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화>
연회는 저녁 일곱 시 정각에 열린다고 했다. 대충 얼굴만 보이고 오면 되는 일인데 아름다운 드레스를 차려 입으니 거창한 무도회라도 가는 기분이었다. 나는 내가 가진 것들 중 가장 좋은 구두를 신고 바깥으로 나갔다.
검은 승용차 한 대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제복 차림을 하고서 차에 기대고 있는 자일스가 보였다. 평소와 다를 것 없는 모습이었으나, 이 날만큼은 어딘가 달라 보였다. 나는 뭐가 달라진 건지 알아내고 싶었다. 머리 모양에 더 신경을 쓴 건가?
자일스는 나와 눈을 마주치고는 자세를 바로 했다.
“안나.”
“빨리 가자. 드레스 입고 서 있으려니까 어색해 죽을 것 같아.”
그는 군말 없이 승용차 뒷문을 열어 주었다. 우리는 딱정벌레 같은 차를 타고 고요한 도로 위를 달렸다. 자일스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나는 이런 연회에 참석한 경험이 전무하다고 봐도 되는 사람이었다.
그곳에 가서 전혀 모르는 사람들을 만나야 하겠지. 호기롭게 참석하겠다고는 했지만 막상 당일이 되니 긴장이 되었다.
“자일스.”
“왜 그래?”
“거기 가면 난 뭘 해야 하지? 그러니까, 연회에서 통하는 예법 같은 게 있을 거 아니야.”
“그런 건 신경 쓰지 않아도 돼. 귀족들이 열곤 했던 파티와는 다르니까. 사람들이랑 마주치면 간단히 인사치레만 해. 무엇보다 내가 네 옆에 붙어 있을 테니 너무 걱정할 필요는 없어.”
“괜히 간다고 했나 봐.”
“긴장돼?”
그가 어깨 너머로 물어 왔다. 나는 대답을 생략하고 한숨만 쉬었다. 하지만 여기서 물러설 수는 없었다. 이미 우리는 연회장으로 향하고 있었고, 나는 드레스값을 해야만 했으니까.
“군인들이 많이 올까?”
“아무래도 그렇겠지.”
“생각해 보니 내 간이 배 밖으로 튀어나왔나 봐. 귀족 출신이면서 혁명군이 바글바글한 파티에 참석한다니 말이야.”
“너는 안나 키팅이야. 피아니스트지.”
자일스는 처음부터 그것이 사실이었다는 듯이 덤덤하게 말했다.
“비스마르 가문은 이제 입스윈 내에 존재하지 않아. 과거의 흔적은 지워 버려. 모두를 속이고 너 자신마저도 속여. 그럼 그것이 결국엔 진실이 될 거야. 아무도 기억하지 못한다면 제아무리 진실이라 해도 힘을 쓸 수 없을 테니까.”
잠깐 대화를 나누는 사이 차가 멈췄다. 자일스는 능숙하게 차를 대고는 문을 열어 주었다.
차에서 내린 후에야 나는 연회가 열리는 장소의 정체에 대해 알 수 있었다. 놀랍게도 그곳은 어느 귀족이 살았을 법한 저택이었다. 규모가 제법 커다란 것을 보니 고위 귀족의 소유였던 게 분명했다.
내가 대저택을 올려다보고 있을 때, 그가 내게 손을 내밀었다. 나는 그때 당연한 사실을 상기해 냈다. 아, 그래. 나는 자일스의 파트너였다. 함께 팔짱을 끼고 연회장에 들어서는 흔한 남녀들 중 하나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는 차마 내게 팔짱을 끼자고 할 수는 없었는지 훨씬 더 얌전한 방법을 택했다. 나 또한 그의 판단이 제법 마음에 들었다. 나는 자일스의 손을 잡고 대저택을 향해 걸었다.
제복을 입은 군인이 명단을 든 채 입구에 서 있었다. 그는 단박에 자일스를 알아보고는 경례를 올려붙였다.
“대위님. 성함을 말씀해 주십시오. 의례적인 절차입니다.”
“자일스 헤센. 그리고 내 파트너인 안나 키팅 양.”
군인은 명단에 줄을 긋고는 옆으로 비켜섰다.
