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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을 사랑한 건 살아남기 위해서였다-42화 (42/93)

<42화>

나는 자일스가 죄인처럼 굴어야 하는 게 싫었다. 나는 그 기분이 어떤지 충분히 잘 알고 있다. 겉으로는 일원으로 받아들여진 것 같지만, 사실은 외톨이일 뿐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느껴야 하는 소외감…….

자일스는 잠시 주저하는 듯싶더니 곧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춤추자.”

우리는 함께 손을 잡고 짝을 지은 파트너들 옆에 자리를 잡았다. 그들은 왈츠를 추고 있었다. 왈츠야말로 가장 대중적인 춤 중에 하나다. 3박자에 맞춰 스텝을 밟기만 하면 되는 간단한 춤이라 그런지 왈츠를 추지 않는 나라를 찾기 힘들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나 또한 왈츠를 배운 적이 있었다. 이건 아주 기본적인 춤이었다. 춤 선생의 지적을 들어 가며 열심히 연습했던 기억이 났다.

자일스가 내 허리에 팔을 감았다. 우리는 천천히 박자에 맞춰 몸을 움직였다. 자일스는 춤을 잘 추는 편이었다. 군복을 입었을 뿐이지 이제 보니 그는 완전히 도련님이었다.

남녀로 이루어진 파트너들 사이에 끼어들 때만 해도 확신이 없어보이던 자일스는 막상 왈츠가 시작되자 내게서 한시도 눈을 떼지 않았다. 그의 검은 눈동자가 내 얼굴 이곳저곳을 어루만지듯이 살폈다. 이미 그의 시야에 다른 사람들은 들어오지 않는 것 같았다.

나는 그제야 깨달았다. 우리가 이렇게 가까이 붙어 서서 서로를 바라보는 건 처음이라는 사실을.

“춤 잘 추네.”

“마음에 들어?”

“네가 먼저 춤 신청을 하지 않았다는 점만 빼면.”

그가 웃었다. 하지만 모래사장 위에 그린 그림이 파도에 쓸려 나가듯, 그의 미소 또한 서서히 자취를 감추었다. 그는 내게 사로잡혀 있었다. 아니, 내가 그에게 사로잡힌 건가? 알 수 없었다.

자일스는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도저히 그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마치 알 수 없는 힘이 나를 붙잡고 있는 것 같았다.

“안나.”

그가 평소보다 조금 더 낮은 목소리로 내 이름을 불렀다. 나는 그의 눈빛 속에서 일렁이는 강렬한 감정을 발견하고 그만 넋을 놓고 말았다.

자일스의 목소리는 음악마저 잠시 멎게 만들었다.

그가 내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사랑해, 안나.”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애초에 대답을 필요로 하는 고백이 아니었다. 많은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거절해야 할까? 그와 잠시 거리를 두어야 하나? 내가 과연 그라는 사람을 믿어도 되는 걸까?

하지만 그러한 내면의 목소리가 가지를 더욱 뻗어 나가기도 전에, 그것들은 전부 멈춰 버렸다.

“사랑해.”

그 말 한 마디로 나는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어졌다. 자일스 또한 더 이상 뜸을 들이지 않았다. 그가 내게 입을 맞추었다. 내 입술을 열고 그의 것이 부드럽게 겹쳐 들었다.

거대한 솔즈부르 저택 한 구석에서 함께 피아노를 치다가 그랬던 것처럼. 그때와 같았지만, 또한 같지 않았다.

그의 입술이 따뜻했다. 평생 처음 느껴 보는 강렬한 온기였다. 주저하던 것도 잠시, 나는 끝내 그의 입맞춤을 뿌리치지 않았다.

그냥…… 한 번쯤은 이래도 좋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

빈센트 모너건은 지루한 얼굴로 군인들 사이에 섞여 있었다. 그의 동료들은 시답잖은 이야기나 주고받으면서 주정뱅이마냥 낄낄 웃어 댔다. 아니, 실제로도 그들은 조금씩 주정뱅이가 되어 가고 있는 중이었다. 술은 넘쳐 났고, 시간은 많았으니까.

