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화>
“그때까지 꼭 나으셔서 참석해 주시면 기쁠 것 같군요.”
“노력해 볼게요.”
“다시 한번 만나서 반가웠습니다.”
그는 군모를 가슴 위에 댄 채 살짝 목례를 해 보였다. 나는 해링턴이 멀어지는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곧 문이 닫혔다. 이제야 혼자가 된 나는 긴장을 풀고 숨을 탁 내려놓았다.
다행히 그는 나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것 같았다. 장군씩이나 되는 사람이 모를 정도라면 이제 입스윈 전역에 내 정체를 아는 사람은 한 명도 없을 거라 생각해도 될 것이다.
단, 자일스를 제외한다면. 이제 그만이 내 혈통에 대해 아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예전에는 그 사실이 내 숨통을 조여 왔다. 그러나 자일스는 내 혈통 따위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가 관심 있어 하는 건 오직 내 안전뿐이었다.
그는 내게서 무엇을 찾고 있는 것일까.
‘안나.’ 그의 목소리가 귓가에 들리는 듯했다. 한 때 내 악몽의 근원이었던 남자. 자일스 헤센. 아직도 그에 대한 내 감정은 불분명하다. 그가 자꾸만 내 마음을 어지럽게 했다.
나는 당신에게 아무것도 줄 게 없는데. 당신이 내게 하는 것만큼 똑같이 돌려줄 수가 없다. 왜냐하면 나는 그럴 방법도 모르고, 당신에 대한 내 감정조차 확실히 알지 못하기에.
나는 그와의 관계를 어떻게 재정립해야 할까.
그가 사 온 게 분명한 포도가 눈에 들어왔다. 나는 팔을 뻗어 접시를 가져왔다. 포도 알을 따서 물끄러미 바라보던 나는 곧 그것을 입 속에 넣었다.
자일스가 내게 주고 싶어 했던 과일은 달았다.
내가 먹어 본 것들 중에 제일 달콤했다.
“안나.”
익숙한 목소리에 눈을 떴다. 자일스가 머리맡에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잠깐 잠든 사이 몇 시간이나 지난 걸까? 눈앞이 환한 걸 보니 아직 해가 지지는 않은 것 같았다.
나는 눈을 비비며 물었다.
“지금 몇 시야?”
“오후 네 시 정도.”
“내가 그렇게나 많이 잤단 말이야?”
“환자는 원래 숙면을 취해야 해.”
나는 몸을 일으켜 앉았다. 잠이 덜 깬 탓에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내 고개가 자연히 자일스 쪽으로 돌아갔다. 별 이유는 없었다. 가장 가까이 있는 게 자일스였으니까 쳐다본 것뿐이다.
내가 많은 사람들을 만나 본 건 아니지만, 지금 이렇게 다시 보니 자일스는 확실히 미남이었다.
그는 날렵하면서도 심지가 굳은 인상을 지니고 있었다. 내가 이런 생각을 하는 이유는 간호사들이 자일스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들었기 때문이다.
간호사들의 눈에 뭐가 씌었다고 생각했는데, 그는 객관적으로 그런 소리를 들을 만했다. 그건 인정한다.
“여기 근무하는 간호사들 잘 알아?”
“아니.”
“널 좋아하던데. 특히 빨간 머리를 가진 분이 말이야.”
자일스는 미간을 좁혔다. 그는 내가 왜 이런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그런가?”
“처음 보자마자 반했대. 당신 매력이 그 깊은 눈동자랑 꾹 다문 입매래. 아무래도 당신에게 곧 저녁 일정을 물을지도 몰라.”
나는 말하면서도 킥킥 웃었다. 하지만 자일스는 눈에 띄게 당황하지도, 얼굴을 붉히지도 않았다. 그는 마치 그런 소리를 듣는 게 아주 익숙하다는 듯 굴었다. 흥미를 잃은 나는 얼굴에서 웃음기를 싹 지웠다.
“그래도 거울은 보고 산다 이거야?”
