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화>
어두운 잿빛 금발 아래로 선명한 이목구비를 가진 사내였다. 미남이라는 소리를 들을 법했지만, 그러한 생김새 너머에는 외모에서 찾을 수 있는 장점을 모두 반감시킬 정도로 비틀어진 영혼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는 한마디로 뱀 같은 남자였다. 눈이 마주치는 순간 꼼짝할 수도 없이 얼어붙게 될 법한 그런 사람 말이다.
“빈센트.”
“존경하는 대위님께 인사 좀 드리려고 한 건데 왜 도망을 가십니까? 사람 무안하게.”
하지만 나는 그가 짓는 불량한 미소만 봐도 그가 자일스를 전혀 존경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단박에 눈치챌 수 있었다. 그는 일부러 자일스를 곤란하게 만들어 놓고는 이 상황을 즐기고 있었다.
빈센트의 시선이 내게로 옮겨 왔다. 나는 저도 모르게 자일스와 맞잡은 손에 더욱 힘을 주었다. 자일스가 굳이 설명해 주지 않아도 그가 위험한 사람이라는 것쯤은 알 수 있었다.
“아름다운 아가씨군요. 소개 좀 해 주시죠. 여기서 이렇게 마주친 것도 인연인데 말입니다.”
“……이쪽은 내 파트너로 참석한 안나 키팅 양. 안나, 빈센트 모너건 요원이다.”
“아, 안나 키팅? 그 피아니스트?”
빈센트는 내 이름을 듣고는 의외라는 듯이 굴었다. 마치 ‘그 피아니스트’가 자일스와 손을 잡고 파티에 참석할 줄은 몰랐다는 듯한 눈초리였다.
그러나 놀라운 기색은 곧 모습을 감추었다. 빈센트는 나를 흥미가 가득한 눈으로 바라보며 내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그가 한시도 내게서 눈을 떼지 않는 바람에 조금 무서워질 지경이었다. 빈센트가 내게서 뭘 원하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키팅 양. 편하게 안나라고 불러도 되겠습니까?”
“좋을 대로 하세요.”
“대위님, 파트너 분께 춤 신청을 하고 싶은데요. 저랑도 한 곡 추시죠, 안나. 후회하지 않게 해 드리겠습니다.”
“안나는…….”
“저는 레이디께 여쭌 겁니다.”
나를 감싸려던 자일스는 그만 입을 다물었다. 이제 모든 건 내게 달려 있었다. 마음 같아선 거절하고 싶었지만, 다른 사람도 아니고 자일스의 직장 동료나 다름없는 이의 춤 신청을 별 이유도 없이 거절하는 건 예의가 아닐 것이다.
만약 내가 거절한다면, 이번 일을 꼬투리 잡아 자일스에게 또다시 시비를 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내 파트너는 자일스였다. 나는 춤 한 곡만 추고 그를 보내 버려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좋아요. 모너건 요원님.”
“빈센트라고 부르시죠.”
그가 내 손을 잡았다. 나는 어깨 너머로 자일스에게 속삭였다.
“금방 올게.”
자일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점점 멀어지는 그의 눈 속에 우려가 가득해 보였다. 나는 어렵게 생각하지 않으려 했다. 춤 한 곡만 추면 되는 거다. 다른 건 생각할 필요 없었다.
빈센트가 한 팔로 나를 감싸 안았다. 우리는 함께 몸을 움직였다. 그와 나 모두 잠시 동안 말이 없었다. 다만 그는 내게 집중하고 있었다.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는 시선이 버거워서, 나는 그만 자일스가 있는 방향으로 시선을 돌리고 말았다.
“안나.”
그가 내 주의를 끌어왔다. 빈센트는 서늘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나에게 집중해야죠. 지금은 나랑 춤추고 있는 거잖습니까.”
“불쾌했다면 미안해요.”
“사과할 필요 없습니다. 그보다 놀라지 않을 수 없더군요. 자일스 헤센이 이토록 아름답고 유능한 피아니스트 분과 연이 닿아 있었다니 말입니다. 언제부터 아는 사이였습니까?”
