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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을 사랑한 건 살아남기 위해서였다-44화 (44/93)
  • <44화>

    그는 입술을 매만졌다. 그의 손가락에 피가 묻어 나왔다. 하지만 나는 전혀 미안하지 않았다.

    “가자, 자일스.”

    내가 손을 내밀자 자일스는 말없이 내 손을 잡고 자리를 떠났다. 우리는 사람들 사이를 지나쳐 연회장을 떠났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입장을 마친 지금, 바깥은 한산했다. 사람들 앞에서 약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던 나는 보는 사람이 없음을 확인하자마자 그만 계단 위에 털썩 주저앉았다. 내 기분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래, 이거였다. 내가 그토록 피하고 싶어 했던 일 말이다.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게 하려고 나는 스스로를 시궁창에 밀어 넣고, 지옥으로 빠져드는 길인 걸 알면서도 아랑곳 않고 도망쳤던 거다.

    결국은 벌어지고 말았지만. 직접 겪어 보니까 상상했던 것보다 최악이었다. 마치 혐오스러운 벌레가 내 몸을 기어 다니는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자일스 또한 별로 말이 없었다. 그는 마치 죄인처럼 내 곁을 지키고만 있을 뿐이었다. 나는 그를 슬쩍 곁눈질했다. 안 그래도 연회장에서의 시간을 겨우 버티고 있었던 그는 이런 일까지 일어나니 더욱 비참해 보였다.

    “미안하다. 그런 일이 일어나도록 놔둬선 안 됐어.”

    “사과해야 할 사람은 당신이 아니야. 저 미친놈이지.”

    “내게 잘못이 없는 게 아니야. 빈센트는 항상 이런 식으로 내게 적대감을 표현하곤 해. 너를 데리고 그놈의 마수 속에 걸려든 내 잘못이 크다.”

    “이해가 안 돼서 그러는데, 저놈 분명히 당신 부하라고 했잖아. 그럼 당신이 제압하면 될 일 아니야? 내가 군대에 대해 잘 아는 건 아니지만 부하가 상관 파트너에게 이딴 짓을 하고도 괜찮은 거야?”

    이번엔 자일스가 나를 바라보았다. 연회장에서 흘러나오는 찬란한 불빛이 은은하게 그의 얼굴을 비추었다. 나는 그의 표정이 퍽 자조적으로 보인다고 생각했다.

    “내가 평범한 상관이었다면 그랬겠지. 나에겐 커다란 약점이 있어, 안나. 나는 벨담인이야. 모두의 증오를 떠안아야 할 당사자지. 혁명에 공헌해서 입스윈의 신뢰를 얻었다고 해도 내 혈통까지 바꿀 수는 없어. 빈센트만이 나를 적대하는 게 아니야. 사실은 저 자리에 모인 모두가 그렇지. 다만 다른 이들은 빈센트에 비해 조금 점잖은 방식을 택하고 있을 뿐이야.”

    그는 자신이 벨담인이라는 사실을 굳이 숨길 것 없다는 듯이 굴었다. 어차피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일 테니까. 입스윈이 눈감아 준 유일한 벨담인. 혁명 영웅이기 이전에 그는 벨담 출신 지주의 아들이었다.

    그랬으니 빈센트가 많은 사람들 앞에서 그에게 모욕을 주고도 아무렇지 않을 수 있었으리라. 연회장에 모인 사람들 대부분이 속으로는 자일스를 비웃고 있을 테니까.

    그리고 거기 휘말려 들어 함께 피해를 본 게 나였고.

    마음 같아선 빈센트를 죽이고 싶었지만, 그래도 나는 자일스가 자조적으로 굴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살아남고 싶어서 그랬던 거 아니야?”

    “뭐?”

    “당신이 벨담을 배신했다는 건 알아. 죽고 싶지 않아서 그랬던 거 아니야? 다른 이유가 있었던 게 아니라면 말이야.”

