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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을 사랑한 건 살아남기 위해서였다-30화 (30/93)

<30화>

“아, 안나. 여기서 또 만나네.”

앨버트였다. 그는 차벽에 기대어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내가 가까이 다가가자 앨버트는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서 꺼 버렸다.

그는 내 안색을 살피더니 말했다.

“좀 피곤해 보이는데.”

“머리가 아파.”

“그 남자는 만났어?”

두말하면 입 아플 소릴. 앨버트 또한 대강 눈치를 챘는지 굳이 내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어때? 다시 만나 보니까. 네가 아는 그 사람이 맞아?”

나는 대답하기 전에 자일스 헤센의 모습을 머릿속으로 그려 보았다. 잠에서 깬 지 얼마 되지 않아 몽롱했던 일들이 다시금 선명하게 내 머릿속을 채웠다.

그가 내게 사과하던 모습이 떠올랐다. 증오가 고스란히 담긴 말들을 말없이 받아 내며 짓던 표정도…….

나는 솔직하게 말했다.

“잘 모르겠어.”

“모르겠다는 건 무슨 뜻이지?”

나는 고개를 흔들며 팔짱을 낀 채로 바깥 풍경을 바라보았다. 하필이면 지금 여기서 앨버트와 자일스 얘기를 하게 될 줄은 몰랐다.

“내가 기억하던 것과는 완전히 다른 사람 같아.”

“어떤 의미에서?”

“그냥…… 내가 뭔가를 오해하고 있지는 않았나, 그런 생각이 들어. 그동안은 자일스와 제대로 된 대화를 나눌 일이 없었으니까. 난 분명 그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나는 고민 끝에 내 진심을 털어놓았다.

“그와 이야기를 다시 해 봐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

“그래서 뭘 하게?”

앨버트가 시큰둥하게 물었다. 그는 이제 작은 휴대용 거울을 꺼내들고는 머리 모양을 정돈하고 있었다. 필시 내 이야기에 관심이 없는 거다.

“난 모든 것이 내게 불리할 때 자일스를 처음 만났어. 자연히 그는 내게 공포의 대상이 되었고. 그러다 보니 내 머릿속에서 그는 괴물로 자라났어. 하지만 만약 그가 그렇지 않다면, 그건 바로잡아야 하는 거잖아.”

“이제 와서?”

“그게 무슨 소리야? 난 악몽 때문에 수개월을 고통받아야 했어! 이건 나를 구하기 위한 일과도 같단 말이야. 그가 나와 똑같은, 그저 평범한 사람이라는 걸 알았다면…….”

“평범한 사람?”

앨버트는 소지품을 품에 집어넣곤 내 쪽으로 뚜벅뚜벅 걸어왔다. 나는 나보다 한 뼘은 더 큰 그를 올려다보았다. 곤란하다는 듯 한숨을 쉬던 앨버트가 입꼬리를 끌어 올려 웃었다.

“안나, 그 자식이 너를 제대로 홀려 놨구나. 평범한 사람이라고? 자일스 헤센이? 내가 그에 대해 한 번 설명해 주지 않았었나? 채 이틀도 되지 않은 것 같은데.”

“그가 배신자가 된 일을 말하는 거야?”

“헤센은 알고 지내던 지인들은 물론이고 친구들까지 깡그리 잡아다 족친 놈이야. 자신도 벨담인인 주제에 가장 열성적인 벨담 출신 학살자가 되었다고. 이런 사람을 우리가 평범하다고 말할 수 있는 건가? 응?”

나는 눈을 감았다. 그리고 차분하게 말하려고 애썼다.

“난 내가 그에 대해 오해하고 있었던 부분에 대해서 말하는 거야.”

“네가 뭘 오해했는데? 넌 그놈을 제대로 본 거야! 죽어 마땅한 개자식이지, 네 표현을 빌리자면. 안나, 뭔가 착각하고 있는 것 같아서 말해 줄게. 너도 벨담 출신 귀족이었어. 그건 기억하고 있지?”