그는 어느새 자일스를 헤센 대위님이 아닌 그냥 자일스 헤센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그가 들을 수 없는 곳에서는 경어를 쓰기도 싫다는 기색이었다. 반면, 그는 첫인상과는 달리 비교적 정중하고 부드러운 어조로 나를 대하고 있었다.
“얼마 되지 않았어요. 연주회를 다니다가 만난 사이예요.”
“연주회라. 낭만적인 첫 만남 장소로군요. 헌데 그 사건에는 어떻게 참여하게 되신 겁니까? 당신은 그저 피아니스트일 뿐이잖습니까. 민간인이나 다름없는 분에게 그런 위험한 작전에 뛰어들어 달라고 그가 부탁한 겁니까?”
나에겐 그에게 해 줄 수 있는 말이 없었다. 나는 대충 얼버무리는 쪽을 선택했다.
“그 얘기는 별로 하고 싶지 않아요. 좋은 기억이 아니기도 하고…… 이런 이야기는 자일스랑 직접 하셔도 되는 거잖아요.”
“실례했습니다. 하지만 꼭 묻고 싶었습니다. 이렇게 아름다운 분께서 혹여나 크게 다치셨을 수도 있었다고 생각하니 묻지 않을 수 없더군요. 용서해 주시죠.”
나는 미소로 대답을 대신했다. 말이 좋아 춤이지 그에게 잡혀 있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빨리 풀려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염병할 음악은 끝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렇거든요. 저라면 사랑하는 연인을 그런 위험한 기차 위에 태우지 않을 것 같아서 말입니다.”
“사랑이요?”
“헤센은 당신을 사랑하잖습니까. 혹시 모르셨던 건 아니겠지요.”
물론, 모를 리가 없다. 자일스가 먼저 이 자리에서 내게 고백했으니까. 그는 내게 사랑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내게 입을 맞추었다. 그런데 나는 자일스의 사랑 고백을 받은 지 얼마 되지도 않아 똑같은 자리에서 다른 남자와 춤을 추고 있었다.
뭔가 단단히 잘못되어 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빨리 그의 곁을 떠나고 싶은 마음은 배가 되었다. 그는 내 속마음을 들춰 보려는 듯 내 눈동자 속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사랑하십니까?”
“네?”
“자일스 헤센을 사랑하시는지 알고 싶습니다.”
그걸 이 남자가 왜 묻는 거지? 하지만 의아해할 가치조차 없었다. 애초에 빈센트는 순수한 마음으로 내게 춤 신청을 한 게 아니었다. 뭔가 다른 마음을 품고서 내게 접근했으리라는 건 너무나도 당연해 보였다.
그가 내게서 얻어 내고자 하는 게 정확히 뭘까? 빈센트는 자일스의 부하였지만, 대놓고 그에게 적개심을 드러냈다. 나를 자일스의 약점으로 이용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는 건가? 하지만 자일스가 나를 사랑한다는 게 어떻게 약점이 될 수 있다는 거지?
설마, 그는 내 정체를 알고 있는 걸까? 그런 생각이 불현듯 떠오르자, 나는 그만 평정심을 잃고 말았다. 빈센트는 나를 꿰뚫을 듯이 주시하고 있었다. 그가 뭔가 알고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자일스는 아무도 모른다고 했는데…….
만약 그렇다고 한들 여기서 동요하면 끝이었다. 나는 떨려 오는 목소리를 간신히 억누르고 뻔뻔한 표정을 지어 내 보였다.
“그럼 당신은요? 자일스가 나를 사랑하고, 나 또한 자일스를 사랑할 거라는 사실을 알았다면 왜 굳이 내게 춤 신청을 한 거죠?”
그는 얼른 대답하지 않았다. 묘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나는 이어서 물었다. 그가 주도권을 장악하게끔 놔두고 싶지 않았다.
“속마음을 말해 봐요. 왜 나에게 춤을 추자고 한 건지.”
“마음에 드니까요.”
그는 생각보다 직설적인 화법을 사용했다. 덕분에 나는 다시 할 말을 잃고 말았다. 빈센트는 다시 한번 강조했다.
“당신이 마음에 듭니다. 그래서 춤 신청을 한 겁니다. 혹시나 당신이 내게도 기회를 주지 않을까 싶어서.”