    자일스는 시선을 내리깔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됐네. 어쨌든 당신은 목적을 이룬 거잖아. 저 사람들이 뭐라 하든 알아서 지껄이라 그래. 결국 중요한 건 당신이 살아서 나랑 얘기하고 있다는 거 아니야?”

    살아남는 것보다 중요한 건 없다. 죽으면 결국 모든 것을 잃게 되니까. 두 번째 기회는 주어지지 않는다. 그냥 그대로, 전부 다 끝나게 되는 거다.

    그래서 나는 말하는 걸 멈출 수가 없어졌다.

    “나도 그랬을 거야. 당신처럼, 살아남기 위해선 나도 무슨 짓이든 했을 거라고.”

    그러자 자일스가 다시 나를 쳐다보았다. 그는 놀란 듯이 보였다. 내가 이런 말을 할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다는 건가? 그럼 그는 나에 대해 잘 모르고 있었던 거다. 난 그를 위로해 주기 위해 거짓말을 꾸며 내거나 하지 않았다.

    “뭘 그렇게 쳐다봐? 내 말 맞잖아. 당신, 벨담에선 뻔뻔하고 치졸한 배신자라고 부르겠지. 반대로 여기선 교활한 벨담 놈 취급을 받고 있을 거고. 그런데 말이야, 이왕 그리 불릴 운명이라면 좀 뻔뻔해져 봐. 난 내가 살아 있다는 사실만으로 남들을 열받게 할 수 있다면, 그들이 열받아 죽게 될 만큼 더욱 더 뻔뻔해질 텐데.”

    “빈센트 같은 부류가 되라는 건가?”

    “그보다 심하게 굴 수도 있고.”

    물론, 그에겐 내 조언을 받아들일 생각이 없어보였다. 어쨌든 난 진심으로 조언한 거다. 나라면, 정말 그렇게 했을 테니까.

    “방금은 내가 잘못한 것 같아.”

    “뭘 말이지?”

    “내가 빈센트 놈 뺨을 때려선 안 됐어. 당신이 주먹을 날리도록 둬야 했는데. 만약 그럴 생각이 있었다면 말이야.”

    “……예전 같았다면 그럴 수도 있었겠지.”

    “지금은 못 한단 말이야?”

    “네가 옆에 있으니까.”

    그게 무슨 말이지? 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내 앞에서 신사 노릇할 필요는 없어.”

    “그런 뜻이 아니야. 내가 진심을 드러내기 시작하면 입스윈도 가만있지는 않겠지. 나 혼자서라면 괜찮겠지만…… 네가 내 곁에 있는 이상 그럴 수는 없어. 네게 조금이라도 불똥이 튈 수도 있으니까. 나 때문에 네가 그 어떤 영향이라도 받게 놔둘 수는 없어.”

    자일스가 내 쪽으로 몸을 기울여 왔다. 그가 내 귀에 대고 속삭였다.

    “나를 걱정하기보다는 네 자신을 먼저 생각해, 안나.”

    나는 그만 입을 다물고 말았다. 하긴, 내가 남 걱정할 처지는 아니었다. 자일스처럼 나도 벨담의 혈통을 이은 처지였으니까. 게다가 난 귀족이기까지 했다. 그 사실이 들통난다면 그땐 정말 목숨이 위험해질지도 몰랐다.

    그러나 나는 오히려 뻔뻔하게 고개를 쳐들고 말했다.

    “나는 그저 피아니스트에 불과해. 꿇릴 게 뭐가 있다는 거야?”

    나는 가짜 이름 뒤에 숨은 게 아니었다. 안나 키팅이 내 진짜 이름이었다. 엘로이즈 비스마르라는 신분이 진실로 내 것이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자일스의 입가에 서서히 미소가 번졌다. 그는 오히려 내 뻔뻔함을 통해 위안을 얻는 것 같았다.

    “그래. 넌 피아니스트지, 안나.”

    “좋아. 알았으면 됐어.”

