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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을 사랑한 건 살아남기 위해서였다-40화 (40/93)
  • <40화>

    자일스는 철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가 모습을 드러내자 대기 중이던 어린 요원이 반사적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헤센 대위님.”

    “빈센트는?”

    “지금 취조실 안에 들어가 계십니다. 아직 일이 덜 끝나서 말입니다. 하지만 들어가신 지 시간이 꽤 흘렀으니, 곧 나오실 겁니다.”

    자일스는 고개를 끄덕이곤 요원에게 자리에 앉으라는 손짓을 했다. 그 또한 유리벽 너머로 취조실 상황을 내다볼 수 있었다. 바깥에서만 볼 수 있고, 안에서는 보이지 않는 구조의 벽이었다.

    익숙한 남자의 뒷모습이 보였다. 그가 의자에 묶어 놓은 또 다른 남자의 턱을 붙잡고 무어라 윽박지르고 있었다. 날 선 목소리가 방음벽에 막혀 웅웅거리는 소리로 전락했다.

    “기다리시는 동안 음악을 틀까요?”

    요원은 그새 축음기 옆으로 가 있었다. 이곳에는 많은 레코드판이 구비되어 있었다. 벨담 지배하에 있을 때부터 존재했던 물건들이었다. 저 축음기를 볼 때마다 기분이 이상해지는 건 여전했다. 벨담인들의 악취미를 혁명군이 그대로 물려받게 되다니 말이다.

    “됐다. 그냥 기다리도록 하지.”

    “알겠습니다.”

    몇 분 되지 않아 취조실 문을 열고 190센티미터가 넘는 장신의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빈센트 모너건이었다. 그는 취조실보다는 고문실에서 더욱 진가를 발휘하는 인물이다.

    빈센트의 회색 눈동자가 자일스에게 꽂혔다. 인간성의 흔적이라곤 거의 찾아볼 수도 없는 건조한 눈빛은 가끔씩 아군들마저도 흠칫하게 만들었다.

    자일스는 그를 무던히 바라보며 인사를 건넸다.

    “빈센트.”

    “아, 대위님 오셨습니까.”

    깍듯한 인사치레와는 다르게 그의 미소에는 불량스러운 구석이 있었다. 호의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도 없는, 어딘가 낮잡아 보는 듯한 미소였다. 자일스는 엄연히 그의 상관이나 마찬가지였지만, 빈센트는 그를 전혀 존경하지 않았다.

    빈센트는 요원에게 턱짓을 해 보였다.

    “피터, 넌 이만 나가 봐.”

    “나중에 뵙겠습니다.”

    요원은 경례를 올려붙이고는 성큼성큼 방을 빠져나갔다. 이제 좁은 공간에 남은 건 둘뿐이었다. 빈센트는 담배에 불을 붙이며 물어 왔다.

    “한 대 피우시렵니까?”

    “난 됐어.”

    담배 연기가 공기 중을 머물다 이내 사라졌다. 빈센트는 옅은 색 셔츠에 서스펜더 차림을 하고 있었다. 그의 셔츠에는 핏자국이 배어 있었다. 그는 핏자국을 구태여 숨기려고도 하지 않았다. 빈센트는 오히려 그런 자국들을 훈장처럼 여기는 사내였다.

    잘 빗어 넘긴 잿빛 금발은 놀랍게도 흐트러짐 한 점 없었다. 빈센트는 숙련된 고문 기술자였다. 상대방의 정신을 붙들고 진창에 처박는 일을 그는 테니스 치는 일쯤으로 여겼다. 여러 해 동안 쌓이고 쌓인 증오가 그의 재능에 불을 붙이고 말았다.

    “얼마 전 생포한 벨담 요원 놈을 취조 중이었습니다. 아무리 살살 달래도 원체 입을 열 생각을 않네요. 아무래도 다음 단계로 넘어가야 할 듯싶습니다.”

    “승인부터 받고 진행해. 벨담 측과 협상하는 중이니 함부로 손대서 좋을 것 없어.”

    “누가 죽인답니까? 사지를 못 쓰게 만드는 것도 아니고. 그냥 취조하는 방식을 좀 바꾸는 것뿐인데요.”

