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화>
6. 봄의 제전
자일스는 안나를 찾아 기차 안을 들쑤시고 돌아다녔다. 모든 객실 문을 열어 보고, 입구가 있는 곳이라면 샅샅이 뒤졌지만 아직까지 안나의 흔적은 찾을 수가 없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그의 심장이 조여 왔다. 왜 그녀가 보이지 않는 거지? 자일스는 시체가 되어 버린 안나의 모습을 상상하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금단 증상이 도진 사람처럼 숨이 가빠지고 손끝이 떨렸다. 그는 빠른 걸음으로 성큼성큼 나아갔다.
그때, 반쯤 기절한 여자를 데리고 탈출을 시도하는 남자가 보였다. 자일스는 권총을 장전했다. 상대편도 마찬가지였다. 자일스는 단박에 상대를 알아보았다. 앨버트 쇼였다.
자일스는 그가 짐짝처럼 붙들고 있는 안나에게 눈길을 주었다. 상태가 좋지 않아 보였다. 무슨 일을 당한 건지는 몰라도 지금 당장 의사에게 진찰을 맡겨야 할 것 같았다.
“안나를 놔줘.”
자일스가 말했다. 앨버트는 자일스에게 총을 겨눈 채로 뒷걸음질을 쳤다. 호기롭게 입스윈에 잠입해 그를 상대로 음모를 꾸민 벨담 요원의 말로가 저 꼴이었다.
“다가오지 마.”
앨버트가 경고했다. 물론 전혀 위협적이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가 총구를 안나의 머리에 들이민 순간부터 이야기가 달라졌다.
“아니면 이 여자는 죽는다!”
“그녀를 죽여 봤자 네게 득 될 건 하나도 없다.”
“어차피 죽은 목숨인데 저승길에 계집년 하나 대동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지.”
등 뒤로 부하들이 뛰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대충 모든 상황이 정리되었다는 뜻이었다. 이제 남은 건 앨버트뿐이다. 앨버트는 그와 대치한 군인들을 경계심 서린 눈길로 쏘아보더니 안나를 붙잡고 지껄이기 시작했다.
“너희들은 내게 불만 따위 없어야 할걸! 난 좋은 일을 하는 거야! 최소한 너희들에겐 그렇겠지. 이 여자가 누군지는 알아?”
궁지에 몰린 그의 얼굴 위에 마지막 희열이 떠올랐다.
그는 자신이 빠진 수렁에 안나를 끌고 들어가고 있었다.
“안나 키팅은 그냥 피아니스트가 아니야! 이 여자는 너희들이 그토록 죽이고 싶어 하는 벨담―”
그러나 앨버트는 말을 끝맺을 수 없었다.
탕! 총소리와 함께 그의 몸이 뒤로 넘어갔다. 자일스는 그와 함께 쓰러진 안나를 서둘러 부축했다.
그는 안나의 안색을 살폈다. 그를 올려다보는 초점이 흐릿했다. 온몸에 열이 나고 이마는 불덩이처럼 뜨거웠다. 심지어 구타를 당한 건지 아물지 못한 상처까지 생겨 있었다.
“의무병도 같이 왔나?”
“바깥에서 대기하고 있습니다.”
자일스는 안나를 품에 안아 들고 다급히 기차를 빠져나갔다. 부하의 말대로 적십자 완장을 찬 군인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자일스는 의무병에게 안나를 넘겼다. 그는 안나를 살피더니 자일스에게 고개를 한 번 끄덕여 보였다.
자일스는 숨을 길게 내려놓았다. 긴장이 탁 풀리는 바람에 순간적으로 몸이 균형을 잃었다. 그는 트럭에 간신히 몸을 지탱했다. 이대로 잠깐 쉴 수 있다면 좋겠지만, 아직 처리해야 할 일들이 남아 있었다.
자일스는 항복을 표하며 기차에서 내리고 있는 승객들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들 중 몇몇은 울고 있었다. 자일스는 지금 여기서 저들을 처형하라는 명령이 하달되지 않았기를 간절히 바랐다.
총소리가 들리면 안나가 혼란스러워할 테니까.