“좋은 밤 되십시오.”
그는 나를 데리고 대저택 안으로 들어섰다. 커다란 로비에 들어서는 순간 나는 떨쳐 낼 수 없는 기시감을 느꼈다. 화려한 저택 내부와 파티를 위해 모여든 수많은 사람들…… 아무것도 모르던 백작 영애 시절로 돌아온 것만 같은 기분마저 들었다.
다만 이제 대저택을 차지한 이들은 좋은 옷과 사치스런 드레스를 차려입은 귀족들이 아닌 군인들과 평범한 여인들일 뿐이었다.
우리는 본격적인 연회가 열리는 홀 안으로 발을 내디뎠다. 자일스가 모습을 드러내자마자 몇몇 사람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아는 체를 했다. 자일스는 내가 곤란해할 것을 염두에 두었는지 적당히 미소만 지으며 그들을 물리쳐 냈다.
하지만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우리에게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나는 알 수 있었다. 직접 말을 걸어오지는 않았지만 수많은 시선이 모이는 게 느껴졌다. 소음을 뚫고 누군가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헤센이 여자를 데려왔네?
자일스는 그나마 인파가 적은 곳으로 나를 이끌었다. 그곳에는 펀치를 비롯한 여러 가지 술과 안줏거리들이 있었다.
그는 샴페인을 기다란 잔에 따라 내게 내밀었다. 나는 한 손에 잔을 든 채 그가 술을 마시는 모습을 지켜보며 느꼈다. 자일스 또한 연회를 즐기는 편이 아니라는 것을.
그가 벌써 피곤해하는 것이 느껴졌다. 사람들의 말소리, 간간히 들리는 웃음, 잔이 부딪히는 소리와 음악…… 소란스러움이 그의 신경을 곤두세우는 것 같았다.
내가 그에게 무어라 말을 걸려던 순간, 커다란 실루엣이 우리 쪽으로 다가왔다. 해링턴 장군이었다.
“자일스! 드디어 왔구만. 자네를 찾아다니느라 홀을 한 바퀴나 돌았어.”
“장군님.”
자일스의 어깨를 두드리며 그를 반기던 해링턴이 내게로 시선을 보냈다. 그의 얼굴이 단숨에 밝아졌다.
“아, 키팅 양이로군요. 제 초대에 응해 주셔서 감사할 따름입니다. 부디 연회를 즐기시기를.”
그의 얼굴에는 벌써 약한 술기운이 돌고 있었다. 해링턴은 만족스러운 얼굴로 주변을 돌아보더니 말했다.
“참 멋진 곳이죠, 그렇지 않습니까? 이곳은 어느 백작이 가지고 있던 수많은 저택들 중 하나랍니다. 그야말로 이만한 규모의 집을 몇 채나 갖고 있었다는 거죠. 치가 떨리지 않습니까? 그동안 우리 입스윈 사람들은 좁은 공간마저도 여러 사람이 나눠 써야 했는데 말입니다. 뭐, 이제는 다 옛날 얘기죠. 이 호화로운 저택은 이제 우리 겁니다. 내 집이다, 생각하고 편히 계십시오.”
그는 기분 좋은 웃음을 터뜨리더니 이내 다른 사람들에게 말을 걸러 떠났다. 해링턴마저 떠나간 이후에 더 이상 우리에게 접근해 오는 사람들은 없었다. 나는 샴페인만 홀짝이고 있는 그에게 슬쩍 물었다.
“사람들이랑 안 어울려도 돼?”
“얼굴 비친 걸로 됐어.”
“그냥 그게 다라고?”
“내가 무리에 섞이면 서로 불편해질 뿐이야. 안나, 너도 알겠지만 나는 벨담 출신이니까. 아무리 많은 공로를 세웠다고 해도 그 사실은 변하지 않아. 다들 겉으로는 나를 영웅이라고 부르지만…… 실제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 많지.”
그는 단순히 사람들과의 모임을 불편해하는 게 아니었다. 자일스는 그간의 행적으로 인해 목숨을 구할 수 있게 되었다. 가슴팍엔 훈장이 달렸고, 사람들은 그를 웃는 얼굴로 대해 주었다.