그가 오른손으로 총 모양을 만들어 내 이마를 겨누었다.

“네가 사생아라는 이유로 박해만 받지 않았더라면, 헤센은 너마저도 죽였을 거야. 곱게 죽이지도 않았겠지. 네게서 더 많은 정보를 뽑아낼 때까지 살을 지지고, 고문을 하고…….”

“그만해.”

“……결국은 이렇게 했을 거라고.”

탕! 그가 총소리를 흉내 내며 총 쏘는 시늉을 했다. 그리곤 평소의 다정한 웃음을 지어 보이며 내게서 몇 발자국 물러났다.

“잘 생각해 봐. 네가 정말로 그에 대해 오해하고 있었는지 말이야. 뭐, 네가 어떻게 생각하든 간에 헤센은 절대 네 곁에서 떨어지려 하지 않겠지만.”

앨버트는 그 말만을 남기고 발코니 칸을 떠났다. 그가 부르는 콧노래 소리가 점점 멀어지더니 이내 사라졌다.

나는 의자 위에 주저앉았다. 그리고 앨버트가 내게 했던 말들을 곱씹었다. 그는 틀린 말을 하지 않았다. 내가 여느 평범한 귀족처럼 지낸 여자였더라면 그의 손에 죽었을지도 몰라.

하지만…… 그건 일어나지 않은 일이었고, 현실의 자일스는 나를 살리는 쪽을 택했다.

앨버트는 내가 그에게 호의적인 마음을 갖게 될까 봐 염려하는 듯했다. 하지만 난 그저 진실에 기대기를 원할 뿐이다. 그럼으로써 내가 오래된 악몽에서 벗어날 수만 있다면. 내가 누군가를 직접 죽이게 되는 일을 막을 수만 있다면…….

나는 객실로 돌아갔다. 하지만 그곳은 비어 있었다. 자일스 대신 쪽지 한 장이 테이블 위를 지키고 있었다.

나는 쪽지를 집어 들었다.

「곧 저녁 시간이야. 먹고 와.」

시간이 벌써 그렇게 되었나? 하긴, 바깥에는 벌써 황금빛 노을이 내리쬐고 있었다. 나는 쪽지를 만지작거리다 그것이 두 겹으로 겹쳐져 있음을 알아챘다.

뒤에 숨겨져 있던 쪽지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혹시라도 동행이 필요하다면, 십 분 안에 돌아올 테니 기다려도 좋아.」

나는 실없는 웃음을 터뜨렸다. 아마 이게 그가 진정으로 하고 싶은 말이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사람들이 식당 칸으로 향하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가만히 그 소리를 듣다가 침대 맡에 앉았다. 그리고 내 동행인이 될 남자를 기다렸다.

*

자일스는 안나가 갖고 있던 총을 수첩에 그려 보았다. 익숙한 피스톨이었기에 쉽게 기억해 낼 수 있었다. 이것은 시중에서 구할 수 있는 권총이 아니었다. 오직 군용으로만 생산되는 무기였다.

자일스는 벨담 장교 혹은 요원들이 M1912 모델을 자주 쓴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누군가가 안나에게 이 권총을 제공했다면, 제공자는 반드시 그쪽과 관련 있는 사람일 가능성이 있었다.

호신용으로 준 것이든, 혹은 누군가를 제거할 목적으로 준 것이든…… 어느 쪽이든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건 이 권총을 제공받은 안나는 최소한 표적이 아니라는 거였다. 혹은 이곳에 안나를 지키고 싶어 하는 누군가가 있었다.

그 사실만으로도 안심이 되었다. 이 유령 기차는 안나에게 관심이 없다. 그녀를 해할 목적으로 태운 것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남은 답은 한 가지뿐이었다.

자일스 헤센은 그가 지금부터 해야 할 일을 알았다.

*

자일스는 10분도 되지 않아서 다시 돌아왔다. 그는 내가 기다릴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던 건지 놀란 눈치였다.