다른 여자들이었다면 진절머리를 냈을 정도로 뻔뻔한 언사였지만 내 마음은 오히려 누그러졌다. 적어도 그가 내 정체를 아는 건 아닐지 모른다는 확신이 들어서였다.
하지만 빈센트에게 여지를 주고 싶지는 않았다. 나는 그에게 전혀 관심이 없었다. 애초에 나는 다른 사람에게 쉽게 마음을 열지도 않는 사람이었다.
“나는 당신의 춤 신청을 거절하는 건 예의가 아닐 거라 생각해서 수락한 거예요.”
“그렇다면 다시 말해 보십시오. 자일스 헤센을 사랑하십니까?”
나는 고개를 들고 그를 바라보았다. 그를 보고 있으니 나는 이제야 내 마음을 알 것 같았다. 나는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을 그대로 읊었다.
“그래요. 나는 자일스를 좋아해요. 이제 됐나요?”
그는 실망하지도, 불쾌해하지도 않았다. 나의 단언에도 불구하고 그의 눈동자 속에서 일렁이는 감정이 더욱 선명해졌다. 뚜렷이 느낄 수 있을 정도였다. 나는 알았다. 그는 나를 원하고 있었다.
내가 뭘 하기도 전에 그가 나를 품에 끌어안았다. 내 입술 사이를 가르고 그의 것이 침범해오는 것이 느껴졌다. 한순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그가 내게 키스하고 있었다. 자일스와 입맞춤을 나눈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처음 보는 남자가 또다시 내 입술을 탐했다.
나는 그를 밀어 내려고 했지만 그가 나를 꽉 붙든 바람에 그럴 수가 없었다. 그는 나를 잡아먹을 듯이 키스했다. 생전 처음 느껴 보는 강렬한 감각에 정신이 나가고 다리에 힘이 풀릴 것 같았다.
그때, 익숙한 목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
“모너건!”
그제야 빈센트는 나를 놓아주었다. 나는 호흡을 갈무리하며 그에게서 뒷걸음질을 쳤다. 자일스는 분노로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성큼성큼 걸어와 내 앞을 막아섰다. 그는 화를 억눌러 참는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 뭐 하는 거지?”
빈센트는 내게 이런 짓을 저질러 놓고도 태연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마치 잘못된 건 아무것도 없다는 듯한 태도였다.
“제가 입을 맞춘 건 안나 양인데 왜 대위님이 화를 내십니까?”
“너는 안나에게 강제로 입을 맞췄다.”
“강제였는지 아닌지 대위님이 어떻게 아십니까?”
그가 비열한 미소를 지었다. 빈센트는 자일스를 화나게 만들었지만, 오히려 그 사실 때문에 만족스러워하고 있었다.
아니라고, 나는 절대 키스해도 된다는 허락 따위 한 적 없다고 외쳐야 한다는 걸 알았지만 충격 때문에 입이 떨어지질 않았다. 뭔가가 내 목구멍을 콱 틀어막고 있기라도 한 것 같았다.
“안나 양이 저 때문에 충격을 받으신 것 같군요. 직접 사과하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안나, 더 이상 휘말려 들 필요 없어.”
“아니야. 대화하고 싶어.”
겨우 정신을 차린 내가 급히 말했다. 자일스가 나를 돌아보았다. 직접 말은 하지 않았지만, 그는 나를 말리고 있었다. 하지만 내 의지는 확고했다.
“그와 직접 대화하게 해 줘.”
자일스는 망설임 끝에 옆으로 비켜섰다. 이제 내가 마주하고 있는 건 빈센트였다. 나를 내려다보던 그가 고개를 살짝 숙여 보였다.
“제가 저지른 무례에 대해 사죄드립니다. 제 마음을 주체할 수가 없어서 그리 되었군요. 제 사과를 받아 주시겠습니까?”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에게 너그러운 말을 돌려주기 위해 자일스를 물러나게 한 게 아니었다. 대신 나는 손을 올려 그의 따귀를 때렸다. 예상치 못한 공격을 당한 그의 몸이 살짝 휘청였다. 주변에서 이 사태를 구경하던 사람들이 약한 탄성을 내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