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을 사랑한 건 살아남기 위해서였다-25화 (25/93)
  • <25화>

    *

    “자, 앉아.”

    앨버트가 나를 위해 의자를 뒤로 당겨 주며 말했다. 나는 이 상황이 부자연스럽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의 말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무슨 생각인 거지? 우선 밥부터 먹자는 건가? 하지만 아직 짐 가방을 내리지도 않았는데…….

    나는 만찬장을 둘러보았다. 작은 객실이 나타날 줄 알았는데, 이런 기차 안에 커다란 만찬장이 들어가 있을 줄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천장에 달린 은방울꽃 모양 전등이 화려한 빛을 뿜어냈고, 바닥에는 폭신폭신한 고급 매트가 깔려 있었다. 당장 내 앞에는 흰 테이블보를 덮은 식탁과 그 위에 세팅된 여러 식기들이 있었다.

    나는 자리에 앉아 차창 밖을 무심코 쳐다보았다. 대부분의 승객들은 기차에 탄 것 같았다. 플랫폼이 한층 한산해져 있었다. 급사가 내 잔에 투명한 물을 따르던 그때였다.

    플랫폼 위에서 익숙한 얼굴을 발견한 내가 숨을 들이켰다. 나는 도움을 요청하듯 앨버트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는 뭐가 문제냐는 듯이 어깨만 으쓱일 뿐이었다.

    “버티.”

    “응?”

    “그가 왔어.”

    앨버트는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그래?”

    “아니, 그가 왔다니까! 자일스 헤센이 왔다고! 지금 이 기차에 탄 것 같아.”

    나는 목소리도 제대로 안 나올 지경인데, 그는 태연하게 물이나 들이켜고 있었다.

    “앨버트!”

    “안나, 진정해.”

    “내가 지금 어떻게 진정을―”

    앨버트는 두꺼운 커튼을 쳐서 창을 가렸다. 덕분에 자일스는 내 시야에서 사라졌지만 그렇다고 그가 이 기차에 탔다는 사실을 바꿀 수는 없었다.

    “그가 나를 잡아가려고 온 거야. 분명해.”

    “괜찮아. 다 예상하고 있던 일이었잖아.”

    “뭐?”

    앨버트는 오늘따라 평소와는 조금 달라 보였다. 다정한 눈빛도, 미소도 전부 똑같았지만 그의 얼굴 위를 덮고 있던 뭔가가 한 겹 벗겨진 듯한 느낌이었다. 내가 알던 앨버트가 아니었다.

    “당연히 자일스 헤센은 너를 따라 이 기차에 타겠지. 그가 네게 가진 미련과 집착이 얼마나 큰데, 고작 기차 하나로 그를 떼어 낼 수 있을 거라 생각했어?”

    무릎 위에 놓인 두 주먹이 하얗게 질렸다. 소리를 지르고 당장 기차에서 내리고 싶었지만 나는 이럴 때일수록 냉정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너, 자일스 헤센이랑 한 패야?”

    그러자 앨버트가 경쾌한 웃음을 터뜨렸다. 재밌는 농담이라도 들었다는 것마냥. 나는 더 이상 그를 믿을 수 없어졌다. 그가 내게 뭔가 중대한 것을 숨기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시선이 테이블 위에 놓인 나이프를 향하던 그때, 앨버트가 작은 스푼을 들었다. 그리고 유리잔을 정확히 세 번 두드렸다.

    댕, 댕, 댕. 그러자 아무도 없던 만찬장 안에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좋은 옷과 드레스를 입은 여행객들은 마치 세트장 안에 들어선 배우들처럼 서로 대화를 나누며 자리를 하나둘씩 차지했다.

    그들 중 단 한 명도 나에게 눈길을 주지 않았지만, 나는 어쩐지 그들 모두가 나에 대해 알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나는 거대한 세트장 안에 앉아 있었다.

    문제는 나 혼자만 배우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나는 앨버트를 노려보았다. 하지만 앨버트가 나 같은 걸 두려워할 리는 없었다. 진심으로 그가 나에게 왜 이러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정말로 자일스의 사주를 받은 사람인가?

    기차가 출발하는 소리가 들렸다. 철그렁철그렁, 거대한 바퀴가 레일 위를 달리기 시작했다. 이제 내가 도망칠 곳은 없었다.

    “이게 다 뭔지 설명해.”

    “우선 네게 사과부터 해야겠네, 안나. 너에게 모든 걸 미리 말해 두지 않았던 건 사실이야. 하지만 어쩔 수 없었어. 그놈이 우리 대화를 엿듣고 있다는 걸 알았거든.”

    “한 가지만 말해. 자일스랑 한 패야?”

    “아니. 네게 많은 걸 숨겼지만 나는 단 한 번도 거짓말을 한 적이 없어. 자일스 헤센은 나의 가장 주요한 적들 중 하나지.”