    담배 연기를 한 차례 더 뿜어낸 그가 물어 왔다.

    “저는 왜 찾으신 겁니까?”

    “네가 이번 사건을 맡겠다고 자처했다던데.”

    “그랬죠. 뭐 문제 있습니까?”

    “협조 의사는 고맙게 생각하지만 나 혼자서도 처리할 수 있는 일이다. 굳이 나서서 고생해 줄 필요 없어.”

    “혁명 영웅답게 열의가 넘치시는군요. 일손을 보태겠다는데도 마다하시다니.”

    그가 은근히 빈정거렸지만 자일스는 무시했다.

    “쉽게 말하자면 이 사건에서 손 떼라는 소리다.”

    “그건 안 되겠습니다.”

    “…….”

    “이미 상부에서 허락이 떨어졌습니다. 저는 공식적으로 이 사건에 합류한 겁니다. 무르고 싶으시다면 제가 아니라 지도부에 직접 부탁해 보시죠.”

    자일스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한발 늦었다. 다른 사람이면 몰라도 빈센트만큼은 이번 일에 관여하지 않았으면 했지만 그의 우려가 도리어 현실이 되어 나타났다.

    “뭐 들키면 안 되는 일이라도 있는 겁니까?”

    “삐딱하게 굴지 마. 이번 사건의 책임자는 나다. 허락이 떨어진 것과는 별개로 모든 결정은 내 승인을 거쳐서 이루어진다. 알겠나?”

    “예, 예. 걱정 붙들어 매십쇼.”

    “저자도 일단 감옥에 넣어 놔. 지하 3층으로 섣불리 데려가지 말고. 사소한 일 하나로 지도부에 걸림돌이 되어선 안 돼.”

    “알겠습니다.”

    빈센트는 못내 불만스러운 기색이었다. 나름대로 계획을 다 짜 놨는데 네가 다 흩뜨려 놨다는 뉘앙스였다.

    자일스는 그의 기분 따위는 신경 쓰지 않았다. 그는 빈센트의 상관일뿐더러 빈센트와 감정적으로 얽혀 봤자 좋을 게 하나도 없다는 건 그가 더 잘 알고 있었다.

    자일스가 이만 취조실을 떠나려던 그때였다. 빈센트는 그의 등에 대고 내뱉듯이 물었다.

    “알베르트 레만은 왜 죽이신 겁니까?”

    “그건 왜 묻지?”

    “궁금하니까요. 이런 잔챙이들 입에서 나오는 백 마디 정보보다 그놈이 뱉는 한 마디가 훨씬 귀중한 법인데 말입니다. 상부에서도 언짢아하시는 것 같던데요. 무슨 일이라도 있었던 겁니까?”

    “생포할 여건이 되지 않았던 것뿐이야. 어쩔 수 없는 결정이었다.”

    “덕분에 제가 해야 할 일만 더 까다로워졌습니다. 레만 하나만 있으면 될 일을 여러 사람 붙잡고 캐물어야 하게 됐으니까요.”

    “빈센트.”

    자일스가 그를 똑바로 바라보며 부르자 빈센트의 움직임이 일순 굳었다. 담배 연기만이 불빛 아래로 천천히 유영하고 있었다.

    “혁명은 성공했다. 입스윈 국민들은 제 권리를 되찾았어. 예전처럼 손에 피를 묻혀야 할 이유는 더 이상 없다. 그러니 너무 이 일에 몰두하지는 마. 일도 추세를 봐 가면서 해야지.”

    “설마, 저를 걱정해 주시는 겁니까?”

    “쓸데없이 열 올리지 말라는 소리다. 너는 내가 시키는 일만 하면 돼. 잊지 마. 보고 사항이 생기는 즉시 올리도록 하고. 내 통제 안에서 벗어나지 마라.”

    “……가슴 깊이 새기도록 하죠.”

    자일스는 미련 없이 철문을 닫고 바깥으로 나갔다. 담배 연기 때문인지 두통이 쏟아졌다.

