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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을 사랑한 건 살아남기 위해서였다-39화 (39/93)
  • <39화>

    나는 체면도 잊고 주변을 정신없이 구경하기 바빴다. 마치 유원지에 처음 방문한 아이처럼 말이다.

    “원래는 벨담 사람들이 다니던 거리야.”

    자일스가 내게 넌지시 말했다.

    “이 거리를 이루는 모든 것이 그들을 위해 만들어졌지. 해가 지면 더 볼만해져. 조명을 화려하게 깔아 놨거든.”

    “오늘 못 본다는 게 아쉽네. 당신도 이 거리를 걷곤 했어?”

    “이런 곳이 있다는 것만 아는 정도였어.”

    “그런데 드레스를 여기서 골라야 한다는 건 어떻게 알아?”

    자일스는 미소로 대답을 무마했다. 나는 굳이 더 묻지 않았다. 그의 기분을 망치고 싶은 생각은 없었으니까. 그는 가족과 친구들을 전부 잃었다. 아마 예전 기억은 떠올리고 싶지도 않을 것이다.

    그는 과거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이었다. 적어도 내가 느끼기에는 그랬다. 미래를 위해 앞으로 나아가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정반대다. 자일스는 과거에서 한 발짝이라도 멀어지기 위해 미래로 서둘러 향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여기야.”

    자일스는 어느 살롱 앞에서 멈췄다. 내가 보기에도 부자들이나 들락거렸을 법한 분위기가 풍겼다. 그가 문을 열어 주었다. 안으로 들어서자 화려한 샹들리에가 먼저 내 눈길을 끌었다. 미처 다른 곳으로 눈을 돌리기도 전에, 누군가 우리 쪽으로 다가왔다.

    “어서 오세요, 아가씨. 무엇을 도와드리면 될까요?”

    붉은 립스틱이 잘 어울리는 여자가 활짝 미소를 지으며 나를 맞았다. 그녀의 눈길이 내 뒤를 따라 들어온 자일스에게로 옮겨 갔다.

    “아, 일행 분이 있으셨군요. 혹시…….”

    그의 얼굴을 알아보자마자 여자의 얼굴이 굳었다. 그녀는 제 눈을 믿을 수 없다는 듯 자일스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천천히 그에게로 다가갔다.

    “혹시…….”

    “오랜만입니다, 마담 멘델.”

    자일스는 여자의 손등을 잡고 짧게 입을 맞추었다. 그러자 그녀의 눈이 더욱 커졌다. 헉 하고 숨을 들이쉰 멘델 부인이 그의 이름을 외쳤다.

    “자일스!”

    “너무 놀라실 필요 없습니다.”

    “어떻게 그러지 않을 수 있겠니? 난…….”

    그녀가 황급히 목소리를 낮추었다.

    “난 네가 잘못된 줄 알았어. 그게, 그러니까 그동안 큰일이 있었잖니. 어떻게…… 정말 살아 있었구나.”

    멘델 부인은 자일스를 터뜨릴 기세로 끌어안았다. 감동의 재회를 지켜보던 나는 결국 궁금증을 참지 못했다.

    “아는 사이예요?”

    “난 자일스가 어린아이였을 적부터 봐 왔어요! 세월도 참 빠르죠. 그렇게 작고 귀엽던 애가 이렇게 어엿한 남자가 되어 버렸으니. 다시는 자일스를 보지 못할 줄 알았어요. 정말이지…….”

    뭔가 기억해 낸 멘델 부인이 상기된 목소리로 물었다.

    “그러고 보니 네 누이는? 셀레스트 말이야! 그 애도 잘 있지? 셀레스트가 가끔씩 드레스를 맞추러 오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자일스는 셀레스트의 호위 기사처럼 항상 옆에서 보좌하곤 했답니다. 정말 착한 아이였는데. 네가 잘 살아 있는 걸 보니 분명 그 애도 무사하겠구나.”