“안나. 음, 그러니까…….”

그는 확신 없는 목소리로 뜸을 들였다.

“혹시……?”

“혼자 식사하기 싫어. 청승 떠는 것 같잖아.”

자일스는 군말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우리는 더 말하지 않고 함께 만찬장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벌써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나는 이 승객들이 전부 자일스를 위해 준비된 승객들임을 알았다. 그들이 자일스의 이력을 알기만 하는 건지, 혹은 앨버트처럼 그를 증오하는지까지는 잘 모르겠다.

어느 쪽인지 몰라도, 승객들은 우리를 전혀 모른 체했다. 아마도 그러라고 명령을 받았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들 입장에서는 자일스가 위협을 느껴서 좋을 것이 하나도 없을 테니까.

나는 그를 데리고 빈자리에 착석했다. 급사가 다가와 메뉴판을 가져다주었다. 나는 메뉴판을 보자마자 곤란함을 느껴야만 했다.

“어…….”

나도 모르게 내 입에서 멍청한 소리가 나고 말았다. 난 급히 목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메뉴판에 쓰여 있는 글자들을 노려보았다. 하지만 내가 아는 음식보다는 모르는 음식이 훨씬 더 많았다.

앨버트 앞에서라면 안 그랬겠지만 하필이면 자일스가 내 앞에 앉아 있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부끄러웠다. 그가 앞에 있으니까 사소한 일에도 신경을 쓰게 되었다.

“왜 그러지?”

자일스가 나를 의아한 눈길로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그냥 사실을 말하기로 결정했다. 그가 내 과거를 모르는 것도 아니고.

“뭘 골라야 할지 모르겠어.”

나는 메뉴판을 그에게 떠넘겼다.

“당신이 골라 줘. 아무거나 적당한 걸로.”

자일스는 군말 없이 메뉴판을 받아 들었다. 젠장, 그와 함께 식사를 하러 온 건 정말 잘한 선택이었다. 안 그랬으면 정말이지 급사에게 메뉴를 골라 달라고 할 뻔하지 않았나.

자일스가 메뉴를 살펴보는 동안 나는 일부러 딴청을 피웠다. 이건 내 잘못이 아니었다. 오히려 내가 음식의 이름을 물어보기만 하면 인상을 찌푸리곤 했던 비스마르 백작 부부에게 책임이 있을 거다.

“해산물 좋아해?”

그가 물어 왔다. 난 해산물을 먹어 본 적이 없었다.

“그거 말고 다른 건 없어?”

“글쎄. 지금껏 먹어 봤던 음식 중에 마음에 들었던 것들을 말해 봐. 비슷한 걸로 골라 줄 테니까.”

아, 그래. 내가 이름을 아는 요리가 있기는 했다. 나는 생각나자마자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파스타 좋아해. 크림소스 들어간 걸로.”

“그거면 되나?”

“다른 건 필요 없어.”

급사가 우리 쪽으로 다가왔다. 자일스는 요리 이름을 대며 능숙하게 주문을 했다. 급사는 고개를 끄덕이며 메뉴판을 다시 가져갔다.

다시 우리 둘만 남았다. 나는 그가 물어보기 전에 먼저 선수를 쳤다.

“저택을 나간 이후에도 바깥에서 외식한 적이 별로 없어서 그래. 이런 식당 음식 같은 건 잘 몰라.”

자일스는 그냥 고개만 끄덕이고 말았다. 생각해 보니 그는 다 알고 있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려 들었으니 말이다.

“난 네가…… 나와 식사하고 싶어 하지 않을 줄 알았는데.”

그가 말했다. 나는 믿을 수가 없어졌다. 자일스 헤센이 내 눈치를 보고 있었다. 그를 두려워했던 시절에는 전혀 상상도 못 했던 일이었다. 그가 너무나도 평범한 사람처럼 보여서, 나는 잠시 할 말을 잊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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