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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을 사랑한 건 살아남기 위해서였다-32화 (32/93)

<32화>

그러자 자일스가 움직임을 멈추었다. 그는 미처 생각지 못했던 말을 들은 사람인 양, 얼어붙은 채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모두가 나를 죽이고 싶어 했지만 결국 난 살았어. 나중에는 벨담 귀족의 피가 내 발목을 붙잡으려 했지만, 봐, 이렇게 멀쩡하게 누워서 당신이랑 얘기하고 있잖아. 나도 살아남으려면 치열하게 싸워야 했어. 살아남는 방식에는 저마다 차이가 있겠지만, 그게 뭐 중요하겠어? 내가 살았다는 게 중요하지. 그러니까 당신만 홀로 남겨졌다는 것처럼 말하지 마.”

그가 다시 손을 움직였다. 적어도 그와 나 사이에 공통점은 있었다. 출신이 같다는 것, 그리고 우리 둘 모두 생존자라는 것.

물론 그 사실만으로 우리가 완전히 같아질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나는 그의 생존 이야기에 공감할 수 있었다. 살아남는다는 건 중요한 거다. 죽으면 모든 게 끝이고, 두 번의 기회는 없으니까.

그래서 나는 그가 벨담 사람들을 다 죽였다고 해도 별로 신경 쓰이지 않았다. 어찌 되었든 그는 나를 죽이지 않았고, 여전히 날 죽일 생각은 추호도 없었고, 살고 싶다는 욕망은 나도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으니까.

나도 필요하다면 아무 미련 없이 백작가를 불태우고 나왔을 거다.

“그래. 너도 살았지.”

그가 나를 따라 말했다. 어쩐지 자일스의 안색이 한층 편해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넌 살아 있어.”

“그래, 나도 알아. 그러니까 그만 상기시켜 줘도 돼. 그리고 이제 안 아파. 더 해 줄 필요는 없어.”

자일스가 손을 거둬 갔다. 그는 내 옆에 우두커니 앉아 스탠드 불빛을 가만 보더니 불쑥 물어 왔다.

“아직도 뭔가를 생각하면서 버티고 있나?”

“나? 글쎄…… 지금은 잘 모르겠는데. 적어도 내 앞을 가로막는 건 이제 아무것도 없는 것 같거든.”

“그래. 다행이다.”

“왜, 당신은 아직도 헤어 나오지 못했어?”

자일스는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스탠드를 어둡게 조절했다.

“이제 잘 수 있겠지?”

“응.”

“잘 자, 안나 키팅. 오늘은 악몽이 널 비껴가길 바란다.”

그는 그 말을 끝으로 내게서 멀어졌다. 나는 그가 나를 등진 채 테이블 의자에 앉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거기서 잠을 청하려는 모양이었다. 나야 상관은 없지만…….

나는 이불을 끌어당기곤 눈을 감았다. 이렇게 푹신한 침대에서 잘 수 있다는 건 커다란 축복이나 다름없었다.

고요한 잠은 생각보다 빨리 나를 찾아왔다.

*

자일스 헤센은 어두운 불빛을 뒤로하고 홀로 어둠 속에 침잠했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잠은 오지 않았다. 그는 원래 잠이 많은 편이 아니었고, 몇 년 전부터는 그마저도 잘 자지 못했다.

하지만 괜찮았다. 익숙해지고 나면 제 몸처럼 적응할 수 있었다.

밤을 새지는 않겠지만 지금 당장은 자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달리 할 것도 없었다. 그래서 그는 가만히 앉아 안나의 숨소리를 들었다. 숨을 쉰다는 건 살아 있다는 증거였다.

안나가 살아 있다. 그녀가 살아남았다…… 그건 비단 안나에게만 중요하게 작용하는 사실이 아니었다.

안나는 그에게 아직도 헤어 나오지 못했느냐고 물었다. 그건 사실이었다. 당장 생명을 위협받았던 시절은 지났고, 그의 삶은 다시금 안정기에 접어들고 있었지만 그는 아직도 벼랑 끝에 매달리는 심정으로 살고 있었다.