    자일스는 애써 가짜 웃음을 지으며 거짓말을 꾸며 냈다.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정말 잘된 일이야, 정말 잘되었어. 비록 저 벨담에서 왔다고는 하지만 나는 이 남매를 무척 아꼈어요. 아직도 아이 때 모습이 눈앞에 선연한데 어떻게 미워할 수가 있겠어요? 아무튼, 오늘도 드레스를 맞추러 온 거지?”

    “곧 연회가 있습니다. 제 파트너가 입을 옷이 필요합니다.”

    “내가 다 알아서 해 줄게. 걱정 말고 기다리고 있어. 자, 아가씨. 이쪽으로 오세요.”

    멘델 부인이 나를 안쪽으로 이끌었다. 나는 그녀의 가이드를 따라 드레스를 한 벌씩 입어 보았다.

    같은 드레스라고는 해도, 내가 비스마르 백작 영애일 적에 입었던 것과는 사뭇 달랐다. 벨담식의 화려한 드레스가 아닌 간소하고 심플한 이브닝드레스가 주를 이뤘다.

    옷을 고르면서, 나는 멘델 부인에게 틈틈이 질문을 했다.

    “자일스가 어릴 때 이곳에 자주 왔었나요?”

    “때때로 오는 편이었죠. 아주 어릴 땐 어머니를 따라서 오는 편이었고, 좀 커서는 누이와 함께 오더군요. 아무튼 가족에 대한 애정이 유별났던 애였어요.”

    “어렸을 땐 어떤 사람이었나요? 자일스 말이에요. 제 말은, 그러니까, 그는 어린 시절에 대해 별말을 하지 않거든요.”

    “어린애들이 다 거기서 거기죠, 뭐. 가끔씩은 떼를 쓰고, 그러다 혼이 나기도 하고…… 자일스가 한 소리 듣고 훌쩍일 때면 몰래 사탕 한 개를 쥐여 주곤 했답니다. 그럼 금세 눈물을 그치고 착한 아이처럼 굴곤 했죠.”

    멘델 부인은 좋은 시절을 회상하듯 미소를 지었다. 자일스에게도 그런 시절이 있었다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지만 머릿속에 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나는 자일스 쪽을 힐끔거렸다. 그가 등을 보이고 있어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여전히 뒷모습만으로도 무거운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그럼…… 셀레스트라는 사람은요? 자일스의 누이라는 건 들었지만…….”

    “한 번도 만나 본 적이 없었나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자일스에게 누나가 있었다는 사실조차 방금 처음 들은 참이니까.

    “착하고 여린 소녀였죠. 마지막으로 본 지도 오랜 세월이 지난지라 선명하게 기억나지는 않지만…… 햇살처럼 긍정적인 기운을 주변에 흩뿌리고 다니던 애라는 건 기억나네요. 자일스는 그런 누이를 진심으로 따랐어요. 무엇보다 셀레스트가 자일스를 많이 챙겼죠. 아마 지금도 그 우애는 변하지 않았을 거예요.”

    나는 고개만 끄덕였다. 얼굴도 본 적 없는 소녀와 어린 자일스가 함께 대화를 나누며 어울리는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자일스의 누이는 그와 딴판으로 생겼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래도 자일스는 멘델 부인의 묘사와는 정반대인 인상을 갖고 있었으니까.

    혹은…… 그가 견뎌 내야만 했던 일들이 자일스를 그렇게 만들어 버린 것인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혁명이 일어나기 전의 자일스가 어떤 모습이었는지는 영원히 알 수 없을 것이다.

    “자일스의 파트너라고 하셨죠?”

    “파트너 자격으로 참석하는 거예요.”

    “실제로 사귀는 사이는 아니고요?”

    나는 손을 내저었다.

    “우린 아무 사이도 아니에요.”

    “설마, 아무 사이도 아닌 남녀가 파티에 함께 참석하는 일은 드물어요. 뭔가 있겠죠. 적어도 자일스는 당신을 아무 사이도 아닌 여자로 보지는 않는 것 같던데요.”

    멘델 부인은 내게 새 드레스를 가져다주며 빙긋 웃었다.

    “뭐, 보면 알겠죠.”

