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화>
5. 오리엔트 특급열차
나는 사람을 쉽게 사랑하지 않았다. 쉽게 신뢰를 주지도 않았고, 애초에 누군가 내 사람이 될 거라는 생각조차 잘 하지 못했다.
저택에서 근근이 살아남을 당시, 나는 타인을 불신하는 습관에 길들었다. 마음을 헤프게 주면 그만큼 상처를 받게 되어 있었다.
그동안 나는 누군가에게서 동정심이나 이끌어 낼 만한 존재였지 동등한 사랑을 받을 자격이 주어진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나 또한 다른 사람들을 이용해 먹을 존재로 보았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도 기회만 된다면 나를 똑같이 이용하고 싶어 하리라 생각했다.
그리고 나는 잘못 생각하지 않았다.
잠시뿐만이라도, 앨버트만큼은 온전한 내 편이 아닐까 생각했었다. 그가 나를 위해 요리를 하고, 내 이야기를 귀담아들어 주고…… 그런 일들이 순수한 호감에서 우러나온 행동들일 거라 믿었다.
하지만 나는 또 이용당했다. 나를 해칠 생각이 없다는 건 어불성설이었다. 그는 다른 방식으로 이미 나를 해쳤다. 적어도 그런 눈으로 나를 바라보지는 말아야 했다.
담배를 피우고 싶었다. 자일스를 만나기 전에 한 대는 피우고 가야 할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흡연이 가능한 칸으로 나갔다.
누군가 창문을 살짝 열어 놔서 바깥 공기가 시원하게 통했다. 나는 품에서 담뱃갑을 꺼내 한 대를 입에 물었다. 그런데 오늘따라 라이터가 말썽이었다. 틱틱거리며 불티만 낼 뿐 불이 안 붙는 것이다.
나는 담배를 입에 문 채 욕지거리를 했다. 이 작은 라이터조차 내 기분을 망치려 작정하고 있었다.
그때였다. 누군가 내게 담뱃불을 들이밀었다. 나는 상대가 누군지 제대로 확인조차 하지 않고 일단 불부터 붙이고 보았다. 한 모금 빨아들이니 마음이 가라앉고 심신이 편안해졌다.
상대는 라이터를 거둬 갔다. 그는 평범한 정장을 입고 있었다.
“안녕, 안나.”
나는 그 목소리의 주인을 알아보았다. 자일스 헤센이었다. 군복 차림이 아닌 모습은 처음 보았다. 딱딱하고 절제된 군복을 벗으니 그는 타인의 눈으로 보기에 훨씬 편안해 보였다.
습관적으로 몸이 굳었지만 오래가지 않았다. 이 기차 안에서만큼은 그를 두려워할 이유가 없었다. 나는 그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검은 머리에 검은 눈동자. 나도 한 때는 그처럼 검은 머리를 갖고 있었다.
가식이 아닌 내 진짜 목소리로 그와 대화해 본 적이 거의 없어서, 나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주저했다.
나는 담배 연기를 한 번 더 빨아들였다. 자일스는 자욱한 연기 속에서 나를 차분히 기다려 주었다. 악몽 속에서나 만나던 남자를 이렇게 침묵 속에서 대면하고 있자니 기분이 이상했다. 적어도 꿈속에서는 이렇게 차분하지 않았는데.
“……왜 탔어?”
결국 나는 형편없는 첫 마디를 꺼내고야 말았다. 오랜만에 그를 다시 만나서 하는 말이 고작 이런 거라니 스스로도 어이가 없을 지경이었다.
하지만 나는 멈출 수가 없었다. 물어야만 했다.
“왜 여기까지 따라온 거야?”
“무슨 뜻이지?”
“비꼬는 게 아니라 정말 궁금해서 그래.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거야? 내가 저택을 떠난 지도 벌써 세 달째가 넘어가고 있어. 하지만 당신은 절대 포기하지 않았어. 내 뒤를 쫓아다녔잖아. 결국은 여기서 만나게 됐고. 내게서 뭘 원하기에 그래? 정말, 나를…….”
그다음 말을 하는 데에는 어느 정도의 용기가 필요했다.
“나를…… 나를 벌주고 싶어서 그런 거야?”
나는 당황했다. 왜 내가 말을 더듬는 거지? ‘벌’이라는 단어를 입 밖으로 내뱉었을 땐 손끝이 미세하게 떨려 오기까지 했다. 그럴 리가 없는데.
나는 요한 마이어가 나를 강간하려 했을 때도 괜찮았다. 마룻바닥 밑에 갇혀 웅크리고, 매질을 당할 때도 괜찮았단 말이다.
그런데 왜 내가 동요하는 거지?
나는 담배 연기를 한 차례 더 빨아들였다. 하지만 이번에는 쉬이 진정이 되질 않았다.
한편 내 말을 잠자코 듣던 자일스가 입을 열었다.
“내가 왜 네게 그런 짓을 하겠어?”
“난 도망쳤어. 당신에게 말도 없이.”
“그랬지.”
“그래서 화가 났을 거잖아. 내가 괘씸하다고 생각했겠지. 그렇게 커다란 호의를 베풀었는데, 제대로 보답하지도 않고 갑자기 사라졌으니까. 틀림없이 그런 생각을 했을 거야. 그렇지? 사실대로 말해도 괜찮아. 난 이미 다 알고 있으니까.”
“안나.”
아무렇게나 말을 쏟아 내던 나는 문득 입을 다물었다. 그가 내 어깨 위에 손을 올린 채 몸을 살짝 숙였다. 나는 그의 얼굴을 좀 더 가까이에서 볼 수 있었다.