    그 혼자 처리해야 마땅했던 일에 하필이면 빈센트 모너건이 연루됐다. 그는 혁명군 내에서 가장 위험한 군인들 중 하나일 뿐만 아니라 자일스에게 대놓고 적의를 드러내곤 하는 인물이었다.

    상황이 좋지 않았다.

    혹시라도 그가 안나에 대해 알게 된다면…….

    자일스 헤센은 걸음을 빨리했다. 벨담 기차에 탑승했던 요원들로부터 압수한 모든 서류들을 읽어 볼 작정이었다. 단 한 줄이라도 안나에 대한 정보가 적혀 있는지 즉시 알아봐야만 했다.

    알베르트 레만이 엘로이즈 비스마르라는 이름까지 알아냈는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그는 한때 안나의 신뢰를 얻었던 인물이었다. 자일스 다음으로 그녀를 가장 잘 알았던 이가 바로 레만이었다.

    안나는 왜 그런 이에게 신뢰를 준 걸까.

    그는 쓸데없는 생각을 머릿속에서 지워 버렸다. 그가 정말 지워야 할 게 있다면 그건 혁명군이 안나의 진짜 이름을 알아낼 일말의 가능성뿐이었다.

    *

    며칠 지나지 않아 나는 퇴원해도 좋다는 말을 들었다. 슬슬 병원 생활도 질려 가던 참이라, 나는 기쁜 마음으로 퇴원 수속 절차를 밟았다.

    나를 돌봐 주던 간호사는 유독 아쉽다는 듯이 굴었다. 그건 겉으로만 하는 연기가 아니라 진심이었다. 나는 그걸 안다. 왜냐하면 그녀는 자일스가 병문안을 올 때마다 그를 열심히 힐끗거리고는 했으니까.

    나는 마지막 인사를 뒤로하고 병원을 나섰다. 입스윈을 떠날 작정으로 입었던 옷차림도, 얼마 되지 않는 짐이 든 가방도 그대로 든 채로.

    결국은 모든 것이 원점으로 돌아왔다.

    내가 살던 연립 주택은 아직 비어 있었다. 나는 굳이 새로운 곳을 찾지 않았다. 익숙한 건물로 향하는 기분은 썩 나쁘지만은 않았다. 보금자리로 돌아온 듯한 기분이 들어서였다. 이제 이곳은 앨버트도, 그 누구도 간섭하지 않는 나만의 보금자리였다.

    열쇠로 문을 따고 텅 비어 버린 집 안에 들어온 나는 가방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내 할 일을 했다. 짐을 풀고, 옷가지를 옷걸이에 걸고, 며칠 비웠다고 그새 먼지가 쌓인 바닥을 걸레질했다.

    집을 돌보고 나니 그새 창밖이 어두워졌다. 나는 간단히 야채 스튜를 만들어 먹었다. 이제 나밖에 남지 않은 좁은 집은 고요했지만 난 그러한 적막이 마음에 들었다. 적막이야말로 가장 아름다운 음악인 법이다.

    그 많은 일들을 겪고 다시 돌아왔으니 마음이 뒤숭숭할 것 같았는데, 생각 외로 전혀 그렇지가 않았다. 나는 멀쩡했다. 정말이지 아무렇지도 않았다. 슬프지도, 외롭지도 않았지만 그렇다고 딱히 기분이 좋은 것도 아니었다.

    나를 둘러싼 모든 것들이 평범한 일상의 모습 그대로를 유지하고 있어서, 하마터면 정말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고 착각할 뻔했다.

    내 착각은 가방에 들어 있던 드레스를 꺼내는 순간 깨져 버렸다. 진주 빛 드레스는 내 모든 기억들을 일깨워 주었다. 타국으로 향하는 호화로운 기차, 그 많던 승객들, 앨버트의 죽음…… 그리고 자일스 헤센. 이 드레스도 자일스가 내게 선물한 것이다.

    내가 드레스를 입고 나타났을 때 자일스가 지었던 표정이 눈앞에 그려졌다. 나란히 뜬 두 개의 달을 목격한 사람마냥 얼어붙었던 그는 곧 첫사랑을 마주한 소년처럼 얼굴을 붉혔다. 그러곤 지극히도 평범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어디에서나 흔하게 볼 수 있을 법한, 사랑에 빠진 얼굴.