    나는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가자, 이대로 집에 가면 완전히 패배자처럼 보일 거야. 당신은 그 미친놈의 상관이잖아. 그 사실을 다시 상기시켜 줘야지.”

    우리는 손을 잡고 다시 연회장 쪽으로 향했다. 우리가 떠나든 말든 파티는 여전한 분위기를 유지하고 있었다. 술은 넘쳐 나고, 사람들은 웃고 떠들고. 우리가 다시 돌아오리라는 걸 예상하지 못했는지 몇몇 사람들이 놀란 얼굴을 했다. 난 그들을 향해 웃어 주었다.

    빈센트가 보이지 않았지만 상관없었다. 그 자식을 보려고 다시 돌아온 건 아니니까.

    다만 빈센트 대신에 우리 쪽으로 다가오는 사람이 있었다. 정장을 갖춰 입고 안경을 쓴 중년 남자였다. 놀랍게도, 그는 자일스가 아니라 내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실례합니다. 혹시 안나 키팅 양이 맞으신지요?”

    “네, 맞아요.”

    “이곳에 오신다는 소식을 듣고 어찌나 기뻤는지 모릅니다. 꼭 만나 뵙고 싶었거든요. 입스윈의 자랑스런 신예 피아니스트를 모르고 지나칠 수는 없는 법이죠. 반갑습니다. 저는 모건 세이지라고 합니다. 입스윈 필하모닉의 상임 지휘자이죠. 아마 안나 양께서도 저에 대해선 들어 보셨을 겁니다.”

    우리는 의례적인 악수를 나누었다. 나 또한 그에 대해 알고 있었다. 입스윈에서 가장 큰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는 사람인데 모를 수가 없었다.

    “다름이 아니라, 얼마 후에 있을 저희 오케스트라의 연주회에 안나 양을 객원으로 초대하고 싶습니다. 아주 많은 관객들이 모일 테니 분명 안나 양께도 새로운 기회를 마련하기 좋은 발판이 될 겁니다. 어떠십니까?”

    “제가 더 감사할 일이죠.”

    “그럼 수락하시는 것으로 알고 제 매니저에게 언질을 해 두겠습니다. 귀하의 연주에 아주 많은 감명을 받았다는 점, 부디 알아주시길.”

    그는 다시 한번 내 손을 꼭 잡고 흔들어 보이더니 사람들 사이로 사라졌다. 방금 전에 펼쳐진 광경을 말없이 구경하던 자일스가 물어왔다.

    “이런 일이 흔하게 있었던 편인가?”

    “이렇게 커다란 오케스트라에서 초청받은 건 이번이 처음이야.”

    “넌 정말 대단한 피아니스트야, 안나.”

    “나도 알아.”

    이제는 조금 알 것 같았다. 이 연회장 안에서, 나는 단순히 자일스의 파트너에 그치지 않았다. 가끔씩은 많은 사람들이 나에 대해 알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고는 한다. 그림자 속에 숨어 살던 날들에 너무 익숙해진 나머지.

    “있잖아, 아직도 기분이 거지 같아서 그러는데 술이나 더 마시러 가자. 그 정도는 괜찮잖아, 안 그래?”

    “……그래.”

    자일스는 나와 함께 연회장 한복판으로 나아갔다. 그는 더 이상 아웃사이더 같아 보이지 않았다. 엄연한 파트너와 함께였으니까.

    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한때 그 누구보다 증오했던 남자…… 나는 이제 그의 곁을 점점 내 몸의 일부였던 것처럼 편안하게 느끼고 있었다.

    그는 생전 처음으로 대가 없는 호의를 베푼 사람이었다. 자일스는 내가 겪어 본 다른 위선자들과는 달랐다. 그가 사람을 얼마나 죽였든 그런 건 상관없는 일처럼 느껴졌다. 중요한 것은 그만이 내가 필요로 하는 것을 줄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이니까.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자일스 헤센은 달랐다. 다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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