그는 연회를 즐기는 편이 아니었다. 그가 원하는 건 멍청한 수다를 떨어 대는 게 아니라 이럴 시간에 더 많은 벨담 놈들을 취조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빈센트의 원수였다. 혁명군이 되기 전까지, 단 한 순간도 그들을 증오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증오, 증오. 머릿속으로 몇 번이고 새겨 본 단어들이다. 빈센트의 삶 전반에 스며들어 버린 감정들. 빈센트는 벨담을 증오했다.

벨담은 그를 이 지경이 될 때까지 뒤틀어 놓았다. 그래서 증오했지만, 덕분에 빈센트는 칼날로 만든 심장을 가진 괴물이 되어 그들에게 똑같이 되갚아 줄 수 있게 되었다.

마침내 벨담 놈의 살갗을 인두로 지질 수 있게 되었을 때, 그는 얼마나 만족스러웠던가? 드높은 권력의 탑 위에서 추락해 땅으로 떨어진 귀족 놈들을 끌어다가 폭력의 집행자가 되는 것이 그의 일이었다. 그는 비명 소리를 들었다. 그들이 애원하도록 만들었다.

아주 즐거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머릿속으로만 그려 오던 일을 실제로 할 수 있게 되다니……. 이보다 더 만족스러울 수 있을까?

그는 더 바랄 것이 없었다. 평생 염원하던 일을 이루었고, 앞으로의 탄탄대로도 보장되어 있었다. 증오의 깊이가 깊었던 만큼 혁명에 수많은 기여를 했다. 그들이 비명을 지를 때, 빈센트는 콧노래를 부르며 본부 지하 복도를 거닐었다.

그러다 보면 그는 종종 익숙한 실루엣의 주인과 마주치곤 했다.

자일스 헤센. 그와 똑같은 군복을 걸쳤지만, 벨담 지주 집안의 귀하신 도련님 혈통을 가진 남자. 한때 벨담 국방군 대위였던 군인. 자일스는 속을 알 수 없는 검은 눈으로 빈센트를 훑어보고는 했다.

그럴 때마다 빈센트는 불쾌감을 참을 수 없었다. 저 철창 안에서 숨만 겨우 쉬는 꼴을 하고 있어야 할 자가 그와 같은 군복을 입고 있었다. 그에게 명령을 하고, 그의 이름을 불렀다. ‘헤센’. 그 역겨운 성씨를 달고서 뻔뻔하게도 혁명군의 영웅 행세를 하는 것이다.

빈센트는 자일스의 번드레한 낯짝을 볼 때마다 반감을 가졌다. 그래, 그가 수많은 벨담 귀족들을 체포하고 처형한 건 사실이다. 하지만 자일스는 결국 한때 그들과 같은 벨담의 도련님이었다.

자일스는 증오를 몰랐다. 증오의 흔적이라고는 찾아볼 수도 없는 그의 얼굴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위선자! 빈센트는 속으로 자일스를 그리 불렀다. 변절했다는 것만 빼면, 그가 여타 귀족들과 다를 게 뭐가 있다는 거지? 그는 빈센트가 고문하지 못한 유일한 벨담 남자였다. 본래대로라면 그는 빈센트의 발밑에 무릎을 꿇고 목숨을 구걸해야 했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오히려 빈센트는 그의 밑에서 명령을 받는 입장이었다.

속이 뒤틀렸다.

빈센트는 동료들의 별 의미도 없는 수다를 들어 주는 대신 눈을 굴려 자일스의 흔적을 찾았다. 분명 그도 참석했을 텐데. 저도 제 분수를 아는지, 자일스는 이런 자리가 생길 때마다 찾기 힘든 구석에 박혀 있고는 했다.

