖은 방식으로 그를 취조했다. 적어도 신체에 영구적인 손상을 끼치지는 않았으니까. 그는 괜찮을 거다. 적어도 몸뚱어리는 그렇겠지.
다만 그는 예전처럼 할 일에 집중하지 못했다. 자일스 헤센에게 여자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부터 그랬던 것 같다.
만약 그 여자가 자일스의 섹스 파트너라든가, 혹은 가볍게 만나기 시작한 사이라든가…… 그랬다면 빈센트도 금방 잊어버렸을 터였다.
그를 신경 쓰이게 만드는 건 그 여자가 자일스를 진심으로 행복하게 만들어 줬다는 사실이었다. 빈센트는 자일스가 그런 표정을 지을 수 있는 인간이라는 걸 연회장에서 처음 알았다.
마치 전혀 다른 사람으로 탈바꿈한 양, 현실에 지칠 대로 지쳐 무미건조했던 얼굴 위에 행복이라는 달콤한 색채가 떠오르는 순간…… 빈센트는 벨담의 귀하신 도련님일 적의 자일스를 상상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 몹시 불쾌해졌다.
누군가 자일스를 그렇게 만들었다는 점이 그랬다. 그리고 자신으로 하여금 그런 혐오스러운 이미지를 상상하게 만들었다는 것도.
안나 키팅…… 자일스가 사랑하는 여자의 이름이었다. 그녀가 피아니스트라는 건 알고 있었다. 예술가라는 족속들에 별 관심을 두지 않는 빈센트가 아는 바는 그게 전부였다.
평범해 보이는 여자의 무엇이 마음에 든 것이지? 예쁘장한 얼굴? 안나는 상당히 예뻤지만 원한다면 아름다운 여자 정도는 다른 곳에서도 쉽게 찾을 수 있었다. 그렇다면 뭐지?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빈센트는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에게 묻기로 했다.
“이봐.”
그가 방금 곤죽으로 만들었던 참인 남자를 툭툭 쳐서 깨웠다.
“일어나. 묻고 싶은 게 한 가지 생겼으니까.”
정신을 차리지 못하던 남자는 물을 한 바가지 뒤집어쓰고 나서야 콜록거리며 눈을 떴다.
“질문에 제대로 대답만 한다면 오늘은 이 정도로 끝내 줄 수도 있어.”
“난…… 대답할 수 있는 건 전부 대답했어.”
“여자에 대해 잘 아는 편인가?”
남자는 그의 질문을 얼른 이해하지 못했다.
“무슨…… 뜻이지?”
“여자 때문에 행복해 본 적이 있냐는 뜻이야. 여자가 너를 기쁘게 만들었다든가, 그 여자 때문에 웃을 수 있었던 때라든가…… 물론 잠자리 얘기를 하는 건 아니고.”
“이건 또 무슨 새로운 고문 방식이지?”
“개인적인 궁금증 때문에 묻는 거니까 안심해. 물론 네가 제대로 협조하지 않는다면 절차가 조금 힘들어질 수도 있겠지.”
빈센트는 의자를 끌어다 털썩 주저앉았다. 바로 위에서 그를 비추는 새햐얀 전등 불빛이 그의 얼굴 윤곽을 더욱 도드라지게 만들었다.
“어떨 때 행복하다고 느끼지? 여자랑 같이 있을 때면 말이야.”
“도대체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
“그 정도 고문 좀 받았다고 머리가 어떻게 돼 버린 거냐? 말 그대로 어떨 때 행복하냐는 거다. 네가 사랑하는 여자와 함께 있을 때.”
“사랑하는 여자…….”
피와 땀으로 엉망이 된 얼굴로 잠시 생각하던 남자가 빈센트를 바라보았다.
“당신은 여자를 사랑해 본 적이 없나?”
“질문은 내가 한다. 그 사실을 잊지 마.”
“당신의 질문은 근본부터 잘못되었어. 사랑하는 여자가 곁에 있기만 해도 행복하기 마련이니까. 그 여자가 특별히 뭘 해 줘서가 아니야.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같은 공기를 들이마시며 침묵을 공유하는 것 자체로도 행복할 때가 있어.”
“곁에 두는 것만으로도 그렇다고?”
“그래. 사랑한다는 건 그런 거야. 너 같은 냉혈한들은 평생 이해할 일 없겠지만…….”
“그렇다면 조금 바꿔서 묻지. 사랑에 빠지게 만드는 원인에 대해 알고 있나?”
“당신 지금 나랑 장난하자는 거야?”
“아니, 전혀. 왜 그런 생각을 하는 거지?”
“갑자기 왜 이런 걸 묻는 거지? 이게…… 이게 대체 당신이 원하는 대답이랑 무슨 상관이 있다는 거야? 당신이야말로 악마가 틀림없어. 그 날붙이들로 나를 마음껏 고문하더니 이제는 함께 사랑에 대해 논하자고? 이게 무슨 말 같지도 않은 수작질이야?”
“흥분하지 말고 묻는 말에 대답해.”
“꺼져! 차라리 나를 죽여! 아니면 제발 저 불빛 좀 없애 줘. 정말이지 정신이 나가 버릴 것 같으니까…… 제발…….”
“그것 참 안 됐군.”
빈센트는 건성으로 대답하고는 바깥에서 대기하고 있던 부하의 이름을 소리쳐 불렀다. 그러자 부하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무슨 일입니까?”
“음반 좀 가져와. 기분 전환을 할 필요가 있겠다.”
“어떤 것으로 가져오면 되겠습니까?”
잠시 생각하던 빈센트가 입꼬리를 끌어 올려 미소 지었다.
“피아노 음반이면 적당하겠군.”
