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화>
이윽고 내가 먼저 말을 꺼냈다.
“당신은 아직 내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어.”
“…….”
“왜 이 기차에 탔냐고 물었잖아.”
“……네 안위가 염려되었으니까.”
“우리가 입스윈 땅에서 벗어나고 있다는 건 알고 있지?”
“알고 있어.”
“자일스. 당신에게는 적이 많다고 들었어. 입스윈을 벗어나는 순간 위험에 노출된다는 사실도.”
“그래. 전부 사실이야.”
“그런데도 서슴없이 외국으로 떠나는 기차에 탔다는 게 이해가 안 돼서 그래.”
그건 진심이었다. 내가 그가 잘못될까 봐 걱정한다는 건 아니지만, 대체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는 알고 싶었다. 왜냐하면, 나였다면 절대 그런 결정을 내리지 않았을 테니까. 다른 한 사람을 위해 제 목숨을 물가에 내놓는 짓 따윈 말이다.
“자기 자신을 위험 속으로 몰아붙이면서까지 나를 쫓아오고 싶었어? 도저히 날 포기할 수 없었던 거야?”
“……진실을 원하는 것 같으니 말해 줄게. 맞아. 네가 생각하는 대로야.”
나는 눈을 감았다. 내 앞에 앉은 남자를 대면하는 건 예전만큼 두렵지 않았다. 이제 나는 언제든지 도움을 요청할 수 있으니까. 이 기차에 탄 사람들 전부가 내 편이었다. 그러니까 나는 더 이상 무서워할 필요는 없었다.
다만 그저 지긋지긋할 뿐이었다. 그라는 사람이 지긋지긋했다. 정말이지 그를 내 인생에서 떼어 놓고 싶었지만 그는 물러설 생각이 없었다.
“왜…… 하필 나야?”
내가 짓씹어 뱉듯이 물었다. 자일스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나를 포기할 수 없게 만드는 게 뭔데? 아니면 나를 체포하라는 명령이라도 받은 거야? 그것도 말 되네. 난 여전히 당신들의 적이잖아. 그렇지?”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거야. 내가 가만히 보고 있지만은 않을 테니까.”
“사탕발림은 그만하고 정말 네 머릿속에 뭐가 들었는지 말하라고!”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던 나는 주먹으로 테이블을 내리쳤다. 이윽고 무거운 정적이 나를 짓눌렀다. 그런 나를 바라보는 자일스는 어딘가 슬퍼 보였다. 그런 표정마저도 증오스러웠다. 모든 게 다 가식이고 거짓말 같아서였다.
앨버트가 내게 기대한 건 전혀 다른 것이었겠지만 어차피 난 그가 기대하는 일은 할 수 없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일은 자일스와 대화하는 것이었고, 나는…… 진심으로 그의 속내를 알고 싶었다.
“안나.”
“이제 아무것도 숨길 필요 없어. 난, 난 받아들일 준비가 됐으니까. 당신은 처음부터 날 속일 필요도 없었어. 왜 그래야 해? 어차피 난 힘없는 도망자 신세일 뿐이잖아. 차라리 그냥 말해. 머릿속으로 생각해 왔던 걸 그냥 말해 버리라고.”
“안나, 너는 마치…….”
자일스의 목소리는 언제나 그랬듯 냉정하고 차분했다. 하지만 나는 그의 눈동자 속에서 동요하는 감정을 엿볼 수 있었다.
“너는 마치 내가 너에게 악감정을 품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겨워하는 것 같아.”
그게 무슨 말이지? 나는 잠시 그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는 거짓말을 하고 있다. 나는 확신했다. 지금껏 내가 만난 남자들은 다 그랬다. 그런데 자일스는 내가 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한다는 것처럼 말하고 있었다.
“그게 악감정이 아니라면, 뭔데?”
“……무슨 뜻이지?”
“당신은 몇 개월 동안이나 내 뒤를 쫓았잖아. 이게 악감정 때문이 아니라면 뭐냔 말이야.”
“네게 앙심을 품어서가 아니야. 이전에도 말했지만…… 나는 네가 다른 위험에 처했다고 생각했었어. 그래서 네 행적을 추적하고, 주변 인물들을 조사한 거야. 나는 네가 안전하길 원했으니까.”
“당신이 왜 내 안전을 걱정해? 내가 당신한테 뭐라고!”
“너는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내게 있어서 너는 절대로 다치게 놔두고 싶지 않은 유일한 사람이야.”
나는 도저히 자일스를 이해할 수가 없어서 잠시 말을 멈추고 그를 쳐다보기만 했다.
“내가 당신한테 뭘 했는데? 난 그냥 버려진 저택에 숨어 있던 여자에 불과했잖아. 난 당신에게 아무것도 해 준 게 없어. 그래, 당신의 비위를 맞춰 주기는 했지. 하지만 그건 내가 연기한 거야. 릴리 벨모어는 애초에 존재하지도 않는 애라고. 아직도 내게 그런 걸 기대하고 있다면 이제 그만 포기해. 난 전혀 그런 사람이 아니니까.”
“네가 어떤 사람이든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아.”
“그럼 당신이 나를 원하는 이유가 대체 뭔데?”
자일스의 입술이 뭔가를 말하려는 듯 달싹였다. 나는 잠시나마 그에게 집중했다. 그가 드디어 진실을 말하려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쩐지 그의 눈가가 이전보다 붉어 보였다. 선뜻 입을 열지 못하던 자일스가 미세하게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너는…… 내가 살렸으니까. 그 사실 하나만으로 넌 내게 유일무이한 단 한 사람이야. 너는 내가 본래 어떤 사람인지 잊게 해 주니까. 네 얼굴을 보고 있으면 나를 둘러싼 현실에서 잠시나마 벗어날 수 있었으니까. 너는…… 내가 유일하게 내린 옳은 선택이었으니까.”