    앨버트가 의자에 등을 기대고 편하게 앉았다. 반면 나는 긴장을 놓을 수 없었다. 온 신경이 바짝 곤두서서 자세를 바꾸는 것조차 어려웠다.

    “안나, 자일스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어?”

    “무슨 소리야?”

    “그의 과거에 대해 알고 있느냐는 말이야. 그가 어떤 일들을 저질렀는지, 왜 그에겐 적이 그토록 많은 건지…… 왜 너 같은 것이 세상 전부인 양 매달리는지 생각해 본 적은 있어?”

    내가 가진 정보는 제한적이었다. 자일스는 내 모든 것을 알고 있었지만, 나는 그가 혁명군 장교라는 사실밖에 몰랐다. 그와 나 사이의 균형은 심하게 기울어져 있었다. 그것이 내가 그를 몹시 두려워할 수밖에 없게 만든 이유이기도 했다.

    “설마 자일스 헤센이 벨담 출신이라는 것도 몰랐던 건 아니지?”

    “그가…… 벨담 사람이었다고?”

    앨버트는 한숨을 내쉬었다.

    “성씨 보면 딱 그림이 나오잖아. ‘헤센’. 전형적인 벨담 성씨인데. 그걸 눈치를 못 챘어?”

    “하지만 그는 혁명군에 속한 군인이야. 수많은 벨담 귀족들을 죽였다고. 난…… 그가 정말 그들과 같은 벨담 출신일 리가 없다고 생각했어.”

    “간단해. 어렵게 생각할 필요 없어. 그는 그냥 자신의 목숨을 살리기 위해 국가와 민족을 배반한 거야. 자신이 가진 모든 재산을 떠넘기고, 앞장서서 동족을 학살하며 살아남으려 했던 거지. 벨담에서 그가 얼마나 유명 인사가 되었는지 몰라. 이제 자일스 헤센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을 찾기도 힘들걸.”

    한마디로 말하면 그는 국가의 반역자였다. 또한 나와 같은 뿌리를 가진 사람이기도 했다.

    “그도 귀족이었어?”

    내 물음에 앨버트는 고개를 저었다.

    “귀족은 아니고, 부유한 지주의 아들이었지. 작위만 없었을 뿐 귀족과 거의 똑같은 삶을 누리기는 했지만.”

    “하지만 그가 반역자인 게 대체 나랑 무슨 상관이야?”

    “그가 네게 그토록 집착하지만 않았다면 너랑은 전혀 상관없는 일이 될 수도 있었겠지.”

    빌어먹을 놈. 그는 결국 자신의 문제에 나를 끌어들이고 말았다.

    “자, 생각해 봐. 비록 적이 많은 인물이지만, 자일스 헤센은 엄연히 이 나라의 혁명군 장교야. 지은 죄가 많은 만큼 공로도 많이 세웠지. 그를 지켜 주는 든든한 뒷배도 있고. 이 나라 안에서 그에게 직접 접근하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어. 어떻게든 그를 입스윈 바깥으로 빼내야만 하는데, 그러려면 좋은 미끼를 찾아야만 했지.”

    “그래서 나를 이용한 거야? 내게 잘해 주고, 나를 도왔던 것도 전부…….”

    “미안해. 악의는 없었어. 나는 내가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야.”

    물론 그는 전혀 미안한 표정을 짓고 있지 않았다.

    “우리가 탄 이 기차, 사실은 비텔스덴으로 가는 게 아니지?”

    “걱정하지 마. 모든 일이 끝나면 넌 자유로워질 테니까. 그것만은 내가 약속할게.”

    “나를 이런 수상한 기차에 태운 데다 날 미끼로 썼다는 말까지 해 놓고 그 말을 나보고 믿으라고?”

    “우리는 네게 관심이 없어. 우리가 원하는 건 자일스 헤센뿐이야. 자일스만 얻으면 네게 볼일은 다 끝난 거야. 안나 키팅, 너도 신문은 읽으며 살았겠지? 지금 벨담은 커다란 절망에 빠져 있어. 과거에 누렸던 영광, 평화로운 시절들…… 세계 대전에서 패하면서 그 모든 것들을 깡그리 잃었지. 사람들은 바닥에 나앉았어. 공군이 건물이란 건물은 남기지 않고 파괴해 버렸거든. 지금 당장 모든 질서가 파괴되고, 사회가 미쳐 돌아간다고 해도 놀라운 상황이 아니야. 우리는 그 화살이 정부에 돌아가는 일만큼은 막아야 해.”

    그리고 마침 누적된 분노와 절망을 쏟아 내기에 알맞은 악마가 나타났다. 반역자. 살기 위해 동향 사람들을 입스윈에 팔아넘긴 비열한 배신자. 모든 조건이 완벽했다.

    자일스 헤센은 절대 악이었고, 전쟁에서 패배한 국가를 잊게 만들기에 충분할 것이다.