*
나는 바닥에 쓰러져 숨을 고르고 있었다. 내가 곧 죽을 거란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아무도 나를 구하러 올 수 없었고, 내 머리는 금방이라도 터질 것만 같았다. 이대로 온몸이 불타오르게 되는 건 아닌가 생각하던 그때였다.
누군가 내 몸을 억지로 일으켰다. 그가 내 머리 위에 씌워져 있던 봉투를 벗겼다. 나는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눈앞이 밝아지고 정신이 약간 돌아왔다. 하지만 저항하거나 무언가 쓸모 있는 말을 할 상태는 여전히 아니었다.
힘이 들어가지 않는 다리로 끌려가듯 간신히 걷던 나는 어느 순간 멈춰 섰다. 나를 붙들고 있던 남자가 나를 배려하지 않은 까닭에 몸이 크게 휘청거렸다.
나는 군용 코트를 입은 또 다른 남자의 실루엣을 볼 수 있었다. 그의 얼굴을 더 자세히 보고 싶은데 시야가 어지러웠다. 남자가 내 쪽으로 총을 겨누었다. 아니, 날 붙든 남자에게 겨눈 건가?
두 사람이 무어라 말을 하기 시작했다. 난 한 마디도 제대로 알아들을 수 없었다. 간신히 숨만 쉬고 있던 그때, 귓속을 파고든 남자의 말 한마디가 내 정신을 번쩍 들게 했다.
“이 여자는 너희들이 그토록 죽이고 싶어 하는 벨담―”
군용 코트를 입은 남자가 총을 쐈다.
탕!
천둥처럼 머릿속을 울리는 굉음에 놀란 나는 소스라치며 깨어났다. 내 팔에 뭔가가 꽂혀 있었다. 링거였다. 나는 내가 입은 하얀색 병원복과 내 몸을 덮은 하얀색 시트, 그리고 하늘거리며 춤을 추는 얇은 린넨 커튼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반대편으로 고개를 돌리자, 그가 있었다. 자일스 헤센.
다시 익숙한 군복 차림으로 돌아온 그가 물어 왔다.
“몸은 좀 어때.”
“……여기가 어디야?”
“군사 병원이야. 쾌차할 때까지는 여기서 쉬도록 해. 간호사들이 널 잘 돌봐 줄 거다.”
자일스가 내게 뭔가를 내밀었다. 접시에 담긴 포도였다. 나는 알이 그렇게 굵고 커다란 포도는 난생 처음 보았다.
“먹어.”
“이건 누가 줬어?”
“…….”
자일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내가 한 알이라도 먹기를 바라는 눈으로 날 지그시 쳐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미안하게도 나는 전혀 식욕이 돌지 않았다. 무슨 약을 놓은 건지는 몰라도 속이 울렁거렸다.
“지금은 먹고 싶지 않아.”
그러자 자일스가 접시를 물렸다. 그는 어쩐지 시무룩해 보였다.
“좀 괜찮아지면 먹을 테니까 걱정하지 마.”
“네가 다 먹어라. 다른 사람은 주지 말고.”
“간호사가 나눠 달라고 하면?”
“자일스 헤센 대위가 허락하지 않았다고 말해.”
나는 픽 웃음을 터뜨렸다. 그와 대화를 나누면서 몽롱했던 정신이 서서히 맑아지기 시작했다. 동시에 여러 장면들이 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그러고 보니 우리는 기차에 있었는데. 나는…… 그 엔진실에서 살아 나온 거구나.
“기차는 어떻게 됐어? 승객들은?”
“당국에서 압수한 뒤 조사 중이야. 승객들은…….”
“죽었어?”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것 같았다. 다행히 자일스는 고개를 저었다.
“살아 있어. 안전한 곳에 구금해 놨다.”
“그 사람들은 어떻게 되는 거야?”
“벨담에서 자국민 송환을 위해 우리와 협상을 진행 중이야. 잘 마무리되면 고향으로 돌아가겠지.”
“그래도 이제 무턱대고 죽이지는 않나 보네.”
