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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을 사랑한 건 살아남기 위해서였다-27화 (27/93)
  • <27화>

    그는 항변하듯이 말했다.

    “하지만 난 절대 그러려고 한 적이 없었어.”

    “무슨 소리야?”

    “안나. 난 네가 건강한 모습을 되찾아 가는 게 좋았어. 네가 제대로 된 음식을 먹고, 혈색을 되찾아 가고…… 그래서 너를 계속해서 방문한 거야.”

    “당신은 그랬겠지.”

    “단 한 번도 너를 위협한 적이―”

    “위협한 적이 없었다고?”

    나는 손에 들고 있던 기물을 바닥에 내던졌다. 요란하게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난 내가 울고 있다는 사실도 인지하지 못한 채 그에게 외쳤다.

    “당신의 존재 자체가 내겐 위협이었어! 난― 당신은 내가 누군지 알았잖아! 내 정체를 알았잖아. 내가 엘로이즈라는 걸 당신은 알고 있었어! 하지만 당신은 날 살려 줬지. 나를 계속해서 찾아오기까지 했어. 필시 내게 바라는 게 있었던 거야. 당신이 무슨 생각으로 그랬던 건지는 중요하지 않아! 난 귀족의 딸이었어! 당신은 제복을 입고 허리춤에 총을 매달고 다니는 혁명군이잖아! 당신은 마음이 바뀌기만 하면 언제든지 나를 끌고 가 죽일 수 있는 존재였어. 난 당신이 단순히 변덕을 부렸기 때문에 살 수 있었던 거야. 당신 마음이 언제 다시 바뀔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어.”

    나는 숨을 고르기 위해 잠시 말을 멈추었다. 자일스는 그대로 굳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나는 그의 눈에 내가 어떻게 비칠지에 대해 잠시 생각했다. 아마 나를 미친년이라고 생각하겠지.

    “나는 당장이라도 당신이 나를 좋아하지 않게 될까 봐 전전긍긍해야만 했어. 언제나 당신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정신 빠진 년처럼 굴고, 살기 위해서 연극을 해야 했다고. 당신과 함께 하는 그 모든 순간들이 내겐 살아남기 위한 발버둥이었어. 원하는 게 없었다고? 거짓말하지 마! 모든 남자들은 내게서 뭔가를 원했어! 요한 마이어도 그랬고, 백작도 그랬다고! 말해 봐. 정말 단 하나라도 내게 바라는 게 없었는지!”

    자일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말없이 나를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나는 날것 그대로의 내면을 까뒤집어 그에게 쏟아붓는 행위를 멈추었다. 이성이 돌아와서는 아니었다. 더 이상 그에게 내 본심을 털어놓는 일이 무의미하다고 느껴져서였다.

    그는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위에 서서 내려다보는 이들이 절대 이해할 수 있을 리가 없다. 그들은 경험해 보지 못했으니까. 내가 무엇을 어떻게 느끼고 받아들였는지 모를 테니까.

    손톱만큼 남은 이성 덕에 내가 모든 걸 망쳤다는 사실 하나만은 알 수 있었다. 앨버트가 내게 원한 건 이런 게 아니었을 텐데.

    모든 게 지긋지긋했다. 미친 사람 꼴을 하고 있는 나도, 그런 내 앞에 서서 침묵을 지키는 자일스 헤센도. 나는 품속에 숨겨 둔 권총을 꺼내 그에게 들이밀었다.

    “나가.”

    다행히 그는 내 심기를 건드리지 않고 순순히 뒷걸음질을 쳤다. 그는 마지막으로 나를 한번 바라보더니, 그대로 등을 돌려 객실을 나갔다.

    나는 닫힌 문을 멍하니 바라보다 총을 내렸다. 앨버트는 내게 침대가 딸린 객실을 주었다. 평소 같았다면 기차 안에 커다란 침대가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아연실색했겠지만 지금은 그럴 기운이 없었다.

    오히려 침대가 있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고마울 지경이었다.

    나는 겉옷을 대충 벗어 던지고 침대 안으로 파고들어 이불을 뒤집어썼다.

    모든 것이 엉망이었다.

    *

    객실 밖으로 쫓겨난 자일스는 한동안 제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기만 했다. 이제는 복도를 지나다니는 승객들도 드물었다. 그는 텅 빈 복도 위에 혼자 남아 갈 곳 없는 사람처럼 고독 속을 배회했다.

    방금 무슨 일이 일어났던 거지? 미닫이 문 너머에서 일어났던 일이 아직도 눈앞에 선한 듯 생생하면서도 마치 영화 속 이야기처럼 멀게 느껴졌다.