    몇 벌을 거친 끝에 멘델 부인은 나를 위한 마지막 드레스를 골랐다. 어깨를 드러내 그 주변으로 얇은 숄을 두른 듯한 디자인으로, 발목이 살짝 드러나 보이는 진주 빛 이브닝드레스였다.

    멘델 부인은 아주 만족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더니 내 등을 떠밀었다.

    “가서 보여 줘요. 파트너도 당신 모습을 봐야죠.”

    나는 멘델 부인에게 이끌려 앞으로 나갔다. 자일스는 의자에 앉아 손깍지를 낀 채 생각에 잠겨 있었다. 내가 다가서자 그의 시선이 옮겨 왔다.

    나는 어색한 동작으로 치맛자락을 만지작거리다 어깨를 으쓱였다.

    “어때? 멘델 부인은 이게 제일 낫다는데.”

    그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저 말하는 법을 잊은 사람처럼, 아무 말도 않고 내 얼굴만 쳐다볼 뿐이었다. 무안해진 나는 안으로 다시 들어가려 했다.

    “다른 거 입어 보고 올게.”

    “아니야. 그럴 필요 없어.”

    자일스는 뒤늦게 일어나 내 손을 붙잡았다. 얼마간 나를 보며 머뭇거리던 그가 이내 칭찬을 건넸다.

    “예쁘다.”

    그렇게 말하는 자일스의 얼굴은, 내가 한 번도 보지 못했던 광채를 띠고 있었다.

    아주 잠깐 동안이었지만, 나는 행복했을 시절의 그를 조금이나마 상상할 수 있었다.

    *

    입스윈의 수도 언저리에 자리한 커다란 광장은 시민들에게 많은 문화적 혜택을 주고는 했다.

    광장을 중심으로 시가지와 공원이 뻗어 있는 것은 물론, 축제가 있을 때마다 모든 주요 행사가 바로 이 광장에서 열렸다. 사람들은 이 광장을 메이나드 광장이라고 불렀다. 역사의 흐름에 따라 몇 번씩 바뀐 끝에 정착한 이름이었다.

    그리고 이 메이나드 광장을 정면으로 바라보는 커다란 건물이 있다. 어떻게 보면 궁전 같기도, 또 어떻게 보면 커다란 학교나 청사 같기도 한 이 웅장한 직사각형 건물은 시대가 바뀜에 따라 쓰임새 또한 변해 왔다.

    처음에 이 건물이 지어진 건 왕정이 위세를 누리던 시절이었다. 그때 이곳은 나라를 대표하는 무역 업체 건물로 쓰였다. 왕정의 기반이 흔들리고 벨담의 지배를 받게 되면서부터, 이 건물은 벨담인들의 손아귀에 들어갔다.

    지배의 근간을 확고히 하기 위해 그들은 이곳을 비밀경찰 본부로 사용했다. 표면적으로 드러난 4층 건물만 봐서는 평범한 보안국 건물처럼 보이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공개되지 않는 지하층에는 끔찍한 감옥과 고문실이 숨겨져 있었다.

    사람들도 이 건물이 풍기는 공포스러운 존재감을 느꼈다. 벨담 비밀경찰들이 들락거리던 시절, 이곳 주변은 이례적으로 인파가 적은 곳으로 변모했다.

    메이나드 광장마저도 마찬가지였다. 안 그래도 불길한 분위기를 자랑하는 건물은 더욱 을씨년스럽게 변했다.

    영원할 것만 같던 벨담인들의 지배도 물러간 지금. 이 건물은 현재 혁명군의 본부로 쓰이고 있다. 옛 왕족들의 취향에 맞추어 고풍스러우면서도 절제된 양식으로 지은 아름다운 건물 지하에 숨겨진 음침한 복도에 군홧발 소리가 울렸다.

    본부에 들락거리는 게 한두 번 있는 일도 아니건만, 창백한 불빛만 깜박거리는 지하층은 여전히 꺼림칙했다. 그래도 나름 우호적인 분위기를 유지하고 있는 지상층과는 달리 이곳은 본색을 드러내는 지점 그 자체이다.

    지하 1층은 사무실과 취조실이 자리하는 층이다. 자일스에겐 이곳에서 만나야 할 인물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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