“갑자기 왜 그래, 안나?”
“몰라. 그냥 잠이 덜 깨서 그래. 게다가 당신 앞에 있으면 무슨 말이든 해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든단 말이야. 간호사 얘기는 잊어. 원한다면 그분 이름 정도는 알려줄 수 있지만.”
“관심 없어.”
그가 단호하게 선을 그었다. 우리 사이에 잠시 침묵이 감돌았다.
침묵을 먼저 깬 건 자일스였다.
“너도 그렇게 생각해?”
“뭐가?”
“……아니야, 됐다.”
입을 가리고 하품을 하느라 잘 못 봤는데, 자일스의 낯빛이 약간 상기되어 있었다. 그는 테이블에 놓인 초대장을 집어 들었다.
“이건 뭐야?”
“당신 상관이 주고 갔어. 나더러 참석하라던데.”
“다른 말은 없었고?”
“몇 가지 묻기는 했는데…… 별말은 안 했어. 당신도 알다시피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거의 없으니까.”
자일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내 말뜻을 알아먹은 것 같았다.
“참석할 생각 있어?”
“나한테 결정권이 있기는 한 거야?”
“내키지 않으면 내가 대신 전달해 줄 수 있어. 그들도 강요하지는 않을 거야.”
“됐어. 그렇게 할 것까지야 있겠어? 그냥 파티일 뿐이잖아. 대충 얼굴만 비치고 오지, 뭐.”
나는 돌연 목소리를 낮추곤 속삭였다.
“내 진짜 이름에 대해 아는 사람 없는 거 맞지?”
“공식적으로 사망 처리된 지 오랜 시간이 흘렀어. 걱정하지 마.”
“그러고 보니 내가 꿈을 꿨는데…….”
꿈이 아니라 진짜 있었던 일일지도 모르겠다. 분명 그건 기차 안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앨버트가 나에 대해 말하려 하더라고.”
“영원히 입 막아 뒀어. 괜찮아.”
“괜찮은 거야? 그 사람, 원래 죽이면 안 되었던 사람 같던데.”
“내가 책임질 수 있어.”
나는 잠시 떠오른 걱정을 오래 붙잡아 두지 않았다. 어차피 나랑은 관련 없는 일일 테니까. 맞은편 벽을 멍하니 바라보던 내 입에서 생각을 거치지 않은 말이 튀어나왔다.
“당신이랑 이런 대화를 하고 있다는 게 믿기지가 않아.”
이젠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볼 수 있다는 것도 그랬다. 온갖 두려움과 망상의 힘을 입어 크기를 불렸던 악몽은 완전히 쪼그라들어 버렸다.
나는 변명하듯 말을 이었다.
“그땐 그럴 수밖에 없었어. 난 궁지에 몰려 있었으니까. 어떤 상황에서든 항상 최악을 생각하고 살 수밖에 없던 때였어. 특히나 당신은 혁명군이었고, 난…….”
귀족이었으니까. 그런 말을 하려던 그때, 자일스가 내 오른손 위에 제 손을 올려놓았다.
“괜찮아. 다 지난 일이야.”
“당신을 두려워할 수밖에 없었어. 그 점은 당신도 이해해야만 해.”
“안나, 괜찮아.”
나는 입을 다물었다. 그리곤 간신히 고개를 끄덕였다. 내 말은 틀리지 않았다. 나는 분명히 그를 오해했지만, 그건 내 의지가 아니었다. 내가 살아온 삶이 나를 그렇게 만들었다.
사랑과 온기…… 한때 그것들을 좇았던 때도 있었다. 하지만 결국은 나를 둘러싼 모든 것들이 내게 약삭빠르고 교활할 것을 요구했다. 나에게 가장 중요했던 능력은 언제나 상대방이 나를 해칠 가능성이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는 것이었다.