그러나 놀랍게도, 빈센트는 연회장 정중앙에서 그를 발견할 수 있었다. 자일스는 한 여자와 춤을 추고 있었다. 춤이라기보다는 대충 몸만 움직일 뿐 여자를 껴안고 있었다는 표현이 더 적절할 듯 보였다.

빈센트는 시선을 그에게 집중했다. 의례적으로 데려온 파트너는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정말 안정적이고, 행복해 보였으니까.

빈센트가 아는 자일스는 무채색과도 같은 사내였다. 언제나 표정이 없었고, 모든 일들에 무감했다. 헌데 지금 이 순간만큼은 전혀 달랐다. 자일스가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는 금발의 여자와 무어라 속삭이며 대화를 나누더니 지금껏 한 번도 보인 적 없는 표정을 지었다.

자일스 헤센은 행복했다.

저 여자 때문에.

사랑에 빠진 것일까? 빈센트는 믿을 수 없었다. 자일스 헤센이 사랑에 빠지다니. 곧 죽을상을 하고 다니던 그 인간이? 대체 저 여자는 누굴까. 누구기에 자일스 헤센의 낯짝이 따스한 색으로 물들게 만들었나.

빈센트의 입가에 뒤틀린 미소가 떠올랐다. 저 꼴을 보고도 가만있을 수는 없었다. 그는 들고 있던 잔을 한 번에 비우고는 말없이 자리를 옮겼다.

자일스의 여자가 궁금했다. 아니, 궁금함을 넘어서서 기이한 소유욕이 치밀었다. 저 여자를 빼앗고 싶었다. 그럼으로써 상관에게 조금이라도 굴욕감을 줄 수만 있다면 충분했다.

빈센트는 자일스의 시선이 가장 잘 닿을 만한 위치에 서서 그들을 주시했다. 여자에게 정신이 팔려 있던 자일스가 시선을 느끼고 그를 보았다. 그의 움직임이 잠시 굳었다.

행복에 겨웠던 얼굴이 차가워지는 모습을 보며, 빈센트는 교활한 미소를 지었다.

*

나는 자일스의 표정이 차갑게 식는 모습을 보았다. 그의 시선이 한 군데에 꽂혀 있었다. 나는 그의 시선이 향하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탁한 금발을 가진 군인이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워낙 키가 커서 사람들 사이에 섞여 있어도 금방 찾을 수 있었다.

나는 자일스의 귓가에 대고 속삭여 물었다.

“누구야, 저 사람?”

“빈센트 모너건. 내 부하야. 마주쳐서 좋을 것 없는 놈이지. 웬만하면 눈 마주치지 말고 모른 척해.”

한 번 더 뒤를 돌아보고 싶었지만 그의 말을 듣고 참았다. 1초도 되지 않는 순간이었지만 그만큼 빈센트의 인상은 강렬했다. 그는 우리를 노려보고 있었다. 일면식 없는 사이인데도 가슴이 철렁할 정도로 집요한 눈동자였다.

자일스는 계속해서 그를 경계하고 있었다. 보아하니 빈센트 또한 자리를 떠나지 않고 있는 모양이었다.

“당신 부하라며. 그런데 왜 저래? 사이가 안 좋은 거야?”

“천성적으로 위험한 데다 나를 그리 좋아하지 않는 놈이야. 아무래도 시비를 걸어오려는 모양이다. 자리를 피하는 게 좋겠어, 안나.”

그는 나를 데리고 사람들 곁에서 멀어졌다. 하지만 빈센트에겐 우리를 놓아줄 생각이 없었던 모양이었다. 남자의 목소리가 자일스의 발걸음을 멈추었다.

“헤센 대위님.”

이렇게 된 이상 자일스도 어쩔 수 없이 빈센트를 마주 봐야만 했다. 나는 자일스의 손을 잡고서 빈센트를 돌아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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