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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을 사랑한 건 살아남기 위해서였다-35화 (35/93)

<35화>

앨버트는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해서 나를 때렸다. 어쩌면 내가 죽을 때까지 작정하고 때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보니 그는 그러고도 남을 놈이라는 강한 믿음이 들었다. 왜 지금껏 알아차리지 못했을까? 다정하고 사려 깊은 남자의 가면 뒤에는 살인과 고문에 익숙해진 잔인한 영혼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새로운 표적이 된 건 바로 나였다.

그가 윽박질렀다.

“너 같은 년이 수작질을 부린다고 해서 상황이 달라질 것 같아? 우리는 곧 국경을 통과해. 기차는 두 시간 내로 벨담 영토에 진입할 거야. 자일스 헤센이 도망칠 곳은 어디에도 없어. 이미 다 늦었다고. 그놈도, 너도 이제 끝장난 거야.”

뭔가 해야 했다. 이런 곳에서 정신을 잃을 수는 없었으니까. 하지만 앨버트는 내게 생각할 틈을 주지 않았다. 그에게 맞을 때마다 머릿속이 하얗게 점멸했다. 시야에 제대로 들어오는 물체가 없었다.

그때였다. 소름끼치는 소음이 귓구멍을 헤집고 들어왔다.

끼이이익―

기차가 급제동을 걸고 있었다. 앨버트가 내 머리채를 놓치는 바람에 나는 바닥에 그대로 머리를 찧었다. 몇 초가 지나자 소음이 멈추었다.

내 정신은 서서히 제자리를 찾아 돌아왔다. 나는 쓰러진 채 숨을 몰아쉬며 상황 파악을 위해 눈알을 열심히 굴렸다.

누군가 엔진실 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내가 모르는 남자였다. 그는 앨버트에게 경례를 올려붙이더니 급박한 목소리로 보고했다.

“비상 상황입니다, 요원님.”

“뜸 들이지 말고 똑바로 말해.”

“기차가…… 기차가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습니다.”

“무슨 개소리야?”

그의 부하는 잔뜩 동요한 얼굴로 대답했다.

“선로가 끊겼습니다. 이 앞에는 아예 길이 없습니다.”

잠시 침묵하던 앨버트는 허리에 손을 올리고 나머지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리더니 내 쪽으로 다가왔다. 그가 내 머리에 뭔가를 씌웠다. 공기가 잘 통하지 않는 소재였다.

어둠 속에서 그가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숨 막혀서 질식사하든지 알아서 하라지. 이년은 자일스 헤센이 죽인 거다. 그렇게 알고 있어.”

발소리와 함께 문이 닫혔다. 나는 어둠 속에 홀로 남겨져 숨을 몰아쉬었다. 체온이 오르고 머리가 아파 왔다. 나는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어떻게든 몸을 일으키려 해 봤지만 허사였다.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정신을 똑바로 유지하기 위해 눈을 부릅떴다. 이곳에서 죽지 않을 거다. 정신을 잃지도 않을 작정이었다.

하지만 내가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는 알 수 없었다.

*

기차는 완전히 움직임을 멈췄다. 앨버트는 부하들을 거느리고 복도를 성큼성큼 가로질렀다. 승객들이 저들끼리 무어라 소곤거리며 바깥 상황을 내다보고 있었다. 앨버트는 그들 쪽으로 냅다 소리를 질렀다.

“입 다물고 있어!”

그러자 문이 닫히고 모두가 사라졌다. 부하들 중 하나가 밖으로 나가는 문을 열어 주었다. 앨버트는 땅 위로 발을 내디뎠다. 바깥은 아직 밝은 낮이었다. 그들은 잔디가 아무렇게나 자란 땅 위를 나아가 증기 기관차의 선두 근처에 다다랐다.

부하의 말대로 선로가 끊겨 있었다. 원래 선로가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 아니었다. 땅 위에는 선로가 설치되어 있었던 흔적이 있었다. 누군가 고의적으로 제거한 것이다.

일이 크게 잘못되었다. 두말할 것도 없었다. 임무는 실패했다. 그들이 발각된 게 아니고서야 이런 일이 벌어질 리는 없었다. 이젠 어떻게 해야 하지? 기차를 버리고 다른 방법을 찾아야 했다.

“자일스 헤센을 찾아. 그놈만은 우리가 쥐고 있어야 해. 아직 이 기차 안에 있을 거다.”

“다른 승객들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알아서 하게 내버려 둬. 이젠 우리 소관 아니니까.”

앨버트는 몸을 돌려 다시 기차로 돌아갔다. 하지만 그에겐 자일스 헤센을 붙잡아 퇴로를 모색할 여유조차 없었다.

사방에서 군용 트럭이 몰려들고 있었다.

*

모든 기차에는 통신 기기가 있다. 언제든 비상사태가 발생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필수적으로 외부와 통신할 수 있는 장치를 설치하도록 규정되어 있었다.

그리고 이런 중요한 기기라면 옆에서 지킬 사람을 세워 두었을 것이다. 자일스는 운전실 근처에서 경비를 서는 요원 하나를 발견했다.

그는 아직 자일스를 발견하지 못한 듯싶었다. 자일스는 주변을 둘러보고는 요원의 사각지대에서 발소리를 죽이고 그에게 접근했다.

요원이 그쪽을 돌아보려던 그 때, 자일스는 순식간에 요원을 제압하고 그의 머리에 총구를 들이밀었다.

그가 발버둥 치는 요원에게 속삭여 물었다.

“통신 장비는 어디 있나?”

