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화>
“내가 말했잖아. 혼자 식사하기는 싫다고.”
“나를 불편해할 줄 알았어.”
“설마 체하기야 하겠어?”
나는 그 말이 왠지 우스워서 혼자 픽 웃음을 터뜨렸다. 지금 보니 이 자리가 썩 편하지 않은 건 자일스도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 그가 내 기분을 신경 쓰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기분이 묘했다.
“안나.”
자일스가 말을 꺼냈다. 그는 약간 긴장한 듯이 보였다.
“만약 내가 너를 조금이라도 두렵게 한 적이 있었다면…… 내 안위를 위해 너를 희생시키려 했다고 느꼈다면 미안하게 생각한다. 네가 그런 상황들을 어떻게 받아들였을지에 대해 헤아릴 여유가 없었어. 전부 다 내 잘못이야.”
“……당신이 계속해서 내 꿈에 나왔어. 난 두려웠어. 혹시라도 당신이 내게 복수하고 싶어 할까 봐.”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아. 앞서도 말했지만 너를 추적한 건 혹시라도 네가 당국에 쫓기고 있을지 모른다는 우려 때문이었어. 사적인 감정 때문이 아니야.”
“내가 당신에게는…… 그렇게 중요한 존재였어?”
자일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도 나는 그의 말을 쉽사리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그가 내게 고백한 말들은 공상 과학 소설에 나오는 내용처럼 현실감이 없었다.
“한 번도 내가 중요한 사람이었던 적이 없어서 쉽게 와닿지가 않아. 누군가 나를 그리 여긴다는 게 말이야. 난…… 당신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겠어.”
나를 가만히 바라보던 자일스는 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내 손을 조심스레 잡았다. 나는 놀라서 움찔거렸지만 손을 빼지는 않았다. 그의 손이 따뜻했다. 그 사실 또한 내게는 너무도 어색하게 다가왔다.
“네가 뭘 할 필요는 없어. 다만 더는 악몽을 꿀 필요가 없다는 사실만 기억해. 나는 절대로 널 해치지 않으니까. 그리고 앞으로도 그런 일이 일어나도록 두지 않을 거다.”
나는 그와 맞닿은 손을 꼼지락거리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내게 화려한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진심이겠지. 그는 내게 진실을 고백하고 있다.
그걸 믿는 쪽이 내게도 이로울 것이다. 그의 말대로 나는 잠을 좀 편히 자야 할 필요가 있었으니까.
그리고…… 이 기차가 멈추는 순간부터는, 우리는 다시는 만날 일이 없을 것이다.
만약 자일스가 사람들에게 끌려가면 그는 죽게 될까?
그는 오로지 나 때문에 지옥으로 가는 기차에 탔다. 이 기차가 자신을 위한 기차라는 사실을, 자일스는 알고 있을까. 만약 마지막 순간에 그가 알게 된다면, 내가 그를 유인하기 위한 미끼였다는 걸 그가 안다면.
그때야말로 그는 내게 복수심을 갖게 될까?
여러 생각을 하던 나는 무심코 시선이 느껴지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앨버트가 나를 쳐다보며 누군가와 속삭임을 나누고 있었다.
밤이 되자 기차가 속도를 줄였다. 어두운 풍경이 나를 더욱 느리게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그마저도 객실 내의 불빛에 가려 대부분은 보이지도 않았지만. 자일스가 커튼을 쳤다. 그러자 방 안에 안정감이 한층 더해졌다.
그리고 나는 결국 소화 불량에 시달려야 했다. 충분히 준비가 되었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나 보다. 차라리 속을 게워 내기라도 하고 싶었는데 그것조차 잘 안 됐다.
침대에 누워 끙끙거리는 나를 향해 자일스가 다가왔다. 그는 하얀 셔츠 차림이었다. 단추를 맨 위까지 채워 흐트러짐 한 점 없는 모습이 딱 군인답기는 했다.
“많이 아파?”
“이대로는 도저히 못 잘 것 같아.”
“아무래도 나 때문인 것 같군.”
“잘 아네. 이게 다 당신 때문이야.”
내가 힘없이 쏘아붙였다. 그는 반박하지 않았다. 다만 할 말이 많은 표정으로 나를 바라볼 뿐이었다. 따스한 색감의 스탠드 불빛이 그의 얼굴 위를 아른거렸다.
