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화>
자일스는 남자에게 경례를 올려붙였다.
“해링턴 장군님.”
“자일스, 여기 있었군.”
“이곳엔 어쩐 일이십니까.”
“우리의 자랑스런 피아니스트 아가씨를 보러 왔지.”
해링턴이 내게 다가왔다. 나는 어쩐지 격식을 갖춰야만 할 것 같은 느낌에 몸을 일으키려 했다. 그러나 해링턴은 나를 만류했다.
“누워 있으십시오. 환자는 안정을 취해야지. 몸은 좀 나아지셨습니까?”
“덕분에요.”
“그래야 마땅하지요. 의료진이 아가씨를 치료하는 동안 자일스가 밖에서 얼마나 감시를 해 댔는지, 절대로 허투루 하지는 못했을 겁니다.”
해링턴이 호탕한 웃음을 터뜨렸다. 반면 자일스는 곤란한 기색이었다. 해링턴은 그에게 손짓해 보였다.
“자네는 그만 가 봐도 좋네.”
“키팅 양은…….”
“오래 귀찮게 하지는 않을 테니 걱정 말게. 몇 마디만 나누고 바로 갈 거야. 나도 바쁜 몸인 거 모르나?”
“……알겠습니다.”
자일스는 예를 갖춘 후 몸을 돌려 병실을 나갔다. 복도를 울리는 그의 발소리가 점점 멀어졌다. 해링턴 장군은 자일스가 앉았던 바로 그 의자에 앉아 나를 내려다보았다.
“저 녀석이 누군가를 그렇게 애지중지 대하는 건 처음 봤습니다. 바람직한 일이죠. 사랑하는 사람을 가진다는 건 말입니다.”
“저흰 그런 사이 아니에요.”
“알겠습니다. 일단은 모른 척 입 다물고 있도록 하지요.”
나는 변명하는 것처럼 보이고 싶지 않아서 말을 말았다. 장군이라 불린 걸 보아 하니 이 남자가 혁명군의 지휘관이라도 되는 모양이었다. 이런 높으신 분이 나를 왜 보고자 했는지 의문이었다.
“포도가 꽤 실하군요. 자일스가 가져온 겁니까?”
“그런가 봐요.”
“값을 꽤 치러야 했을 텐데. 지극정성이군요.”
해링턴은 내가 뭐라고 하든지 간에 우리 둘을 연인 사이로 생각하기로 결심한 것 같았다.
머지않아 그가 본론을 꺼냈다.
“다름이 아니라 키팅 양을 만나고자 한 이유는 몇 가지 묻고 싶은 게 있어서 그렇습니다.”
나는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긴장한 것처럼 보이지 않으려고 살짝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내게 뭘 물으려는 걸까? 그가 자일스를 물렸다는 게 신경 쓰였다.
자일스가 아닌 다른 혁명군 간부를 마주하자 내가 갖고 있는 비밀이 다시금 기억의 수면 위로 떠올랐다.
나는 스스로에게 되뇌었다. 넌 결백해. 넌 잘못한 게 아무것도 없어. 그러니까 긴장할 필요 없어, 안나.
해링턴이 질문을 시작했다.
“자일스를 도와 기차를 멈추는 데에 큰 도움을 주셨다고 알고 있습니다. 만약 키팅 양의 연주가 아니었다면 현재 우리가 처한 상황이 아주 달라졌을 수도 있었겠죠. 정말 영웅적인 일을 해 주셨습니다.”
“감사해요.”
“저희가 본래 바랐던 것은 알베르트 레만의 생포였습니다만…… 상황이 따라 주지 않았던 탓인지 그리 되지는 못했더군요. 아무튼, 그건 키팅 양과는 관련 없는 얘기니까요. 제가 묻고 싶은 말은…….”
나는 마른침을 삼키고 싶은 것을 꾹 참았다.
“알베르트 레만과는 언제부터 접선하신 겁니까? 아무래도 자일스가 키팅 양께 지시를 내린 것 같기는 한데…… 제게는 아무런 언질도 없었거든요. 자일스가 제 독단으로 일을 진행하는 건 흔치 않은 일인데 말입니다. 처음부터 레만과 기차에 대해 알고 계셨던 겁니까?”
생각보다 답하기 곤란한 질문이 들어왔다. 뭐라고 대답해야 하지? 진실을 말해야 하나? 해링턴은 내가 자일스의 비밀 요원이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사실은 그게 아니지 않은가.
앨버트는 한때 내 동료였고, 내가 믿었던 사람이었으며, 나는 자일스를 끌어들이기 위한 미끼였다. 나 또한 자일스를 제거하려던 세력의 일원이었고.
하지만 진실을 털어놓아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진실은 내게 독이 될 것이다. 하지만 찰나의 시간 안에 그럴듯한 이야기를 꾸며 낼 자신은 없었다.
나는 곤란한 표정을 지어내며 얼버무렸다.
“자일스가 아무에게도 발설하지 말라고 했어요.”
“저는 자일스의 상관입니다. 자일스가 그리 말한 건 외부인에게 발설하지 말라는 뜻이었을 겁니다.”
“그래도 제 마음대로 말해도 될지 모르겠어요.”
내가 멋대로 이야기를 지어냈다가 자일스와 말이 어긋나기라도 하면 큰일이었다. 답변을 최대한 피해야 했다.
“그 녀석이 단단히 일러둔 게 분명하군요.”
“자일스가 화를 낼까 봐 무서워요.”
다행히 나는 불쌍한 여자 연기를 하는 데에는 일가견이 있었다. 이걸로 살아남은 적도 있을 정도다.
“그는 시키지도 않은 일을 벌려 놓으면 기분 상해 하거든요. 저번에도 제 마음대로 그런 적이 있었는데…… 다시는 자일스를 화나게 하고 싶지 않아요. 기분을 풀어 주느라 정말 힘들었거든요.”
