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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을 사랑한 건 살아남기 위해서였다-34화 (34/93)
  • <34화>

    나는 망연히 그의 어두운 눈동자를 바라보기만 했다. 물론 그가 아무것도 모르고 승차하지는 않았을 거라 생각했지만…….

    “죽을 걸 알면서, 그냥 탔다고? 나 때문에?”

    “어쩔 수 없었어. 그들이 너를 해칠 수도 있다고 생각했으니까.”

    “아니야. 이 기차는 애초에 나를 위한 기차가 아니었어. 다 당신을 태우기 위해서 모략을 짠 거라고. 당신을 그곳으로 끌고 가기 위해 다 준비된 거야. 전부 다…….”

    “그래. 네가 미끼였지.”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주체할 수 없는 감정이 목구멍 위까지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맞아. 나는 미끼다. 벨담 측에서는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

    자일스가 내게 집착하고 있다는 걸 알았고, 내가 출처 불분명의 기차에 올라타면 그 또한 따라올 거란 사실을 알았다.

    결국 나만 아니었다면 그는 이 기차에 탈 일이 없었을 것이다.

    절대로…….

    나는 나를 짓누르는 감정이 억울했다. 엊그제까지만 해도 분명히 당신을 증오했는데. 당신이 죽어 버렸으면 좋겠다고 빌었고, 당신의 시체 앞에서 웃어 줄 자신이 있었는데. 이젠 그렇지 못했다. 왜냐하면 나 또한 진실을 알아 버렸기 때문이었다.

    차라리 그와 대화를 하지 말았어야 했다.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억울하고, 화가 났고 또 비참했다. 나는 결국 내가 원하지 않게 될 일에 끌려 들어와 그를 유인할 도구로써 이용당했다.

    그리고 그 책임은 오롯이 내가 져야만 했다.

    내가 울자 자일스는 이제야 반응을 보였다. 그는 커피 잔을 내려놓고 내 눈물을 닦아 주었다. 나는 그의 눈동자가 동요하며 파문을 일으키는 모습을 아주 가까이에서 볼 수 있었다.

    “안나, 울지 마.”

    “시끄러워. 당신을 만나지 않았어야 했어. 그랬다면 이런 일들을 겪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내가 이렇게 죄를 뒤집어써야 할 일도 없었을 거라고. 당신이 내 모든 불행의 원인이야. 전부 다…….”

    “괜찮아. 안나.”

    그가 나를 끌어안았다. 나는 눈물을 그치려고 애써 봤지만 도저히 멈출 수가 없었다. 자일스는 그런 나를 토닥이며 귓가에 나직하게 속삭였다.

    “네가 잘못한 건 하나도 없어.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

    “곧 죽을 건 당신인데…… 당신이나 걱정해. 이러고 있을 시간 없어, 자일스. 곧 열차가 도착할 테고…….”

    “지금은 아직 입스윈 영토에 있잖아. 아직은.”

    “그게 무슨 상관이야! 내가 당신을 지옥으로 끌고 왔어. 나도 내가 왜 이렇게 되어 버린 건지 모르겠어. 난…… 난 분명히 당신을 증오했는데…….”

    “괜찮아. 다 괜찮을 거야.”

    나는 팔소매로 눈물을 훔쳤다. 바보처럼 그의 앞에서 눈물이나 짜고 있고 싶지는 않았다. 나는 내가 그런 모습을 보이는 걸 참지 못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억지로 눈물을 삼켰다. 심호흡을 했다. 심장이 터질 것 같았지만 무시했다. 그러자 나는 한결 나아졌다.

    자일스는 손수건을 꺼내 내 얼굴을 닦아 주었다. 그는 아주 소중한 것을 보듯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잘 나오지 않는 목소리로 그에게 말했다.

    “도망쳐, 자일스.”

    “그래. 그 전에 소원 하나만 들어줄 수 있을까?”

    내가 미처 묻기도 전에, 그가 소원을 말했다.

    “네 피아노 연주를 다시 한번 듣고 싶다.”

    피아노. 우리 사이에는 언제나 피아노가 있었다. 처음부터 그랬고, 아마 마지막까지도…… 그럴 것이다.

    만찬장에는 피아노 한 대가 자리하고 있었다. 이 커다란 기물을 어떻게 기차 안에 욱여넣었나 싶지만, 더 놀라웠던 건 피아노는 처음부터 그 자리에 있었다는 것처럼 기차 안 풍경에 자연스럽게 섞여 있었다.

    아직 사람들이 식사를 들러 올 시간이 아니었다. 만찬장, 혹은 공연장은 텅 비어 있었다. 오로지 나와 자일스뿐이었다.

    나는 피아노 뚜껑을 열었다. 반질반질한 건반들이 내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내가 애정을 가진 몇 안 되는 것들이다. 나는 건반을 내려 보다가 이내 고개를 저었다.

    “아무래도 정말 이럴 때가 아닌 것 같아.”

    “부탁할게. 안나.”

    나는 그를 올려다보았다. 차마 그런 얼굴로 내게 건네는 부탁을 거절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건반 위에 두 손을 올렸다. 그리고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 들려주었던 야상곡을 연주했다.

    좁은 기차 안에 음악 소리가 넘쳐흘렀다. 기차 안이라서 그런지 다른 때보다 피아노 소리가 더 크게 들렸다. 그래서 나는 내가 연주하는 야상곡에 더욱 몰입할 수 있었다.

    서정적인 야상곡은 마치 다가올 운명이 얼마나 침울할지 알면서도 기다리는 이의 노래 같았다. 그렇기에 우울하다기보다는 담담한 어조를 갖고 있었다. 나 또한 곡을 연주하면서 마음을 침착하게 다스렸다.