나는 잠시 동안 아픔도 잊고 그의 얼굴에 시선을 꽂았다. 나도 내가 이런 소릴 하게 될 줄 몰랐지만, 어쩐지 그의 얼굴을 한번 만져 보고 싶었다. 그의 피부가 나처럼 부드럽고, 나처럼 따뜻한 피가 흐르는 사람임을 확인하고 싶어졌다.
“한때는 당신 피가 파란색일 줄로만 알았지.”
“뭐?”
“아냐, 됐어. 신경 쓰지 마.”
자일스는 제 코트 주머니 안에서 뭔가를 꺼내 왔다. 작고 불투명한 갈색 유리병이었다. 그는 내 옆에 앉아 유리병 안에 든 것을 두 알 정도 털어 냈다.
“자, 먹어. 좀 나을 거야.”
“이게 뭐야?”
“소화제.”
“……이런 걸 왜 들고 다니는 거야? 의사도 아니고.”
“필요했으니까.”
나는 애써 몸을 일으켰다. 그러곤 그가 건넨 알약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입 안에 털어 넣었다. 자일스는 내게 물병을 건넸다.
설마 독이 들어 있지는 않겠지. 그는 이런 치사한 방법으로 사람을 죽이지는 않을 거다. 더 효과적이고 확실한 방법을 수 가지는 더 알고 있을 테니까.
하지만 그런 논리적인 이유가 아니더라도 난 정말로 그가 내게 독약을 줬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를 만난 지 이틀도 채 되지 않았는데…… 우리 사이의 간격은 정말 많이 좁혀져 있었다.
자일스는 한숨을 쉬더니 팔소매를 걷어 올렸다.
“어디가 아파? 한번 보자.”
“왜? 그냥 소화가 안 되는 것뿐이야.”
“한 번에 낫게 해 줄 순 없겠지만 조금 완화시켜 줄 수는 있어.”
“뭘 하려는 건데?”
“아픈 부위를 짚어 봐.”
그가 침대 끄트머리에 앉으며 말했다. 불길한 예감이 스쳤다. 이제 그가 내게 하려는 일이 뭔지 대충 예상할 수 있었다.
“뭘 하려는 거냐고!”
“마사지.”
그 말은 내 배를 문지르겠다는 건가? 나는 경악했다. 생각을 거치지도 않고 말이 먼저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싫어!”
“훨씬 나을 거야. 믿어 봐.”
“내가 당신을 어떻게…….”
어떻게 믿느냐고 하려고 했다. 하지만 나는 말을 끝맺을 수 없었다. 이미 그가 건넨 약도 잘만 삼켜 버린 나였다. 아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 나는 그가 날 해칠 거란 생각에서 거부한 게 아니었다. 그가 내 몸을 문질러 주면 거부 반응이 들 것 같았다.
내 배는 아무도 만진 적이 없다. 그런데 그런 부위를 남에게 허락한다고? 조금만 덜 아팠더라도 난 내 입장을 강경하게 고수했을 거다.
하지만 고통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심해지고 있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타협점을 찾아야만 했다.
“……여기. 여기가 아파.”
“알겠다.”
“살살 해야 해!”
그가 고개를 끄덕이곤 내 명치 아래에 손을 올렸다.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다시 말하지만 난 이런 경험이 전무한 사람이었다.
“힘 빼, 안나.”
“무슨 소리야?”
“그렇게 긴장하고 있으면 효과가 훨씬 덜해. 몸에 힘을 빼고 편안하게 있으려고 노력해 봐.”
어쩔 수 없었다. 내가 잔뜩 힘을 주고 있었던 건 사실이었으니까. 나는 그의 말대로 하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자일스가 보기엔 영 시원치 않았나 보다.
“숨을 내쉬어. 심호흡하듯이.”
그가 시키는 대로 하자 확실히 몸이 나른하게 풀어졌다. 자일스가 내가 짚어 주었던 위치를 조심스럽게 누르며 말했다.
“옳지.”
나는 눈을 감은 채 그가 얹힌 부위를 요령 있게 마사지하는 감각을 느꼈다. 최대한 다른 사람을 상상하려 노력했으나 내 피부에 닿는 건 커다랗고 단단한 남자의 손이었다.
유모들이나 해 주는 일을 자일스가 하고 있다는 사실도 그렇지만, 더 놀라운 건 효과가 있었다는 거였다.