내가 울먹거리자 결국 해링턴은 두 손을 들었다.
“알겠습니다. 너무 부담 갖진 마시죠. 뭐, 이런 이야기는 자일스와 직접 나눠도 되는 거니까요. 생각해 보니 제가 경솔했던 것 같습니다.”
나는 고개를 열심히 끄덕거리며 눈물을 훔쳤다. 남자들은 힘없고 처연한 여자에게선 아무 이야기도 듣고 싶어 하지 않는 경향이 있었다. 눈물을 보이기만 하면 그들은 의지를 잃어버린다. 나는 그런 경향을 잘 써먹을 수 있게 되었다.
“그나저나 자일스가 험하게 굴 때가 있었습니까?”
“마음 쓰실 일은 아니었어요. 그에게 뭐라 하지는 말아 주세요.”
“알고 계실지 모르겠지만 그 녀석이 지주 혈통을 타고나서 제멋대로 휘두르려 하는 본성이 튀어나올지도 모릅니다. 그 점은 이해하십시오. 몸속에 흐르는 피를 어찌 하겠습니까? 그래도 좋은 녀석입니다. 자랑스런 혁명 영웅이죠. 혹시라도 그와 미래를 생각하고 계신다면…….”
해링턴이 한쪽 눈을 찡긋거렸다. 나는 대충 웃기만 했다. 그는 우리 사이를 단단히 착각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나는 자일스뿐만 아니라 그 누구와도 미래를 그리지 않는다.
그런 것들은 이미 몇 년 전에 내 마음속에서 죽어 버렸다.
사랑, 믿음, 결혼…… 한 사람과 평생을 약속한다는 것. 나는 그러한 개념들을 도저히 상상할 수가 없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서로를 보이지 않는 끈으로 묶어서 평생 매여 살기를 자처할 정도로 신뢰하게 된다는 것은, 과연 어떤 기분일까?
“저는 키팅 양이 계셔서 안심입니다.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자일스는 세상에 그 어떤 좋은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처럼 굴었거든요. 직접적으로 표현한 적은 없습니다만, 얼굴을 보면 알죠. 원하는 것도 없고, 그저 시키는 일만 기계적으로 할 뿐이고…… 어느 날 갑자기 목이라도 매달까 봐 무서울 지경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자일스에겐 키팅 양이 있는 것 같더군요. 그 녀석에게 잘해 주세요. 자일스가 누군가를 그토록 애정을 갖고 대하는 건 처음 봅니다. 어쩌면 키팅 양 덕에 다시 살아갈 힘을 얻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나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이미 자일스가 나를 각별히 생각한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는 내 목숨을 두 번이나 구했다. 벨담 요원들에게 생포당할 위험을 감수하고 국경을 넘어가는 기차에 오르기까지 했다.
처음에는 그에게 불순한 목적이 있을 거라 생각했다. 도망친 후로부턴, 그가 내 도주를 빌미로 앙갚음을 하려 한다고 여겼다. 하지만 내 생각은 전부 틀렸다. 지금은 그 사실을 안다. 자일스는 처음부터 내 안위만을 걱정했을 뿐이라는 걸.
하지만 난 자일스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확신할 수 없었다. 그의 애정은 남달랐다. 나는 그 흔한 부모의 사랑조차 받아 본 적 없는 사람이다. 누군가 이런 감정을 표현할 때 나는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몰랐다.
나는 자일스를 사랑하나? 솔직히 말하자면 아직 잘 모르겠다. 확실히 그가 더 이상 두렵지는 않았지만, 딱히 그가 잘못될까 걱정되지는 않았다. 그의 이름을 떠올려 보아도 심장이 두근거리지는 않았다.
다만 나는 그와 이야기를 더 해 보고 싶었다. 그라는 사람이 누군지 더 깊게 알고 싶었다. 예전과는 다른 의미로 말이다. 이제 그에게서 음습한 속셈을 찾아내려는 생각은 접었다. 내게 남은 건 순수한 궁금증이었다.
그가 나에 대해 알고 있는 만큼, 나도 그에 대해 알고 싶어졌다.
“……자일스가 많이 힘들어했나요?”
“그럴 만한 사건이 있었거든요. 물론 마땅히 해야 할 일이긴 했습니다만…… 충격을 받을 만했죠. 자일스는 제가 아끼는 부하들 중 하나입니다. 제 모든 것을 바쳐 혁명에 투신한 사람 아닙니까. 비록 벨담 출신이기는 하지만, 그걸 잊게 할 만큼 입스윈에 대한 애정이 투철한 놈입니다. 이젠 지도부에서도 자일스의 진정성을 받아들이기 시작했을 겁니다.”
해링턴은 자리에서 일어나 옷매무새를 정돈했다. 아무래도 이만 떠나려는 모양이었다.
“아무쪼록 쾌차하십시오. 안 그럼 애꿎은 간호사들이 시달리게 될 지도 모릅니다.”
“걱정해 주셔서 감사드려요.”
“아, 그러고 보니 깜빡 잊을 뻔했군요. 곧 혁명군 간부들을 위한 연회가 열릴 예정입니다. 그 밖에 명망 높은 입스윈 인사들도 참석할 예정이고 말입니다. 물론 자일스도 함께할 자리이니, 키팅 양이 와 주셨으면 어떨까 싶은데요.”
“제가요?”
“꼭 자일스의 파트너로서가 아니더라도 키팅 양은 충분히 음악계의 신예 유명 인사가 아니십니까? 대단한 피아니스트를 모시게 되는 건 저희로서도 영광일 겁니다.”
그가 초대장을 건넸다. 장소와 날짜 등 중요한 정보만을 기재한 약식 초대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