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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을 사랑한 건 살아남기 위해서였다-33화 (33/93)
  • <33화>

    “당신, 혁명군으로부터 살아남은 생존자인가요?”

    “네! 맞아요. 정말 무서워 죽는 줄 알았어요. 제 가족들은 전부 다 뿔뿔이 흩어져서 이젠 어디 있는지도 몰라요. 아마 높은 확률로 죽었겠죠. 이 기차 안에서 가족을 찾으려고 해 봤는데 결국 찾지 못했거든요. 어쩌면 이미 벨담으로 탈출했을 수도 있겠네요.”

    “이 기차에 탄 사람들은 그럼 다…….”

    “저도 잘 아는 건 아니지만, 대부분 그럴 거예요. 벨담으로 탈출시켜 주는 대신에 정보국에 협조하게 된 거죠. 자일스 헤센의 호송을 위해서요.”

    “난 몰랐어요.”

    왜 앨버트는 이 사실을 내게 말해 주지 않았을까? 훈련까지는 아니더라도 당연히 이들이 비상사태에 준비된 사람들일 거라고 생각했던 나는 아연실색했다. 앨버트를 포함한 소수의 요원들 빼고는 다 민간인들이란 뜻 아닌가.

    물론 기차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지는 않겠지만…… 만약 입스윈 군인들에게 기차의 소재가 발각되기라도 했다면 그들은 다 죽을 수도 있었다. 이 작전은 생각보다 위험한 작전이었다.

    반면 카를라는 오로지 벨담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만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사람들이 나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나요?”

    내가 물었다. 카를라가 나를 알고 있을 정도면 이미 다른 승객들에게도 내 정보가 퍼졌으리라. 내 이름이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고 있다면, 나 또한 미리 알아 둬서 나쁠 건 없을 것이다.

    “그리 많이 아는 건 아니에요. 그냥 유명한 신예 피아니스트가 있는데, 그 여자가 자일스 헤센을 기차에 태우는 데에 큰 공헌을 했더라, 이 정도죠. 그건 사실인가요? 설마하니 잘못된 정보가 퍼지지는 않았겠지만…….”

    “상상에 맡길게요.”

    커피와 토스트가 나왔다. 나는 표면에 작은 파문이 일고 있는 커피만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내 머릿속에 드는 생각은 하나였다. 만약 내가 벨담에 내리게 된다면, 피아노를 치러 조용히 사람들 곁을 떠나지는 못하게 되겠구나.

    자일스 헤센과 가까운 사이였다는 이유로 온갖 구설수에 오르내리고, 사람들의 질문을 받는 상황들을 상상할 수 있었다.

    아니, 나는 반드시 벨담에 내리게 될 것이다. 나를 데려온 사람들이 그렇게 만들고야 말 거란 생각이 들었다. 나는 자일스와 함께 벨담에 가게 될 것이고. 어쩌면 그에게 벌어지는 모든 일들을 고스란히 보게 될 수도 있었다.

    내가 그런 일이 벌어지는 걸 바라나?

    희대의 반역자, 자일스 헤센을 처형대로 데려온 여자라고 알려지게 될지도 몰랐다. 하지만…… 나는 그런 일을 바라지 않았다.

    물론 과거에 내가 자일스를 증오했던 건 사실이었다. 한때 그가 죽기를 바랐고, 그를 죽이기 위해 품에 총을 숨겼던 것도 전부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를 통해 내 이름이 알려지는 건 싫었다. 그게 마치 좋은 일인 양 소문이 나는 건 더 싫었다. 그에 대한 나의 감정은 이미 바뀌어 버렸다. 자일스는 내 눈에 더 이상 괴물로 비치지 않았고, 나는 마음속으로 이미 그를 받아들였다.

    이젠 더 이상 확언할 수가 없었다.

    나는 이대로 그가 죽기를 원하는가. 나는 괴물이 아닌 인간 자일스 헤센의 모습을 봐 버렸다. 차라리 그러지 말았어야 했는데. 그의 진실된 모습이 무엇이든, 내 머릿속의 자일스는 여전히 괴물인 편이 더 나았을 텐데.

    그랬다면 내가 이런 고민을 할 필요도 없었을 거다.

    물론 자일스가 죽는다고 해서 내 인생이 크게 달라질 거란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가 죽든 말든, 그게 대체 나랑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하지만 나는 더 이상 자일스의 죽음을 상상하면서 안도감을 느끼지도 않았고, 그의 비참한 말로를 통쾌해할 수도 없었다.

    그는 그냥…… 나랑 똑같은 사람이었으니까.

    그도 결국은 살아남으려고 발버둥 치는 인간이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이상, 나는 그의 죽음에 어떠한 관여도 하고 싶지 않아졌다. 적어도 내가 그를 죽음의 문턱 앞으로 끌고 온 여자는 되지 말아야 한다. 어째서 내가 그런 운명을 짊어져야 하나.

    나는 그만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건 당신 줄게요. 마음껏 드세요.”

    “잠시만요, 안나!”

    나는 카를라를 그대로 지나쳐 식당 칸을 나갔다. 복도를 가로지르면서도 스스로 혼란스러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오늘 내가 내릴 선택이 앞으로 내 앞길을 크게 좌우할 거라는 사실만은 분명했다.

    분명히, 나는 더 이상 자일스를 증오하지 않아.

    그렇다면 이렇게 반문해 보자.

    나는 그를 구하고 싶은가?

    그가 살기를 원하는가?

    나는 내 감정이 어느 방향을 가리키고 있는지 아직 결정짓지 못했다.