    난 정말 큰 착각을 하고 있었다. 자일스는 나를 한 번도 증오한 적이 없었다. 그의 얼굴을 보고 다시 한번 알았다. 나를 증오했던 사람이라면 절대로 그런 얼굴을 보여 줄 수 없는 법이다.

    증오는 퇴색되어 흐려질망정 절대 사라지지 않는 잉크와도 같다. 한 방울이라도 물들면 다시는 정결한 빛깔을 되찾지 못한다.

    다른 사람을 사랑할 일은 없을 거라고 믿었던 나는 그 순간 잠시나마 흔들리고 말았을지도 모른다. 그는 내 손에 든 오묘한 진주색 드레스의 빛깔보다도 더욱 내 눈을 사로잡았다. 비록 찰나일 뿐이었지만…… 아직도 나는 그 순간을 잊지 못했다.

    나는 사랑을 믿지 않았다. 지금껏 내가 경험했던 사랑이라는 감정은 전부 착각에 불과했고, 언제나 나를 배신하고는 했다.

    다른 사람을 사랑하게 된다는 건 결국 나를 연약하게 만들고, 타인에게 내 약점을 드러내게 만들 뿐이다. 내 안의 가장 깊숙한 곳에 자리한 감정을 보여 주려면 그만큼 나라는 문을 활짝 열어젖혀야만 하는 법이니까.

    그래서 나는 더더욱 사랑을 멀리하리라 결심했었다. 상처를 받느니 다른 사람을 사랑하지도, 사랑받지도 않는 편이 나았다.

    내가 가장 우선하는 건 다른 무엇도 아닌 나 자신이었다. 내가 상처 받는 일은 절대 용납할 수 없었다. 차라리 아무도 찾지 않는 가시덤불이 되는 편이 훨씬 나으리라 여겼다.

    하지만 한때 내가 증오해야 마땅하다고 여겼던 바로 그 남자의 눈빛 속에서 가장 멀리하고 싶었던 감정을 목격한 순간…… 나는 더 이상 확신할 수가 없어졌다.

    얼어붙은 땅 위에서 혹한을 견디며 걷다가 갑자기 온기로 가득한 집에 초대받은 사람처럼, 나는 망설이고 있었다.

    그곳에 한 번 발을 들이면 다시는 바깥으로 나올 수 없겠지. 한 번이라도 따뜻한 안락함에 몸을 담그면 매서운 동토의 땅이 얼마나 견디기 힘든 것이었는지 알게 되는 법이니까. 그래서 뿌리쳐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나는 그 손을 잡고 싶어졌다.

    최악의 악몽이 달콤한 꿈으로 바뀌어 나로 하여금 제 안에 한 번 더 뛰어들기를 종용하고 있었다.

    나는…… 모르겠다. 어떻게 해야 할지…… 나에겐 이미 사람으로부터 받은 상처가 너무 많다. 나를 둘러싼 충동이 그중 하나로 되돌아올까 봐 두렵지 않다고 말한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그를 믿어도 될까.

    깊이를 알 수 없는 아름다운 바다를 향해 몸을 던져도 될까.

    나는 드레스를 조심스레 개어 놓았다. 내가 보기에도 정말 아름다운 빛깔이었다. 백작 영애 흉내를 내던 시절 입었던 수많은 드레스보다도 더 그랬다. 장식이나 프릴 하나 붙어 있지 않았지만 그 점이 오히려 마음에 들었다.

    불빛을 어둡게 조절하고 침대에 누우니 기차에서 그와 함께 지냈던 단 하룻밤이 떠올랐다. 나는 그가 건넸던 말을 입 속으로 되새겨 보았다. 잘 자, 안나 키팅.

    ‘오늘은 악몽이 널 비껴가길 바란다.’

    그러자 마치 마법처럼, 나는 밀물처럼 밀려드는 잠 속에 빠져들었다. 악몽도, 좋은 꿈도 없는 편안한 적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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