“당신한테도 누가 이런 거 해 준 적 있어?”
내가 물었다. 여전히 눈은 뜨지 않은 채였다.
“어렸을 때 배앓이를 자주 하는 편이었지.”
“당신도 잘사는 집 아들이었다고 했지.”
대답이 없었다. 나는 계속 말을 이었다.
“아플 때 누가 뭘 해 줬는지 말해 봐.”
“……그건 왜.”
“난 그런 경험이 거의 없단 말이야. 내가 아프면 누군가 나를 신경 써 주고, 옆에서 걱정해 주고…… 그런 것들. 당신은 그런 일들을 많이 겪어 봤을 거 아니야. 궁금하다고.”
자일스는 잠시 침묵했다. 그때 일을 잠시 회상 중일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시간이 걸릴 거라는 건 나도 이해했다. 그의 나이가 정확히 얼만지는 몰라도, 10년도 훨씬 넘은 과거의 일일 테니까.
하지만 그의 대답은 나를 실망시켰다.
“너무 오래전 일이라 기억이 가물가물해.”
“그런 게 어디 있어? 마사지하는 법은 안 까먹었잖아.”
“내게 꼭 필요한 것들을 제외하곤 머릿속에서 다 사라졌어. 내가 의도적으로 잊으려 했지. 내게 주어진 일들을 하면서 그런 기억들을 품에 껴안고 있으면 그만 미쳐 버릴 것 같았으니까.”
“……그럼 어릴 적에 있었던 일들은 거의 다 잊은 거야?”
“적어도 열세 살 이전의 기억들은 없어.”
그럼 그 전까지가 그의 인생에서 가장 풍요롭고 행복한 때였을까? 그러니까 잊어버렸겠지. 자일스가 했던 일들은 자기 자신의 정체성을 직접 부정하고 뒤바꾸는 일이나 마찬가지였다. 그가 한때 속해 있던 풍경을 제 손에 든 칼로 난도질한 거니까.
나는 자일스 대신 내가 혁명군이 되었다면 어땠을까 생각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훨씬 더 잘했을 것 같다. 내겐 잊어 먹으려고 노력할 기억도 없었다. 그리고 그들을 애초에 사랑하지도 않았고.
그런 생각을 하던 내 입에서 불쑥 질문이 튀어나왔다.
“그럼 당신은 뭘 보고 버텼어?”
“뭐?”
“아니, 보통 힘든 시간을 견디려면 그런 게 필요하잖아. 나를 버티게 해 줄 정도로 간절한 소원이나 만족스러운 기억 같은 거. 예를 들면 나는 날 만지려고 한 새끼를 겁에 질리게 만든 적이 있었는데, 그 생각만 하면 어쩐지 살아갈 힘이 나더라고. 그 표정만 떠올리면 뭐든지 할 수 있을 것 같았어. 그 자식, 나름 공작이었거든.”
어쩌면 자일스가 알 수도 있을 것 같아서 나는 눈을 떴다. 그리고 그와 눈을 마주치며 물었다.
“혹시 알아? 요한 마이어라고.”
“군인이 되기 훨씬 이전부터 알고 있었어.”
“아니, 그러니까 내 말은…… 당신이 그 사람도 체포했어?”
“내 담당은 아니었어. 하지만 그가 죽었다는 건 알고 있다.”
“아마 벌벌 떨었을 거야, 그놈은. 내가 위협 같지도 않은 위협 좀 했다고 놀라서 움직이지도 못하던 놈이거든. 아무튼, 당신한테도 그런 게 있었을 거 아니야? 버틸 만하게 만들어 주는 것.”
제 손을 내려다보고 있던 자일스의 눈길이 내 쪽으로 옮겨 왔다. 그가 나를 잠시 쳐다보았다. 길고도 짧은 시간이 흐른 후에, 그의 시선이 다시 떨어졌다.
“생존할 수만 있다면 뭐든 할 수 있었어. 그게 다야.”
“뭐, 당신한테는 다행인 일이네. 결국에는 살았잖아.”
“그래. 나 혼자 살았지.”
그의 어조가 퍽 자조적이었다. 나는 그의 말에 어딘가 잘못된 구석이 있다고 생각했다.
“당신만 산 거 아니야. 나도 살았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