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을 사랑한 건 살아남기 위해서였다-29화 (29/93)
  • <29화>

    나는 움직임을 멈추고 그 자리에 그대로 굳었다. 나는 이 목소리를 알았다. 내 아버지가 나를 찾고 있었다. 어떻게 해야 하지? 숨어야 하나? 하지만 이 방에는 숨을 곳이 없었다. 오직 좁은 방에 나와 피아노 한 대뿐이었다.

    이윽고 그가 문을 두드리며 소리를 질렀다.

    “이 방에 있는 거 다 안다! 빨리 나오지 못해? 이번에야말로 그 손마디를 분질러 주겠다! 개같은 년이 키워 준 은혜도 모르고 내게 이런 식으로 되갚아? 애초부터 너를 쥐도 새도 모르게 없애 버렸어야 했어! 네가 모든 악재의 원흉이야! 네가 죽어야만 모든 게 정상으로 되돌아오겠지! 오늘은 기필코 내 손에 죽게 될 거다!”

    나는 최대한 문에서 멀어져 벽에 붙었지만 그럴수록 그의 목소리가 점점 커지더니 머리를 울릴 정도가 되었다. 나는 바닥에 주저앉아 두 손으로 귀를 막았다. 하지만 내 머릿속을 장악한 목소리는 좀체 줄어들 생각을 하지 않았다.

    사악한 년! 악마 같은 년! 때려죽일 거야! 너를 죽이고 말 거야!

    쾅쾅쾅! 그가 쉴 새 없이 문을 두드렸다. 문이 곧 부서질 것 같았다. 그에게 맞은 상처가 벌써부터 아려 오는 것 같았다. 몸을 움츠리고 덜덜 떨던 나는 소리 내어 울었다.

    그러면서도 이상하다는 생각을 했다. 아닌데. 나는 과거에 단 한 번도 그 앞에서 운 적이 없었는데. 나는 분명히 괜찮았어. 버틸 수 있었다고.

    그런데 내가 왜 이러고 있는 거지?

    그의 목소리가 멈추지 않았다. 엘로이즈! 엘로이즈, 이리 나와!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이러다간 그의 말대로 정말 죽고 말 것만 같았다.

    그때였다. 문을 두드리던 소리가 뚝 끊겼다.

    동시에 전혀 다른 목소리가 내 이름을 불렀다.

    엘로이즈가 아닌 전혀 다른 이름을…….

    “릴리?”

    나는 눈을 번쩍 떴다. 나를 죽이겠다고 고함을 지르던 아버지는 온데간데없었다. 대신 자일스 헤센이 거기 있었다. 빳빳한 제복을 차려입고서, 늘 그랬듯 멀끔한 모습으로. 릴리를 만나러 오던 과거 그대로의 자일스였다.

    군인이라면 누구라도 체포하고 싶어 할 게 분명한 귀족의 핏줄을 몇 번씩이나 만나러 오는 장교라니. 나는 예전에 그랬듯, 몸이 본능적으로 뻣뻣하게 굳는 것을 느끼면서 그를 향해 다가갔다.

    웃어야 한다는 걸 알지만 그게 마음대로 되질 않았다.

    내가 웃지 않으면 그는 기뻐하지 않을지도 몰라.

    이제 난 어떻게 되는 거지?

    하지만 자일스는 내 표정이 어떻듯 전혀 상관하지 않는 것 같았다. 그는 가방을 내려놓고 나를 잠시 바라보더니 옆구리에 끼고 있던 담요를 내 어깨에 둘러 주었다.

    과거에 있었던 일이 다시 재현되고 있었다…….

    “혼자 있는 동안 춥지는 않았어?”

    “괜찮아요.”

    “손이 다 텄잖아.”

    “예전부터 이랬어요.”

    그는 가방 속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커다란 박스 뚜껑을 열자 온갖 과일이 모습을 드러냈다. 탐스러운 진짜 과일을 보는 건 정말 오랜만이라, 나도 모르게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쳐다보았다.

    “자, 먹어.”