요원은 씩씩대며 끝까지 저항하려 했다.

“너 같은 반역자한테 그런 걸 알려 줄 것 같…… 으윽!”

칼날이 그의 허벅지를 가르고 들어갔다. 요원은 비명을 지르려 했지만 자일스가 먼저 그의 입을 틀어막았다.

그가 다시 물었다.

“통신 장비는 어디에 있나? 좋은 말로 할 때 털어놓는 게 좋을 거다. 너도 알고 있겠지만, 나는 더한 일도 할 수 있는 사람이거든.”

요원은 덜덜 떨면서 한쪽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자일스 또한 그 위치를 확인했다. 이제 요원은 쓸모가 없다. 자일스는 그의 목을 꺾어 버리고 장비를 향해 다가갔다.

기차는 국경 쪽으로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지만 아직은 입스윈 영토에 있었다. 가장 가까운 보안국 사무소에 전파가 닿을 것이다. 자일스는 그가 알고 있는 비상 코드를 입력했다.

신호음이 울렸다. 이젠 시간이 별로 없었다. 누군가 통신을 시도했다는 걸 다른 요원들이 눈치챌 가능성이 있었다. 최대한 빠르게 통신을 마쳐야만 했다.

곧 상대편에서 응답을 해 왔다.

“9007 사무소입니다.”

“코드 307 헤링본 월터. 2000 벌쳐 연결 바란다.”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곧 다른 사람이 통신을 연결했다. 해링턴이었다.

“무슨 일인가?”

“일전에 말씀드렸던 기차 말입니다.”

“설마 그 기차에 탔다고 말하려는 건 아니겠지?”

“탄 거 맞습니다. 그리고 지금 당장 지원이 필요합니다. 벨담으로 탈출하려는 벨담인들이 타고 있습니다. 몇 시간 후면 국경을 지납니다.”

“시간이 얼마 없군. 지금 입스윈 영토를 지나는 기차가 한두 대가 아니네. 어떻게 자네가 탄 기차를 식별할 수 있겠나?”

자일스는 재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이 기차만이 가질 수 있는 특징. 무엇으로 식별해야 하지? 신호음? 멀리서도 주파수로 추적할 수 있는 소리 형태가 가장 정확할 것이다.

그렇다면 답은 하나뿐이었다.

“피아노 소리를 추적하십시오. 반드시 찾으실 수 있을 겁니다. 그리고 벨담 국경을 지나는 모든 선로를 미리 제거하라고 이르십시오.”

통신이 끊겼다.

이제는 시체를 치워야 할 때였다.

비슷한 시각, 보안국 사무소 요원들이 수많은 전선이 연결된 커다란 장치 앞에 모여 헤드폰으로 소리를 듣고 있었다. 서쪽 국경 지대에서 발생하는 440헤르츠 이상의 소리를 추적하기 위해서였다.

그때, 요원 하나가 장치의 다이얼을 조절하던 동료에게 손을 들어 보였다.

“잠깐. 들린다.”

그러자 다른 요원들도 전부 헤드폰을 착용했다. 그들은 같은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에른슈타인 야상곡 가단조였다. 전해 들은 바와 같았다. 확실한 피아노 소리였다.

그녀가 동료들에게 손짓했다.

“헬레나, 루비, 좌표 확인해.”

요원들이 바쁘게 움직였다.

현재 시각, 자일스 헤센은 좌표를 지정받고 몰려든 트럭 무리를 보고 있었다. 기차는 멈추었고, 그들은 포위당했다. 벨담 정보국의 완벽한 패배였다. 무장한 요원들이 총을 들고 대응을 시도했다.

총소리가 울렸다. 비명 소리도 함께 들렸다. 자일스는 바깥으로 나갔다. 복도로 나가자마자 동료들을 돕기 위해 나온 참인 벨담 요원과 마주쳤다.

그가 총을 들기도 전에 자일스가 먼저 사격을 가했다. 그는 힘없이 쓰러진 요원의 시체를 지나쳐 계속 나아갔다.

바깥으로 나가자 후방을 점거한 입스윈 군인들이 그에게 경례를 올려붙였다. 개중엔 아는 얼굴도 있었다. 직속 부관인 찰리 스펜슨이 와 있었다.

“대위님.”

그가 자일스에게 군용 코트를 입혀 주었다. 찰리는 씩 웃으며 자일스를 반겼다.

“이런 상황에서 다시 뵙게 되다니 영광입니다. 또 한 건 올리셨군요. 알고 계셨습니까? 저는 언제나 대위님을 믿고 있었습니다.”

“다른 쪽 상황은 어떻지?”

“아직 기차를 완전히 점거하지는 못했지만, 저희 쪽 전력이 훨씬 압도적입니다. 머지않아 전부 제압될 겁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자일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여유 부리지 않고 다시 움직였다. 부하들을 돕기 위해서는 아니었다. 그들은 제 몫을 잘 할 것이다. 지금 자일스에게 중요한 건 따로 있었다.

이들이 처음엔 안나에게 관심이 없었을지 몰라도 더 이상은 아니었다. 비록 본인은 몰랐겠지만, 안나가 기차가 발각되도록 만든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

그녀는 공식적으로 벨담의 배신자나 마찬가지였다. 피아노 연주가 아니었더라면 기차는 벌써 국경을 통과하고 있었을 수도 있었으니까. 어쩌면 그녀는 이미 지휘관의 손아귀에 들어갔을 수도 있었다.

그녀의 목숨이 위험할 수도 있었다.

한시라도 빨리 안나를 찾아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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