누군가 그를 죽이고 싶어 하기 때문이라기보다는 스스로의 문제였다. 그는 살아남기 위해 자기 자신을 한계까지 몰아붙였고, 이제는 그 대가를 치르고 있었다.

안나의 말대로 그는 원하던 대로 살아남았지만…… 정말 그것뿐이었다. 그의 세상은 불에 타서 없어졌다. 자일스가 스스로 그의 세상에 불을 붙였다. 이젠 잿더미 속을 방황하며 사는 일밖엔 남지 않았다.

이제 주변을 둘러볼 여유가 생겼다는 건 축복인 동시에 저주였다. 그는 주변을 보고 싶지 않았다. 스스로 이런 미래가 오리라는 걸 몰랐던 것도 아닌데 견디기가 힘들었다.

안나, 당신은 내게 무엇을 보고 버텼냐고 물었지. 나는 거짓말을 하지 않았어. 내게 중요한 건 오로지 생존뿐이었어. 그리고 네가 물은 대로, 나는 아직도 생존을 위해 투쟁하고 있고…… 이제 내가 바라보는 건 너야.

너만이 내 재투성이 세계에 남은 유일한 존재니까.

나는 절대 너를 살린 선택을 후회하지 않아. 그건 내 삶 속에서 유일하게 떳떳하고 올바른 선택이었어. 내가 자랑스럽다고 말할 가치가 있는 유일한 선택이었지.

제 풀에 지쳐 했던 선택이 의도치 않게 그를 살아가게 만들고 있었다. 위험을 감수하고 기차에 오른 건 다 그 때문이었다. 결국 그녀를 잃게 된다면 정말 견딜 수 없을 것 같아서였다.

자일스는 이미 품 안에 있다고 믿었던 이를 잃은 전적이 있었다.

무슨 짓을 해서라도 안나만큼은 놓치지 않을 것이다.

설령 그 과정 중에 안나가 고통받고, 그녀의 미움을 사게 되더라도…… 그는 그렇게 할 생각이었다.

그것이 올바른 길이니까.

그러는 편이 우리 둘 모두에게 이로우니까.

그러니 안나가 잠깐의 평화를 충분히 누렸으면 했다. 그들은 출처가 불분명한 기차에 타고 있었다. 그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아무리 안나를 노리는 기차가 아니라고 해도, 결국에 이 기차는 안나에게 독이 될 게 분명했다.

그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자일스는 머릿속에서 상념을 털어 냈다. 그런 것이 뭐가 중요할까. 어차피 안나는 살아남을 텐데. 그가 필시 그렇게 만들 텐데 말이다.

모든 것이 사라진 세상 속에서, 자일스는 안나를 품 안에 붙들고 있을 것이다.

그들 중 하나가 다치게 되는 한이 있더라도.

*

깨어나 보니 자일스가 없었다. 나는 시계를 보았다. 대충 아침을 먹을 시간 정도는 되었으니 늦잠을 잤다고는 말할 수 없었다.

나는 두 다리를 뻗고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그러다가 사람이 두 명은 더 끼여서 잘 수 있을 것 같은 여유 공간을 만끽했다.

이런 커다란 침대를 나 혼자서만 차지하고 자일스는 의자에서 재웠다. 양심의 가책이 아예 생기지 않았다고는 못 하겠지만, 어쩌겠는가?

내가 그를 예전처럼 증오하지 않게 되었다고는 해도 그와 한 침대에서 잘 수 있게 되었다는 건 아니었다. 그건 자일스가 아니라 다른 남자라 해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혹시라도 그를 바닥 위에서 발견하게 될까 봐 조심스레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그런 일은 없었다. 자일스는 아예 객실에서 나가 버린 모양이었다.

나는 옷을 갈아입고 객실 문 너머를 흘깃거렸다. 아침이라 그런지 분위기는 한산해 보였다. 간단히 조식이나 먹을까 싶어서 조용히 문을 닫고 식당 칸으로 향했다.