    “그래서 그를 입스윈 바깥으로 빼내기 위해 나를 이용한 거야?”

    “그렇지.”

    “이런 호화스런 기차까지 동원해서?”

    “사실대로 말하자면, 굳이 특급열차일 필요는 없었어. 별다른 검문 없이 은밀하게 국경을 통과하기에 적합하고, 많은 사람들을 수용할 수 있는 것을 고르다 보니 선별된 거야.”

    그들의 목표가 내가 아니며, 나를 자일스에게 넘기려는 목적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난 후에도 안심할 수 없었다. 나는 여전히 포로나 다름없는 신세였다.

    그런 내 속마음을 꿰뚫어 본 건지, 앨버트가 다시 말을 건네 왔다.

    “너는 포로가 아니야, 안나. 나는 네게 기회를 주는 거야. 네 손으로 자유를 쟁취할 기회를. 주위를 둘러봐. 이미 눈치챘겠지만, 이 사람들은 여행객들이 아니야. 그의 눈을 속이기 위한 장치일 뿐이지. 나는 네가 나를 도왔으면 해. 너는 항상 그의 손아귀에서 빠져나가고 싶어 했잖아. 나를 돕는다면 두 번 다신 그와 마주칠 일 없게 될 거야.”

    앨버트는 테이블 위로 작은 피스톨 하나를 건넸다. 나는 그것을 받아 들었다. 장전이 되어 있는 진짜 권총이었다.

    “우리의 목적은 그를 생포하는 거지만, 필요하다면 그를 죽여도 좋아. 긴장할 필요 없어, 안나. 온 기차가 자일스 헤센을 노리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 생각해 봐! 이 기차 전체가 네 편이야. 네 상황은 완전히 달라졌어. 이제 독 안에 든 쥐는 그놈이고, 그놈의 목숨이 네 손에 달려 있는 거야. 네게는 아주 익숙한 그림이지?”

    나는 손에 들린 권총을 내려다보았다. 내가 살아왔던 삶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나는 살아남기 위해 박해를 견뎌야 했고, 그다음에는 필사적으로 도망쳐야만 했다.

    나는 한 번도 주류에 속했던 적이 없었다. 그의 말대로, 나는 독 안에 든 쥐였다. 평생을 그렇게 살았다.

    만약 앨버트의 말이 진실이라면, 오리엔트 특급열차가 자일스를 생포하기 위한 거대한 프로젝트의 일환이고 내가 그 일부가 된 거라면…… 어쩌면 내게 그를 두려워해야 할 이유가 더는 없을지도 몰랐다.

    이 넓고도 좁은 기차 안에서만큼은, 처음으로 내가 누군가의 우위를 점할 수 있었다. 그것도 내 목숨을 손에 쥐고 있었던 자일스 헤센을 상대로.

    나는 권총을 품 안에 넣었다. 그러자 앨버트가 미소를 지었다.

    이제 내 손안에 있는 건 자일스 쪽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정말일까? 자일스가 그들의 손아귀에 이렇게 쉽게 들어왔다고? 그것도 나 하나 때문에? 그렇다면 왜지? 왜 나에게 이렇게까지 집착하는 거지?

    나는 아직도 믿을 수 없었다. 앨버트가 내게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러나 동시에 나를 둘러싼 모든 것이 거짓을 말하는 것 같기도 했다.

    자일스 헤센은 그렇게 허술한 인물이 아닌데. 고작 여자 하나 때문에 온갖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기차에 순순히 탈 사람이 아니란 말이다.

    대체 내가 뭐라고.

    내가 당신에게 무슨 짓을 했다고…….

    권총을 받아 든 행위를 그들의 계획에 동참하겠다는 뜻으로 받아들였는지, 만찬장 안에 있던 승객들이 일제히 박수를 쳐 주었다. 나는 그 소리를 듣고 이 열차 전체가 한마음으로 움직인다는 사실을 체감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자일스 헤센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당신이 그렇게 멍청한 사람이었어? 내가 아는 당신은 그런 사람이 아닌데. 이런 시답잖은 수작질에 넘어갈 사람이었으면 내가 당신을 두려워할 일도 없었을 텐데.

    내가 아는 자일스는 영리하고도 치밀한 사람이었다. 앨버트의 말이 사실이라면, 그는 또한 생존 본능이 뛰어나기도 했다.

    어떻게, 살아남으려고 애를 쓰고 동족들의 이마에 총알을 박아 넣으며 살아온 사람이 이렇게 허술한 작전에 넘어간다는 거지?

    나는 알고 싶어졌다. 그의 머릿속에 대체 무슨 생각이 든 건지, 그가 왜 이토록 내게 집착하는 건지 알고 싶었다. 그러려면 그를 만나 봐야 했다.

    그리고 이제 내가 그와의 만남을 두려워할 이유는 없었다.

    오랜 시간이 흐른 끝에, 다시 그를 만나 볼 때가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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