하지만 입스윈은 그를 진정한 동료로 생각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한마디로 이곳에 모인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일스의 친우인 동시에 잠재적인 적들이었다.
조금이라도 삐끗한다면, 그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자일스에게 칼날을 세울 것이다.
나는 자일스가 연회장에 들어선 지 몇 분도 되지 않아 피로한 얼굴을 보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한때는 그 꼬리표를 잘라 낼 수 있을 거라 생각했지.”
그가 자조적으로 미소를 지었다.
“그래도 불만은 없어. 살아남은 걸로 됐으니까. 그거 하나면 됐어. 다른 귀족들처럼 피투성이가 되어 죽어 가느니 미소 뒤에 숨겨진 경멸을 마주하는 게 훨씬 나아.”
“당신, 여기 정말 오기 싫었겠구나.”
“어쩔 수 없는 일이었어. 술이나 마시면서 서 있다가 대충 파할 때쯤 분위기 봐서 돌아가면 돼.”
“그럼 지금까지 연회가 있을 때마다 그래 왔던 거야?”
자일스는 대답 대신 술을 한 모금 들이켰다. 나는 문득 그가 가엾다는 생각을 했다. 그는 영원한 따돌림의 대상이자 약점이 잡히기만 하면 바로 내쳐질 사람이었다.
음악이 잠시 멎었다.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소리만이 정적을 메우던 그 때, 누군가 스피커를 통해 웅장한 음악을 틀었다.
그것은 벨담 국가였다. 국가가 울려 퍼지자 사람들은 왁자한 웃음을 터뜨렸다. 인파 사이로 누군가 외쳤다.
“돌아가신 아버지의 나라를 위해 노래합시다!”
그러자 모두가 음악에 맞춰 노래를 시작했다.
자유와 영광과 번영,
벨담의 하늘에는 해가 지지 않는다네
모든 남자들, 모든 여인들이여!
형제자매가 되어 함께 손잡고 나아가자
한 손에는 횃불을,
다른 한 손에는 영광스런 성검을 들라
자유와 영광과 번영을 위해!
아버지의 나라, 벨담이여 만세!
연회장에 모인 군인들이 술잔을 높이 들어 올리며 깔깔 웃어 댔다. 모두가 한마음으로 국가를 불렀지만 그것은 오히려 벨담을 조롱하기 위함이었다. 자일스는 최대한 눈에 띄고 싶지 않은지 제자리에서 단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았다.
아무리 자일스가 더 이상 벨담의 자식이 아니라지만, 모두가 벨담을 증오하고 조롱하는 자리에서 그가 초조함을 느끼지 않을 리 없었다.
국가가 끝나자 다시 이전과 똑같은 음악이 빈자리를 채웠다.
“안나.”
그가 돌연 내 이름을 불렀다. 내가 그에게로 다시 시선을 옮기던 그때였다. 자일스가 커다란 품에 나를 감싸 안았다. 나는 차마 어쩌지도 못하고 가만히 그의 포옹을 받아 주었다.
“고마워. 내 곁에 있어 줘서.”
그에게는 내 존재가 커다란 위안이었던 모양이다. 하긴, 나라도 이런 자리에서 혼자 있고 싶지는 않을 것 같다. 나를 마지막 보루인 양 힘껏 끌어안았던 자일스는 곧 나를 놓아주었다.
만약 내가 불참하겠다고 했다면, 그는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구석에 가만히 서 있다가 돌아가야 했을까?
나는 술잔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그의 손을 잡아끌었다.
“가자.”
“어딜 가는 거야?”
나는 몇몇 파트너들이 짝을 지어 모여 있는 방향으로 턱짓했다.
“저길 봐, 사람들이 춤을 추고 있어.”
“안나, 나는…….”
“파트너를 데려왔으면 춤 한 곡은 춰야지. 안 그래?”
그는 차마 반박하지 못했다. 나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나랑 춤추자, 자일스 헤센. 자랑스런 혁명 영웅이잖아. 꿇릴 게 뭐가 있어? 이러려고 드레스도 선물한 거 아니었어?”
오늘 밤, 적어도 그는 혼자가 아니었다. 다른 사람들과 어울릴 수 없을지언정 나까지 우두커니 세워 두지는 말아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