    그가 내게 과일 박스를 건네었다. 나는 과일들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과일을 먹지 못한 지 오래되어서 이제는 과일에서 무슨 맛이 나는지조차 잊어버렸다. 단맛인지, 혹은 쓴맛인지…….

    나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청포도를 한 알 따서 입에 넣었다. 포도 알을 깨물자마자 달콤한 과즙이 입 전체로 퍼졌다. 그냥 달콤하기만 한 수준이 아니었다. 몸 전체로 전율이 퍼져 나갔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모든 게 새로 태어나는 기분이었다.

    나는 과일에 정신이 팔려서 손에 집히는 대로 허겁지겁 입 안에 쑤셔 넣었다. 그러다가 문득 내 모습이 예쁘게 보이진 않을 거라는 사실을 깨닫곤 그의 눈치를 보았다.

    그 순간이었다. 포도 알 하나가 손 위에서 미끄러져 바닥을 굴렀다. 오랫동안 청소를 하지 않아 먼지가 낀 바닥 위를 말이다.

    그가 비싼 과일을 가져왔는데 난 그걸 놓쳤다. 나는 완전히 겁에 질려서 얼어붙어 버렸다. 교육을 받던 시절, 포크질을 잘못해서 음식을 놓쳐 버렸을 때의 기억이 되살아났다.

    하지만 자일스는 나를 노려보지도, 내 뺨을 때리지도 않았다. 대신 그는 몸을 굽혀 포도 알을 줍더니 살짝 열린 창 밖으로 가볍게 던졌다.

    “혹시 알아, 내년에는 이 근처에 포도나무가 자라게 될지.”

    그가 농담을 했다. 내가 긴장했다는 사실을 안 그가 나를 달래기 위해 일부러 농담을 꾸며 내었다는 사실조차 몰랐던 나는 더듬거리며 사과했다.

    “죄, 죄송…….”

    “괜찮아. 누구나 하는 실수잖아.”

    나는 계속해서 사과하기 위해 입술을 달싹이다 멈추었다.

    순간적으로 제정신이 돌아왔다. 나는 더 이상 릴리 벨모어가 아닌 현재의 나 자신으로 돌아와 있었다. 그래, 맞아. 이런 건 아무나 하는 실수야. 내가 왜 어쩔 줄 모르며 사과해야 하는 거지? 그건 그냥 작은 포도 알 하나일 뿐이었어.

    하지만 그땐 그래야만 했다. 나는 자일스가 무서웠고, 내 몸은 작은 실수에도 벌을 받는 데에 익숙해져 있었다. 그래서 자일스가 언제라도 내게 벌을 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나는 입을 다물고 자일스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자일스 또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예전 그대로의 모습이었지만 내 상상 속에서 변질되었던 모습과는 너무나도 다른 사람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에게선 음모나 탐욕의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아버지나 요한 마이어가 나를 볼 때 그리했던 것처럼 내 몸을 위아래로 훑어보며 상품 가치를 매기지도 않았다.

    그는 그냥…… 내가 과일을 먹는 모습을 보는 게 흐뭇했던 거다.

    두려움이 한 꺼풀 걷힌 시선으로 그를 다시 바라보니 당황스러울 정도로 정상적인 현실이 그곳에 있었다.

    나는…… 나는 그동안 무엇을 두려워했던 거지?

    그가 나를 걱정스러운 눈길로 바라보고 있었다…….

    “안나, 괜찮아?”

    나는 언제나 네가 괜찮기를 바라.

    생각해 보면 처음부터 그랬다. 자일스는 한 번도 내게 복수하려 든 적이 없었을 것이다. 두려움에 사로잡혀 그를 괴물로 만든 건 오히려 나였다. 어쩔 수 없었다. 나는 너무나도 무서운 일들을 많이 겪었으니까.

    그런 일이 또 일어날까 봐 걱정할 수밖에 없었던 건 내 잘못이 아니었다.

    안나. 그가 방금 나를 안나라고 불렀던가?

    그 사실을 깨닫는 순간 꿈과 현실의 장벽이 무너져 내렸다. 나는 눈을 떴다. 소리 내어 울었던 건지, 내 얼굴이 눈물로 엉망이 되어 있었다.