    자일스도 이런 이유로 내 연주를 듣고 싶다고 한 것일까.

    선율이 마치 처마에서 떨어지는 빗방울처럼 피아노 건반을 타고 아래로 흘렀다. 이 순간만큼은 승객들의 말소리도, 철로를 지나는 거대한 바퀴 소리도 음악 소리를 해치지 못했다.

    나는 눈을 감았다. 우리가 처음 만났을 적을 상상했다. 그때 나는 얼마나 겁에 질려 움츠러든 채 건반을 눌렀던가. 지금과는 비할 수 없을 정도로 불안정한 상태였을 것이다. 아마 내 연주도 그때와는 참 많이 달라졌겠지.

    그때는 내가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고, 지금은 반대로 자일스가 낭떠러지 위에 서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의 마지막 부탁을 이루어 주는 중이었다. 음악으로써.

    나는 고개를 들었다. 내 연주가 잠시 주춤거렸다. 곁을 지키고 서서 내 음악에 귀를 기울이던 자일스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어쩌면 제 살길을 모색하러 떠난 것일지도 몰랐다. 그는 탈출할 수 있을 것이다. 능력 있는 군인이니까. 그 또한 생존자니까.

    대신 나는 전혀 다른 남자가 문을 열고 성큼성큼 다가오는 모습을 보았다. 앨버트였다. 그는 화가 난 얼굴로 다가오더니 내 손목을 돌연 붙들었다.

    나는 그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앨버트는 내 앞에서 저리 무시무시한 얼굴을 보인 적이 없었다. 하지만 나는 그가 전혀 무섭지 않았다.

    “너, 자일스 헤센한테 말한 거야?”

    “아파, 앨버트.”

    “쥐새끼 같은 년이 그 새를 못 참고 일을 그르치려 들어?”

    그는 분을 참지 못하고 손을 올렸다. 오른쪽 뺨에 불이 났다. 나는 맞은 부위가 빨갛게 부어올랐을 거라고 생각했다.

    앨버트는 내 손목을 잡고 우악스럽게 내 몸을 일으켰다. 그러곤 빠른 걸음으로 나를 어디론가 끌고 갔다.

    “따라와. 제멋대로 군 대가를 치러야지.”

    그가 나를 끌고 온 곳은 엔진실이었다. 적어도 사람들은 이런 장소를 그렇게 부르는 것 같았다. 벌겋게 불타오르는 커다란 엔진 때문에 후덥지근했다. 이곳을 밝히는 빛이라고는 오직 멈출 줄 모르고 불타오르는 엔진밖엔 없었다.

    나는 두 손이 결박된 채로 바닥에 주저앉아 앨버트를 올려다보았다. 그는 내 앞에 우뚝 서서 버티고 있었다.

    언젠가 이 자식이 내게 이런 짓을 할 줄 알았다. 그가 내게 베푼 호의는 거짓이었으니까. 그리고 내가 그의 호의를 보란 듯이 배반하자, 그는 내게 되갚음을 하려 했다.

    “안나.”

    앨버트가 내 이름을 불렀다. 평소와는 전혀 다른 목소리였다. 아마 그의 진짜 목소리겠지. 나는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무슨 생각으로 그런 거지?”

    “…….”

    “내 코앞에서 날 등쳐 먹으려 하면 안 되지, 응? 이 기차 안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내가 모를 거라 생각해선 안 됐어.”

    “왜? 도청이라도 했어?”

    복부에 발길질이 날아왔다. 내 입에서 비명이 튀어나왔다. 하지만 아무도 듣지 못했을 것이다.

    앨버트는 내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내 머리채를 휘어잡았다. 그리고 땀으로 엉망이 된 내 얼굴을 찬찬히 훑어보았다.

    “하긴, 내가 누군지 모르니 이런 깜찍한 짓을 벌인 거겠지.”

    그가 예전의 미소를 지어 보였다. 하지만 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의 미소는 절대 예전 같지 않았다. 붉은 빛이 앨버트의 얼굴을 비추었다. 나는 그에게서 몸을 빼려 했지만 그럴수록 앨버트는 내 머리채를 더욱 꽉 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안나, 왜 그래? 응? 우린 같은 벨담 사람이잖아. 넌 한 번도 벨담 땅을 밟아 본 적이 없겠지만, 기본적으로 우리는 같은 영혼을 공유하는 사이라고. 넌 분명 그를 증오했잖아. 자일스 헤센이 죽기를 바랐잖아. 나만큼이나! 그런데 왜 나를 배반하려 했지?”

    그는 아직도 분을 참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나 같은 것에게 배신당했다는 사실이 알량한 자존심을 건드렸을 거다. 앨버트는 대신에 분노로 뒤틀린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아무래도 그놈 밤기술이 죽여줬나 보지, 그렇지?”

    “역겨운 자식.”

    “자기소개는 그만 해 둬. 어디, 한번 말해 봐. 헤센이 침대 위에서 널 어떻게 만족시켜 줬지? 네가 배신하게 만든 결정적인 이유가 뭐였어?”

    나는 말하지 않았다. 그의 조롱은 내게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못했다. 난 그저 그와 대화할 가치를 느끼지 못한 것뿐이었다. 앨버트는 내 저항을 참아 주지 않았다. 그가 내 따귀를 때렸다.

    “말해!”

    입 안이 터졌다. 나는 눈앞이 어지러워지는 것을 느꼈다. 이곳은 너무 더웠고, 나는 점점 숨을 쉬기가 어려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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