잠시 후 부하가 음반을 가지고 왔다. 빈센트는 부하를 되돌려보낸 후 휘파람을 불며 새까만 레코드판을 축음기에 끼웠다. 그러자 감미로운 피아노 연주가 삭막한 고문실 안을 가득 채웠다.
음악에 별 감흥을 보이지 않는 그였지만 이번만큼은 피아노 연주의 아름다움을 느껴 보고 싶었다.
자일스 헤센이 어떤 기분이었을지, 조금이라도 알고 싶었으니까.
안나 키팅의 연주를 들으면서 그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사랑이라.”
그가 운을 떼었다.
“내 잘나신 상관께서 최근에 그런 감정을 경험하고 계신 것 같아서 말이다. 덩달아 나까지 궁금해졌을 뿐이야. 대체 어떤 기분이라 그토록 사람이 달라 보였는지…… 한 번은 말이다, 내가 그 여자를 붙잡고 입을 맞췄더니 표정이 볼만해지더라고.”
당장 그를 때려눕히기라도 할 것처럼 노려보던 자일스 헤센의 모습이 눈앞에 선했다. 자일스가 그를 그런 식으로 쳐다본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만일 내가 더한 짓을 하게 된다면 어떨 것 같아? 나도 사랑에 빠지는 경험을 할 수 있게 될 것 같나?”
“넌 미친놈이야.”
“그래, 그런 소리 많이 들었어. 그러니까 어쭙잖은 반항은 그만두는 게 어때?”
빈센트는 담배를 비벼 끄고 팔소매를 걷어 올렸다. 형체 없는 음악가는 아직도 그들 곁에서 피아노를 연주하는 중이었다. 누군가에겐 평안을 가져다주었을 연주를 뒤로하고, 빈센트가 남자를 향해 성큼성큼 다가갔다.
“잡담은 이만하고 하던 얘기나 계속 해 보자고.”
*
나는 피아노에 소질이 있었다. 적어도 내게 피아노를 가르치던 음악 선생은 그렇게 말했다. 처음엔 그냥 그런 줄로만 알았다. 실제로도 피아노만큼은 배우는 속도가 빨랐고, 내가 즐기면서 할 수 있었던 유일한 공부였으니까.
하지만 이제는 많은 사람들이 내 연주를 찾고 있었다.
내가 이름을 알린 이후로 나를 찾는 목소리들이 많아졌다. 개중엔 라디오 방송국도 있었다. 그들은 나를 전속 피아니스트라는 이름으로 데려가기를 원했고, 거절할 이유가 없었던 나는 그에 응했다.
아직까지는 이 땅에서 살아갈 만했고, 내게는 급히 도망쳐야 할 이유가 더 이상 없었으니까.
지금도 나는 방송국 녹음실에서 연주를 하는 중이다. 물론 미리 녹음해 두는 건 아니고, 내 연주를 실시간으로 방송할 것이라고 관계자들은 설명했다.
라디오 진행자와 여러 관계자들이 방음벽 너머에서 헤드폰을 끼고 내 연주를 듣고 있었다. 나는 눈을 감았다. 그리고 내가 연주하고 있는 곡에 집중했다. <어린이를 위한 정경>은 어려운 기교 없이도 서정적이고 낭만적인 그림을 그려 낼 수 있는 소품집이다.
그중 일곱 번째 곡인 트로이메라이는 내가 아끼는 작품들 중 하나이기도 했다. 나는 피아노를 연주할 때마다 어떠한 그림이나 풍경을 상상하곤 하는데, 이 곡은 항상 내게 가장 행복한 기억을 떠올리게 만들어 주었다.
예전에는 가족에게 칭찬을 들었을 때나, 내가 눈에 띄는 성과를 올리는 순간을 상상하곤 했다. 물론 지금은 그런 것 따윈 전혀 나를 고양시키지 못한다.
지금 내가 떠올릴 수 있는, 가장 행복한 기억은…….
나는 문득 옆을 돌아보았다. 조용하던 방음벽 너머에 짧은 소란이 일었다. 진행자를 비롯한 모든 사람이 자리에서 일어난 채로 한 사람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 또한 의도치 않게 전원을 기립하게 만든 남자를 볼 수 있었다.
자일스 헤센이 군복 차림새로 나타나 나를 향해 미소 짓고 있었다. 나는 마주 웃어 주었다. 물론 손을 흔들어 줄 수는 없었다. 아직 내 피아노 연주를 듣고 있는 청취자들이 있었으니까.
나는 자일스가 헤드폰을 착용하는 모습을 보았다. 이제 그는 전국 각지에 흩어진 청취자들과 마찬가지로 내 연주를 듣고 있었다. 나는 다시 피아노 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건반을 어루만져 주었다. 어르고 달래어 가장 아름다운 목소리로 노래할 수 있도록.
나는 머릿속으로 무언가를 떠올렸다. 이제는 방금 전보다 더욱 명료하고 선명하게 떠올릴 수 있었다. 비록 자일스와 나 사이에는 두꺼운 방음벽이 자리하고 있었지만, 우리는 같은 공간을 공유하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음악은 끊어지지 않는 실로 우리를 연결했다.
어쩌면 처음부터 그랬던 것 같다. 우리가 처음 만나던 순간에도, 나는 그를 위해 연주했고…… 그것이 길고 긴 인연의 시작이었으니까.
트로이메라이. 꿈을 꾼다는 뜻이었다.
자일스는 내 연주를 들으며 어떤 꿈을 꾸고 있을까.
나는 그쪽을 곁눈질했다. 자일스는 눈을 감고 있었다. 그 모습이 정말로 꿈을 꾸는 사람 같기도 해서 나는 슬그머니 미소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