“안나, 진정해. 괜찮은 거 맞아?”
내겐 대답할 겨를이 없었다. 나는 얼른 그의 손을 뿌리치고 뒤로 물러났다. 반사적인 행동이었다.
자일스는 그런 나를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내가 그를 두려워한다는 간단한 사실조차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처럼 말이다.
그는 걱정스러운 얼굴을 하고서는 차분히 내게 물어 왔다.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설명해 봐.”
“뭘 설명해?”
“무엇이 너를 그리 두렵게 하는지 말해 봐. 내가 도울 수 있는 일이라면…….”
설마, 그는 모르고 있는 건가? 두려움의 근원이 그라는 사실을? 처음부터 모든 문제의 원흉은 그였으며, 내가 그 때문에 수개월 동안 악몽 속에 떨어야 했다는 사실을?
내가 자일스 헤센이라는 구체적인 공포를 상대로 몸부림치는 동안, 그는 정말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는 말인가?
나는 경악했다. 설마. 그런 현실이 있지는 않겠지. 하지만 그는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것처럼 보였다. 나를 마주하고 있는 저 얼굴이 말해 주고 있었다. 그는 나를 놀리는 게 아니었다. 차라리 놀리는 거였다면 나았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는 진심이었다.
하! 나는 너무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물론 정말로 웃음을 터뜨리지는 않았다. 그러기엔 심장이 곧바로 무너져 내릴 것처럼 쾅쾅 뛰어 대고 있었고, 피가 머리 쪽으로 역류해 제대로 앞을 보기 힘들 정도로 어지럼증이 도졌다.
“모른다고? 내가 뭐 때문에 도망쳤는지?”
“……미안하다.”
“무엇이 미안한데……?”
이제 나는 분노에 떨고 있었다. 분노란 아주 깊고도 차가운 감정이다. 뜨거운 화염 같으면서도 그 온도가 불분명하기도 했다. 이제 나를 지배하는 감정은 완전히 다른 것이었다. 그에 대한 두려움을 완전히 집어삼키기에 충분한 해일이 일었다.
나는 그를 노려보았다. 이제 담배는 제 기능을 하지 못할 것이다. 매일 밤마다 나를 고문한 주제에, 내가 어떻게든 벗어날 수 있게, 단 하루만이라도 그에 대한 공포에 떨지 않게 해 달라고 매달리게 만든 주제에…… 혼자서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고.
나는 무슨 말을 더 해야 할지 몰랐다. 그 어떤 말도 의미를 잃을 것만 같았다. 마치 아기의 옹알이처럼 말이다.
“안나.”
나를 목 조를 것처럼 점점 조여 오는 이 상황을 더 이상 버틸 수 없었던 나는 그만 흡연실을 뛰쳐나갔다. 담배 연기 때문에 구역질이 나고 숨을 쉬기가 힘들었다.
흡연실을 빠져나간 뒤에도 증상은 얼른 사라지지 않았다. 내 객실이 어디였더라? 나는 미친 사람처럼 사람들을 이리저리 밀치고 부딪혀 가며 앨버트가 미리 알려 준 객실로 향했다.
나는 객실이 어떻게 생겨 먹었는지 제대로 살피지도 않고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미닫이문을 쾅 소리 나게 닫았다.
다행히 객실에는 창문이 나 있었다. 나는 테이블을 엎고 화병을 깨뜨리며 다급히 창을 밀어 열었다. 그리고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고 질식사하기 직전 겨우 물 밖으로 빠져나온 사람처럼 숨을 몰아쉬었다.
맑은 공기를 좀 마시니까 정신이 맑아지는 듯한 착각이 일었다. 적어도 곧 토할 것 같은 구역감은 사라졌다.
불현듯 나는 이대로 그에게서 도망칠 수는 없다는 생각을 했다. 이대로는 안 돼! 그는 알아야 해. 내가 누구 때문에 그 고생을 했는지 그가 모르게 둬서는 안 돼!
나는 객실 바깥을 빠져나갔다. 문을 여니 바로 근처에 그가 있었다. 자일스 헤센은 또 나를 쫓아왔다. 정말 지겹지도 않나 보다. 반쯤 제정신을 잃은 나는 그의 팔을 잡아당겨 객실 안으로 끌어들였다.
그리고 손에 잡히는 물건을 아무렇게나 집어 온 힘을 다해 그를 때렸다. 자일스가 아파했으면 좋겠지만 그의 반응을 살필 정신조차 내게는 없었다. 나는 성에 찰 때까지 그를 죽어라 패고 나서야 행동을 멈추고 소리쳤다.
“당신이 모른다는 건 말이 안 돼! 오히려 제일 잘 아는 건 당신이어야만 하는 거잖아. 내가 겪어야 했던 모든 일들은 결국 다 당신 때문이었는데 어떻게 내게 모른다는 말을 할 수 있어?”
“안나, 나는―”
“자일스 헤센. 말해 봐. 내가 무엇 때문에 저택에서 도망쳐야 했는지 정말 몰랐어? 진실을 말해.”
“난…….”
자일스는―이미 된통 얻어맞았지만―머리라도 한 대 맞은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그의 입술이 달싹였다. 하얗게 질린 얼굴을 하고서 입 속으로 맴도는 말들을 차마 내뱉지 못하던 그가 물어 왔다.
“내가…… 널 두렵게 한 건가?”
그는 이제야 깨달은 것 같았다. 내가 그를 두려워했다는 사실뿐만 아니라, 저택에서 도망치듯 빠져나가 이곳저곳을 전전해야 했던 이유가 바로 그 자신이었다는 걸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