    그러니 지금 당장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일을 하자. 내 본능이 시키는 대로 하자. 어쩌면 그것이 내가 진정 원하는 일일 테니까.

    나는 객실 문을 열어젖혔다.

    자일스가 돌아와 있었다.

    그가 나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의심할 데 없는 반가움과 깊은 호감이 서려 있는 미소였다. 나는 그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문을 조용히 밀어 닫았다. 도저히 그에게 마주 웃어 줄 수가 없었다.

    “아침 먹고 왔어?”

    자일스가 물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러려고 했는데 남한테 다 주고 와 버렸다는 말은 굳이 하지 않았다. 다급히 객실로 돌아오기는 했는데, 막상 그의 얼굴을 마주하니 무슨 말부터 해야 될지 모르겠다.

    “잠은 잘 잤어?”

    나는 어색한 인사말로 화두를 떼었다. 물론 정말 궁금해서 물은 건 아니었다. 그가 의자에 앉아 잠을 잤다는 걸 뻔히 알고 있는 판에 건넬 만한 인사말은 아니었다.

    “그럼. 잘 잤지.”

    거짓말 같았다. 그의 안색이 어젯밤에 비해 전혀 나아 보이질 않았다. 아무튼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나는 자일스에게 다가갔다. 그는 눈치가 빠른 남자였다. 자일스의 눈빛이 바뀌었다. 내가 중요한 이야기를 꺼내리라는 사실을 안 것이다.

    “무슨 일 있어?”

    그는 이 와중에도 나에 대한 문제가 생긴 줄로 착각하고 있었다. 나는 심호흡하고는 천천히 말을 꺼냈다.

    “이 기차…….”

    이상하게도, 기차 얘기를 꺼내는 순간 자일스가 긴장을 풀었다. 어쨌거나 나는 말을 이었다.

    “당신은 이 기차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어?”

    “외국으로 가는 기차잖아. 당신을 좋은 곳으로 데려다줄.”

    그의 대답이 의미심장했다. 그가 기차의 진실을 아는 건지, 모르는 건지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정확히 어디로 가는 건지 알아?”

    “알지. 비텔스덴으로 가잖아. 승무원이 내게 말해 줬거든.”

    자일스가 내게 익숙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의 미소 속에서 교활한 속임수나 음모의 흔적 따윈 찾아볼 수도 없었다. 그런데도 나는 자일스가 일부러 모른 척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게 아니야.”

    “아니라고?”

    “그래. 이 기차는 비텔스덴으로 가지 않아. 사실은 벨담으로 가는 기차야, 자일스. 벨담으로 간다고.”

    나는 내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그가 알아듣기를 바랐다. 그는 벨담으로 가는 기차에 탔다. 벨담에서 이를 갈고 증오하는 배신자가 지금 철로를 타고 벨담으로 향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도착까지는 아마 얼마 남지 않았을 거다. 입스윈과 벨담은 국경을 맞대고 있었으니까.

    그러나 자일스는 내 말을 듣고 놀란 시늉조차 하지 않았다. 그는 오늘 날씨 이야기를 들은 사람마냥 손에 들린 커피 잔에 무던히 입술을 갖다 댔다.

    “그렇군.”

    “자일스, 내 말 못 들었어? 기차가 벨담에 도착하면 당신은…… 당신은 무사하지 못할 거야.”

    “나도 알아. 만일 벨담으로 가게 된다면 끔찍한 꼴을 당하게 되겠지. 굳이 누가 말해 주지 않아도 알고 있어. 나는 배신자니까. 벨담 출신 귀족들을 백여 명에 가까이 처형했는데 그들이 나를 증오하지 않을 리가 없지.”

    “당신은 그걸 알면서도 지금 아무 생각이 안 드는 거야?”

    나는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혼란스러웠다. 위험에 처한 건 자일스인데 발을 동동 구르는 쪽은 오히려 나였다. 그는 태연히 커피나 마시고 있었다. 관심이 없는 것 같기도 했고, 초연한 것 같기도 했다.

    그는 내가 원하는 바와는 전혀 다른 소리를 했다.

    “안나, 너는 내가 죽기를 바라지 않는구나.”

    나는 그만 입을 다물었다. 나는 회색 지대에 서 있었다. 그가 죽기를 바라지도, 죽지 않기를 바라는 것도 아닌 그 중간 지점에. 정확히는 아직 확신을 내리지 못한 상태였다.

    그럼에도 나는 자일스에게 달려와 진실을 전했다. 당신은 위험에 처했다고. 그러니 어서 달아나야 한다고 말이다.

    그렇다면, 어쩌면 나는 점점 자일스가 죽기를 원하지 않는 쪽에 서서히 가까워지고 있을지도 몰랐다. 어쩌면 그의 말이 맞을지 모르는 일이었다. 그의 죽음은 너무 빨랐다. 우리에겐 조금만 더 대화를 할 시간이 필요했다…….

    “고마워, 안나.”

    그래서 나는 태평하게 구는 그에게 화가 나기 시작했다. 자일스는 단지 내가 그에게 경고함으로써 내 진심을 내비쳤다는 사실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정말 급박한 일은 따로 있는데 말이다.

    “자일스! 당신 곧 죽을 거라니까!”

    “내가 이런 일이 벌어질 거란 사실을 모르고 기차에 탔을 것 같아? 입스윈 국경을 벗어나는 순간 나는 죽은 목숨이야. 내가 과연 그런 위험을 감수하지 않았을 것 같아?”

    “그건…… 그럼 당신은…….”

    “나는 다 알고 있었어. 처음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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