    “안나?”

    그리고 내 울음소리를 듣고 온 자일스가 가까이에서 나를 살피고 있었다. 꿈속에서, 아니, 과거의 한 장면 속에서 보았던 그의 모습과 너무나도 똑같은 얼굴이었다.

    나는 결국 울음을 참지 못했다. 그는 처음부터 내게 진실되지 않은 적이 없었을까? 그래, 그랬을 것이다. 그가 나를 특급열차까지 쫓아온 건 내게 복수하거나 벌을 주고 싶어서가 아니었다.

    목숨을 위협받는 한이 있더라도 그는 언제나 내게 달콤한 과일을 주고 싶어 했다.

    저택을 방문할 때도, 그리고 지금도…….

    자일스, 내가 당신을 믿어도 될까?

    당신만은 다른 사람들과 다를 거라고 믿어도 될까?

    “미안해.”

    그가 내 눈물을 닦아 주며 나직이 말했다.

    “미안해, 안나. 내가 여기 들어오는 걸 좋아하지 않을 거라는 건 알지만…….”

    “가지 마.”

    내가 울음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여기 있어. 날 위해 그 정도는 할 수 있잖아.”

    “……그래. 아무 데도 안 갈게. 걱정하지 마.”

    “난 두려웠어. 네가 다른 놈들이랑 똑같을까 봐 무서웠다고. 난 같은 일을 또다시 반복하고 싶지 않았을 뿐이야. 그게 다야. 나는, 난…….”

    “안나, 괜찮아.”

    그가 나를 다독이며 말했다. 나는 횡설수설하던 것을 멈추고 숨을 몰아쉬었다. 베개 속에 얼굴을 파묻고 나서도 여전히 그의 존재감이 곁에서 느껴졌다.

    “괜찮아. 괜찮을 거야.”

    그가 계속해서 말을 건네 왔다.

    놀랍게도 그의 그런 행동이 나를 안심시켜 주었다. 내가 스스로 나를 다독이지 않아도 되었으니까.

    다른 사람의 목소리로 그런 말을 듣는 건…… 훨씬 커다란 효과가 있었다.

    그래서 나는 잠자코 그가 하는 말들을 들었다.

    이윽고 정말로 내가 괜찮아질 때까지.

    *

    안나는 다시 잠들었다. 자일스는 그녀가 곤히 잠에 든 모습을 곁에서 지켜보다 고개를 돌렸다. 이번에는 악몽을 꾸지 않는 것 같아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무슨 꿈을 꾸었을까. 혹시라도 자신에 대한 꿈을 꾸었던 것일까?

    그는 이불을 끌어 올려 안나의 어깨 위로 덮어 주었다. 아무렇게나 벗 어던진 낡은 코트가 침대 위에 널브러져 있었다. 그는 코트를 옷걸이에 걸기 위해 그것을 집어 들었다.

    묵직한 무게감이 느껴졌다. 그냥 일반 소지품이라기에는 너무 무거웠다. 그 순간 뭔가를 기억해 낸 자일스는 안주머니를 더듬어 그 안으로 손을 넣었다. 딱딱하고 차가운 것이 손에 잡혔다. 익숙한 감촉이었다. 자일스는 검게 빛나는 물체를 주머니 밖으로 꺼냈다.

    그것은 권총이었다. 안나가 그에게 겨누었던 바로 그 총이 맞았다. 하지만 자일스는 그뿐이 아님을 곧바로 알아챘다.

    그는 권총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

    잠에서 다시 깼을 땐 자일스가 사라져 있었다. 나는 머리를 부여잡고 몸을 일으켰다. 다행히 꿈을 다시 꾸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지만 그 대신에 머리가 깨질 것처럼 아파 왔다.

    잠시 바깥바람을 쐬어야 두통이 가실 것 같았다.

    나는 겉옷을 대충 걸치고 바깥으로 나갔다. 기차에는 발코니 칸이 있었다. 나처럼 맑은 공기를 필요로 하는 승객들을 위해 마련된 칸이었다. 그곳에는 벌써 한 사람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