    안나는 그에게 구원이었다. 한 번도 그렇지 않았던 적이 없었다. 그는 안나를 방문할 때마다 유일한 마음의 안식을 찾을 수 있었다. 모든 사념과 죄책감, 그를 괴롭히던 수만 가지 기억들과 감정들이 목소리를 잃고 가라앉게 만들어준 건 안나뿐이었다.

    안나 옆에서, 자일스는 전쟁 혹은 혁명이라는 이름을 가진 학살의 광경을 전부 잊을 수 있었다.

    하지만 평화로운 시간을 보냈던 건, 위안을 얻은 이는 자일스뿐이었다. 안나는 말했다. 그와 함께했던 모든 순간순간이 공포였다고……. 생각해 보면 안나는 자일스 앞에서 언제나 웃고 있었다. 자일스는 안나가 친절하고 밝은 사람이라서 그런 줄만 알았다.

    하지만 아니었다. 안나는 오직 자일스의 기분을 맞추기 위해 그 많은 시간들을 연기하고 있었던 것이다. 혁명군 제복을 입고, 허리춤에는 권총을 매달고 다니는 군인이 당장이라도 마음을 바꾸게 될까 봐 두려움에 떨면서.

    자일스는 한 손으로 이마를 짚고 벽에 몸을 기대었다. 단 한 번도 안나의 입장에서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사실은 그럴 겨를이 없었다고 봐야 했다. 스스로가 무너지지 않게끔 지탱하는 일조차 버거웠던 시절이었으니까.

    그래서 그는 이기적으로 굴었다. 안나는 전혀 틀린 말을 하지 않았다. 그녀는 귀족의 딸이었고, 자일스는 혁명군 장교였다. 당연히 안나의 입장에서는 공포스러웠을 수밖에 없었을 텐데. 그는 그러한 사실을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간과한 것일까, 아니면 스스로를 위해 안나의 입장을 무시했던 걸까?

    자일스 헤센은 비참함의 수렁 속에 빠져들었다. 그는 유일한 구원을 마련해 준 사람에게조차 공포의 대상이 되었다.

    뭐라고 말을 해 줘야 할까? 미안하다는 말? 그런 납작하고 가벼운 사과로 충분할까?

    그는 눈을 감았다. 안나는 위험에 빠져 있었다. 그녀는 출처 모를 기차에 올라탔고, 이 기차에 탄 사람들의 신원조차 불분명했다. 하지만 안나는 이미 오래전부터 위협을 느끼고 있었다. 앨버트 쇼를 만나기 훨씬 이전부터도.

    이젠 그가 안나를 무엇으로부터 지키려 했는지조차 알 수가 없었다.

    집중해, 자일스 헤센. 지금 당장 중요한 건 이 기차의 정체를 밝혀내고, 안나를 이곳에서 탈출시키는 거야. 하지만 어떻게? 안나가 가장 두려워하는 건 자일스였다.

    안나는 자일스로부터 벗어나기를 원했다.

    이 기차가 아니라.

    모든 것이 엉망으로 흩어지고 말았다. 그는 이만 객실을 등지고 한 걸음씩 멀어졌다. 지금 이 순간에도, 안나는 그에 대한 생각을 하고 있을까.

    기차가 덜컹거릴 때마다 복도를 밝히는 전등이 흐려졌다 밝아지기를 반복했다. 자일스의 머릿속도 그러했다.

    *

    나는 엉망이 된 객실에서 눈을 떴다. 창밖에서 비쳐 들어온 햇살이 눈을 찔렀다. 이불에 파묻혀 얼마 동안 그대로 잠든 모양이었다. 지금이 몇 시지? 나는 시계를 찾아 헤맸다. 다행히 침대 옆 탁자 위에 탁상시계가 놓여 있었다.

    시간을 확인한 나는 놀라서 벌떡 일어났다. 몇 시간만 잠든 줄 알았는데 꼬박 하루를 쓰러져 잠들었던 게 틀림없었다. 지금은 아침 일곱 시가 되기도 전, 이른 새벽이었다.

    배가 고팠다. 한 끼를 통째로 건너뛰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이런 이른 시간에도 식당 칸이 운영 중일까? 가 보기 전에는 모르는 일이었다. 내가 어찌해 볼 수 없었던 시절에야 배고픔을 잘 견딜 수 있었다지만 원할 때 먹을 수 있게 된 상황에서도 참기는 싫었다.