가끔은 그런 습관이 나를 괴롭게 만들었다. 지금도 그랬다. 자일스가 내게 보인 호의와 진심에도 불구하고 나는 마음의 문을 완전히 열지 못했다. 그 어떤 사람 앞에서든 나는 항상 긴장을 유지했고, 그 습관이 나를 지치게 만들었다.
“그래도 내 목숨을 구해 줘서 고마워.”
이게 내가 표현할 수 있는 가장 최선의 말이다. 그는 나를 구했고, 나는 그 사실이 고마웠다. 그러니 이 말만은 자신 있게 건넬 수 있었다.
자일스는 옅은 미소로 화답했다. 그가 내게 물어 왔다.
“안나, 바깥에 좀 나갔다 올까?”
“왜? 산책하게?”
“산책도 산책이지만…… 연회에 가려면 준비를 해야 하니까.”
“무슨 준비?”
나는 그렇게 물으면서도 자일스가 무슨 말을 하고 싶어 하는지 바로 깨달았다. 아, 그렇지. 높으신 분들이 참석하는 연회였지. 그런 곳에 그냥 평범한 차림으로 입장할 수는 없는 일이리라.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 내게 손을 내밀었다.
“가자, 드레스 고르러.”
외출을 하기 전, 의사가 나를 진찰하러 왔다. 내가 외출을 다녀올 만큼 회복이 되었는지 확인해야 한다는 이유에서였다. 차트를 보고, 몇 가지 검사를 마친 끝에 그에게서 허락이 떨어졌다.
“해가 지기 전에는 돌아오셔야 합니다. 봄철이지만 아직 저녁 공기는 쌀쌀해요. 환자에게 나쁜 영향을 미칠 수도 있습니다.”
자일스는 의사를 향해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내 옷은 옷장 안에 고이 모셔져 있었다. 블라우스와 스커트, 그리고 얇은 코트까지…… 옷을 만지작거리던 나는 곧 하나가 없어졌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내 머릿속을 읽은 것인지, 미처 묻기도 전에 자일스가 먼저 선수를 쳤다.
“돌려줬으면 좋겠어?”
나는 고개를 저었다.
“당분간은 필요 없어.”
이제 그런 물건은 쓸모가 없다. 사실 나는 총을 다루는 법조차 제대로 몰랐다. 방아쇠를 당겨야 한다는 건 알지만, 딱 거기까지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젠 죽이고 싶은 사람이 없었다.
나는 칸막이 안에서 옷을 갈아입고 나왔다. 자일스가 멀찍이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처음 만났을 적과 똑같은 짙은 색의 군복을 입고서, 흐트러짐 한 점 없는 모습으로. 옷매무새에 구김 하나 없었고, 새까만 머리카락은 이마를 드러낸 채 잘 정돈되어 있었다.
다만 그때와 달라진 점이 있다면 나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일 것이다. 공허하고 텅 비어서 마치 심연을 들여다보는 것처럼 오싹한 기분이 들게 하던 그의 눈동자에는 이제 사뭇 다른 색채가 감돌고 있다.
적어도 나는 그의 눈을 들여다보고 그가 가지는 감정을 읽어 낼 수 있었다. 내가 이렇게 그의 손을 잡을 수 있는 건 그 때문이었다. 자일스는 이제 원할 때면 펼쳐서 읽을 수 있는 책이었다.
우리는 함께 병원 밖을 나섰다. 그리고 입스윈의 시내를 걸었다. 그는 나를 가장 번화한 거리로 데리고 갔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나는 이런 곳을 속 편하게 걷는 게 처음이었다. 기차를 타기 전만 해도 그의 눈에 띌까 봐 노심초사하며 시장이나 겨우 갔다 오던 게 전부였으니까.
내 눈에는 모든 것이 신기해 보였다. 질 좋은 물건들을 전시해 놓은 화려한 쇼윈도도, 매끈하게 다듬은 돌을 질서 정연하게 배열해 공사한 바닥도, 처음부터 이런 풍경의 일부였다는 듯 자연스레 내 눈앞을 지나는 사람들도 전부 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