“살려 두면 더 큰 이익을 볼 수 있으니까.”
“……앨버트는?”
흐릿한 기억 속에서나마 그가 날 붙잡고 있던 게 떠올랐다.
자일스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바로 대답했다.
“죽었어.”
그는 내가 무어라 더 묻기도 전에 덧붙였다.
“그리고 그놈 이름 앨버트 아니야.”
“그럼 뭔데?”
“알베르트 레만. 육군 출신 정보국 소속 요원이다. 전쟁에도 참전했던 것으로 알고 있어.”
“알베르트나 앨버트나 그게 그거 아니야?”
“엄연히 달라.”
뭐, 그런가 보지. 나는 어깨만 으쓱이고 말았다. 앨버트가 죽었다는 건 조금 의외인 사실이었다. 오히려 앨버트를 살려 두고 그에게서 최대한 많은 정보를 뽑아내려 할 줄 알았는데.
“그가 너를 때린 건가?”
자일스가 물었다. 나는 문득 내 얼굴을 만져 보았다. 반창고와 거즈가 붙어 있었다. 이제야 모든 기억이 다시 되살아났다.
“아주 죽여 버릴 것처럼 굴던데. 내가 당신에게 기차에 대해 말해서 미치고 환장할 것 같았나 봐.”
“얼마나 많이 때렸지?”
“내가 맞아 본 것 중에 제일 아팠어.”
나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자일스를 곁눈질했다. 그는 앨버트를 부활시킨 후 한 번 더 죽이고 싶어 하는 눈초리였다.
“널 혼자 두지 말았어야 했어.”
“괜찮아. 안 죽었잖아. 난 끝까지 버틸 자신 있었어.”
“내가 널 발견했을 때 네 상태는 정말 심각했어. 하마터면 목숨이 위험할지도 몰랐다고. 앞으로는 그런 일 없을 거야.”
“뭘 어떡하게? 내가 애도 아니고. 업고 다니기라도 하게?”
“마음 같아선 그러고 싶다.”
말도 안 돼. 나는 질린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나를 뭍에 내놓은 금붕어인 줄로 착각할 때가 많았다. 보통 다른 사람에게 애정을 가지게 되면 다 저렇게 되는 건가?
나는 그가 그 나름대로 애정을 표현하고 있다는 걸 알았지만 아무런 호응도 할 수 없었다. 나는 자일스를 사랑하지 않았으니까. 적어도 그가 나를 아끼는 만큼은 아니었다.
그럴 수밖에 없지 않은가. 내가 그를 제대로 알게 된 건 아주 최근의 일이었다.
대신에 나는 그에게 다른 말을 해 주고 싶었다.
“그래도 다행이야. 당신이 벨담으로 가지 않아서.”
“내가 그렇게 쉽게 잡힐 거라고 생각하면 안 돼.”
“어떻게 한 거야? 기차를 기습하기도 쉽지 않았을 텐데.”
“나중에 자세히 얘기해 줄게. 지금은 그냥 쉬는 것에만 집중해.”
“이제 갈 거야?”
“곧 돌아올 테니까 잠깐 자고 있어.”
자일스는 자리에서 일어나 코트를 한쪽 팔에 걸쳤다. 나는 떠날 준비를 하는 그의 등 뒤에 대고 말했다.
“넘겨짚지는 마. 내가 당신을 사랑하게 되어서 이런 말을 하는 거라고 생각하면 오해야. 난 그냥…… 훗날에 후회할 일을 만들고 싶지 않았던 것뿐이야.”
“그래. 그런 일은 있어선 안 되지.”
자일스가 미소를 지어 보였다. 화사한 햇살이 쏟아져 들어와서 그런지 그의 미소가 한층 더 가벼워 보였다. 그는 무거운 짐을 덜어놓은 사람 같았다.
솔즈부르의 저택에서 내가 그를 무서워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있다. 그때는 정말이지 얼굴 위에 내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그가 내게 잠깐의 작별을 고하자마자 누군가 병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내가 처음 보는 남자였다. 그 역시 군복을 입고 있었고, 자일스보다는 나이가 들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