    나는 대충 옷매무새만 가다듬고 비몽사몽인 정신으로 복도를 가로질렀다. 아직 대부분의 사람들은 잠에서 깨지 않은 모양이었다. 복도를 짧게 헤맨 끝에 나는 식당으로 추정되는 칸으로 들어갔다.

    내 추측은 맞아떨어졌다. 여러 테이블이 늘어서있는 모양새가 딱 식당 칸이었다. 다만 나는 그곳에서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이를 마주했다.

    자일스 헤센이 구석 테이블에 앉아 벽에 머리를 기댄 채 자고 있었다. 잠든 그의 얼굴은 깨어 있을 때보다 훨씬 피로해 보였다. 나는 그를 얼마간 바라보다 멀리 떨어진 곳에 착석했다.

    인기척을 느꼈는지 처음에는 보이지 않던 급사가 나타나 내 쪽으로 다가왔다.

    “손님, 죄송하지만 아직 주방이 준비되지 않아서 간단한 차나 음료만 가져다드릴 수 있습니다.”

    “우유는요?”

    “가능합니다.”

    “따뜻하게 데워 주세요.”

    나는 떠나려는 급사를 다시 붙잡고 물었다.

    “저 사람, 언제부터 저러고 있었어요?”

    그 또한 내가 자일스를 언급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급사는 어깨를 으쓱여 보였다.

    “아마 지난밤부터 이곳에 계셨던 모양입니다. 굳이 깨우지는 않았는데, 잘한 선택이었겠지요?”

    “네, 잘했어요.”

    나는 건성으로 대답하고는 급사를 돌려보냈다.

    곧 유리컵에 담긴 우유가 나왔다. 그는 친절하게도 꿀까지 내게 대령해 주었다. 나는 우유에 꿀을 타서 마시면서도 시선을 자일스 쪽에서 거두지 않았다.

    그를 보고 나서야 어제 있었던 일들이 기억났다. 나는 그때 반쯤 이성을 잃고 그에게 달려들었었다.

    물론 내가 한 행동이 후회스럽다는 건 전혀 아니지만, 자일스가 아무런 대응도 하지 않았다는 건 좀 놀라웠다. 적어도 화를 내거나 나를 바닥으로 밀치기라도 할 줄 알았는데.

    그가 증오스러운 건 아직도 마찬가지였다. 정황상 그는 처음부터 내게 혐오스러운 감정을 품었던 적이 없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그건 그것대로 나를 화나게 만들었다. 내가 어떤 기분이었을지 생각도 하지 못하고, 저 혼자 꽃밭 속에서 살고 있었다는 게 아닌가.

    그동안 나는 지옥 한구석에 처박혀 있었는데.

    우유가 절반 이상 사라지고 나서야 자일스가 잠에서 깨어났다. 그는 아직 근처에 내가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한 것 같았다.

    물론 나는 여전히 그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가 오래 묵은 피로를 떨쳐 내려 노력하는 모습도, 잠시 벗어 두었던 겉옷을 다시 걸치는 모습도. 그리고…….

    자일스가 내 쪽을 보았다. 그의 눈이 서서히 크게 열렸다. 마치 이곳에서 나를 다시 만나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는 듯이. 뭐, 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설마 여기서 자고 있을 줄은 몰랐지. 하긴 자일스에게도 개인 객실이 있었다면 그게 더 이상했을 것이다.

    자일스는 무어라 말을 꺼내려다 그만 입을 다물었다. 현명한 판단이었다. 그의 구차한 변명을 들으려고 식당 칸까지 온 건 아니었으니까. 마침 우유를 다 마신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침을 먹지 못한 건 아쉬웠지만 나중에 다시 오면 될 일이니까.

    그대로 자리를 떠나려던 나는 잠시 머뭇거렸다. 생각해 보니, 나는 공짜로 이 기차에 탄 게 아니었다. 앨버트는 내가 자일스를 이곳에 붙잡아 두길 원했다. 내가 할 일은 자일스를 무시하는 게 아니라 그가 돌발적인 행동을 하지 않도록 안심시키는 거였다.

    정말 뭣 같기 짝이 없었지만, 해야만 하는 일이었다. 자일스 헤센을 영원히 떼어 놓을 수 있는 데다 앨버트가 약속만 지킨다면 나는 외국에서 자유로이 살 수 있게 될 것이다.

    게다가 나는 아직 그에게 묻지 못한 것이 있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의 앞에 앉았다. 자일스는 이제 당황한 듯이 보였다. 한동안 불편한 기류가 침묵 속에서 주변을 감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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