익숙한 장소가 내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어제 저녁에 비해 사람이 많지 않았다. 급사가 내게 다가와 몇 가지 되지 않는 메뉴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많이 먹을 생각이 없었던 나는 그냥 커피랑 토스트만 달라고 부탁했다.

급사가 떠나고 나면 나는 혼자 남을 줄 알았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누군가 내 앞에 앉았다. 생각지도 못한 일이 벌어지자 놀란 내가 고개를 들었다. 갈색 머리를 한쪽으로 땋아 내린 웬 여자가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녀는 누군가를 찾는 것처럼 주위를 둘러보더니 내게 속삭여 물었다.

“당신이 안나 키팅이에요?”

“맞는데요.”

“그 피아니스트?”

나는 이런 상황에 익숙했다. 적어도 내 얼굴이 신문에 실린 날부터는 종종 내 이름을 묻는 사람들에게 시달려야 했다. 나는 언제나 그랬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여자는 내가 ‘그 피아니스트’라는 사실보다는 더 궁금한 게 있었던 모양이었다.

“당신, 자일스 헤센이랑 깊은 관계라던데. 진짜예요?”

“그건 왜 묻는 거죠?”

“어제 당신이 그와 함께 저녁을 먹는 걸 봤어요. 이런 말 해도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놀라 자빠질 뻔했다니까요. 알베르트가 아무 내색도 하지 말라기에 티는 안 내려고 애썼는데…….”

“별로 깊은 관계 아니에요. 그냥 좀 아는 사이일 뿐이지. 그러니까 관심 가질 필요 없어요. 돌아가세요.”

이 기차에 탑승한 사람이라면 분명히 자일스에게 호의적이지는 않을 것이 분명했다. 난 그와 엮여서 귀찮은 일이 벌어지는 건 사양하고 싶었다. 내가 대놓고 차가운 태도를 보이자 여자가 두 손을 들며 나를 만류했다.

“제발, 오해하진 마세요. 당신에게 뭐라고 하기 위해 말을 건 것은 아니에요. 당신에게 무슨 잘못이 있겠어요? 자일스 헤센이라면 몰라도. 난 그냥 그날 저녁에 당신과 자일스를 목격하고 나서 당신의 사연이 너무 궁금해졌을 뿐이라고요.”

“당신 대체 누군데 나한테 이래요?”

“난 카를라예요. 카를라 피셔.”

“그걸 묻는 게 아니라…….”

“알았어요. 내 이름이 궁금한 게 아니라 내가 정말 누군지 가르쳐 달라는 거죠? 대충 알고 있겠지만 나도 벨담 사람이에요. 귀족은 아니고, 그냥 좀 살던 집 딸이었죠. 그리고 드디어 집으로 가는 기차를 탔고요!”

스스로를 카를라라고 소개한 여자가 한껏 들뜬 웃음을 지었다. 마지막 말을 듣는 순간, 나는 더 이상 카를라를 쫓아낼 수가 없었다.

“집으로 가는 기차요?”

“네! 벨담으로 돌아가는 기차 말이에요. 이 기차, 벨담으로 가는 거잖아요. 그동안 숨어 사느라 미쳐 버리는 줄 알았어요. 다행히 알베르트와 연락이 닿아서 목숨을 건졌죠! 하늘이 날 도운 거예요. 그럼, 그럴 수밖에 없죠. 난 살면서 평생 나쁜 짓이라곤 한 적도 없고, 기도도 열심히 했거든요. 당신도 나처럼 숨어 살다가 이 기차에 탄 건가요, 안나?”

나는 의아해졌다. 카를라가 말하는 알베르트란 앨버트를 뜻하는 것 같았다. 이 기차에 탄 사람들이 벨담에서 왔을 거라고 막연하게 생각했다. 하지만 생각해 보니 사람들은 입스윈의 어느 역에서 승차했고, 벨담에서 왔다면 굳이 그런 수고를 들일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그럼 이 사람들이 전부 다…… 혁명군의 처형을 피해 숨어 있던 사람들이란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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