그의 표정이 너무도 슬프고 비참해 보여서 나는 순간적으로 그가 울고 있다는 착각을 했다. 하지만 그는 울지 않았다. 눈물의 흔적 따윈 보이지도 않았다.
자일스가 말을 이었다.
“하지만 네게는 전혀 그렇지 않았던 것 같다. 내가 평화로운 착각 속에 빠져 있는 사이 너는 나를 향한 공포에 사로잡혀 있었다고 말했지. 우리는 분명 한곳에 함께 있었지만, 서로 전혀 다른 장소에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어.”
나는 잠자코 그의 말을 들었다. 어느 순간부터 그가 한없이 낯설게만 느껴졌다. 분명 내 앞에 있는 건 자일스 헤센이었다. 내가 알던 그 자일스 헤센. 하지만 동시에 그는 전혀 다른 사람 같아 보였다.
마치 오늘 처음 만난 사람처럼, 그의 이목구비를 비롯한 모든 게 생소하게 다가왔다.
“미안하다. 나는 이기적이었어. 내 안위만 챙기기에 바빴지. 그래서 네게 큰 잘못을 저지르고 말았다. 이제야 그 사실을 깨닫게 되어서…… 정말 미안해.”
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의 사과를 받아 주지도 않았지만 분명히 거짓말을 하는 거라며 그를 비웃지도 않았다. 잠시 내 머릿속은 텅 비어 버렸다.
그 누구도 이런 식으로 거짓말을 할 수는 없다. 그럼 애초부터 자일스의 본심이, 내가 원하던 진실이 이런 거였단 말인가?
애초에, 그는 내게 앙심을 품은 적도 없었고, 내게 비열한 욕망을 품은 적도 없었다고? 그저 내가 살도록 내버려 두었기 때문에 나를 애틋하게 여기게 된 거라고?
그의 말이 맞았다. 나는 이런 일에 면역이 없었다. 누군가가 내게 순수한 호의를 베풀면서 끝까지 그 마음을 오염시키지 않는 일 말이다. 그런 일은 단 한 번도 겪어 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아직까지도 받아들이기가 힘들었다.
내가 안전하기를 바랐다고?
그냥, 그게 다란 말인가?
“……어떻게 나를 그리 대할 수 있는 거야? 난 귀족의 딸이고, 당신은 혁명군 장교잖아. 애초에 처음부터 나를 살려선 안 되는 거였잖아. 지금도 마찬가지로 내가 안전하기를 바라선 안 되는 거잖아.”
“나는 이미 너무 많은 사람을 해쳤어. 네가 특별했기 때문에 널 살렸던 건 아니야. 그저 그때 나는 너무 지쳐 있었고, 너를 잡아가고 싶지 않았어. 너를 체포하는 일이 아무 의미 없는 일이라 생각했지.”
“그게 끝이야?”
그는 모든 걸 말했다. 더 이상 내게 털어놓을 것이 그에게는 남아 있지 않았다. 나는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내가 죽기를 원하지 않는 남자. 내가 살기를, 그것도 안전하기를 바라는 남자……. 그는 대가를 바라지 않았다.
그저 충동적으로 내린 결정에 의해 살아남은 내 목숨이 그에게는 너무나도 소중해져서, 혹여 그가 살려 낸 불씨가 꺼지기라도 할까 봐 전전긍긍하고 있었던 거다.
보잘 것 없는 불빛이라도 사라지고 나면 흑암 속에 홀로 남아야 하니까.
그의 말을 머리로는 이해했지만 여전히 나는 자일스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언제나 그래 왔듯이, 나는 사람을 쉽게 사랑하지 않았다. 마음을 헤프게 주면, 그만큼 상처를 받게 되니까.
믿지 않는다기보다는 그를 믿는 것이 두려웠다. 나는 어릴 적 이후로 누군가를 진심으로 믿어 본 적이 거의 없었다. 왜냐하면 섣불리 신뢰를 주었다가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직접 겪어 보았으니까.
내가 자일스를 믿는다면, 그다음에 일어날 일은 뭐지?
그리도 다정한 말들을 건네주고 내게 친절을 베풀었던 앨버트조차 결국엔 나를 이용하기 위해 접근했었다. 그렇다면 자일스는?
나는 더 이상 실망하고 싶지 않았다. 마음을 주지 않는다면 실망할 일도 없을 것이다. 그가 그랬듯이, 나는 충분히 지쳐 있었다.
그래서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가 떠나는 동안 자일스는 나를 붙잡지 않았다. 그저 나를 가만히 내버려 둘 뿐이었다.
그와 잠시 대화를 나눈 게 전부였지만 너무 피곤했다. 지금 당장은 아무런 생각도 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머리를 조금 비울 필요가 있었다.
마찬가지로 아무도 만나고 싶지 않았던 나는 고요를 찾아서 내 객실로 돌아갔다.
나는 방에 홀로 앉아서 피아노를 연주하고 있었다. 이건 내가 가장 좋아하는 연주곡이다. 서정적인 멜로디가 마음에 들기도 했지만, 이 곡을 연주하고 있으면 마음을 쉽게 가라앉힐 수 있었다.
사실은 대부분의 연주곡들이 그랬다. 서서히 진행되는 음악에 집중하다 보면 나는 점차 그 세계에 빠져들었고, 다른 잡념들은 생각할 필요가 없어졌다. 오직 나와 음악만이 남게 되었으니까.
건반을 누르며 피아노와의 시간을 보내고 있던 그 때, 갑자기 익숙한 목소리가 내 귀를 때렸다.
“엘로이즈! 이년이 또 어딜 간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