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화>
*
“안나. 안나!”
누군가 내 어깨를 잡고 흔들었다. 그의 목소리를 알아듣기까지는 몇 초 정도가 걸렸다. 간신히 꿈속에서 빠져나온 나는 앨버트를 올려다보았다. 나는 종종 이럴 때가 있었다. 앨버트도 알고 있을 것이다. 내가 저번과 똑같은 꿈을 꿨다는 것을.
그는 물에 적신 수건으로 내 얼굴을 닦아 주었다. 나를 내려다보는 그의 눈빛에 걱정이 가득 묻어 있었다.
“안나, 괜찮아?”
“괜찮아…… 그냥 꿈이니까.”
“무슨 일이라도 생긴 줄 알았어. 네가 갑자기 소리를 질러서.”
나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벌써 새벽이었다. 앨버트는 하루 종일 집에도 가지 못하고 내 곁만 지키고 있었다. 그에게는 미안한 일이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나는 도저히 혼자 있을 수 없었다. 대문 밖에서 아주 작은 소리만 들려도 나는 방문을 걸어 잠그고 몇 시간씩 숨어 있고는 했다.
“버티, 미안해. 나는…….”
그는 횡설수설하는 내 손을 잡고 그저 미소만 지어 보였다.
“괜찮아. 네 말대로.”
“빨리 여길 뜨고 싶어. 숨어 사는 것도 이젠 지쳤어. 난 잘못한 게 없단 말이야.”
“오늘 해가 뜨면 출발할 거잖아. 자고 일어나면 돼. 그럼 우린 이곳을 떠날 거야. 괜찮아, 안나. 난 바로 옆에 있을 테니까. 아무것도 걱정할 필요 없어.”
나는 그의 말을 듣고 눈을 감았다. 그래, 나는 혼자가 아니었다. 믿을 만한 사람이 내 옆에 있었다. 그 사실만으로도 나는 다시 잠에 들 용기를 얻을 수 있었다.
앨버트는 스탠드를 껐다. 어둠 속에서 그의 목소리가 다정하게 속삭였다.
“기차만 타면 모든 게 다 잘될 거야. 너도, 나도…….”
그는 내가 잠에 들 때까지 곁을 떠나지 않았다. 아무 말도 없이 침대 옆에 앉아서…… 그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고단한 일주일의 끝.
오리엔트 특급열차가 출발하는 날이었다.
우리는 집을 싹 비웠다. 시간이 많이 걸리는 작업은 아니었다. 어차피 내게는 짐이 많지 않았으니까. 나는 여행을 가는 게 아니었다. 이곳을 완전히 떠나려는 거였다. 내 흔적을 조금이라도 남기고 가기는 싫었다.
한 가지 신경 쓰이는 건 자일스가 기차에 대해 알고 있었다는 거였다. 어쩌면 그가 기차역까지 쫓아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앨버트가 내 곁에서 떨어지지 못하도록 했다.
그는 직접 차를 운전했다. 나는 뒷좌석에 앉아서 스쳐 지나가는 풍경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바야흐로 봄꽃이 피어나는 계절이었다. 혁명으로 뒤흔들렸던 입스윈에도 나름대로의 평화가 깃들었다. 봄철 옷을 입은 아이들이 까르르 웃어 대며 자동차를 따라 달리다 이내는 멀어졌다.
기차역은 내가 살던 곳에서 조금 멀리 떨어져 있었다.
“안나, 비텔스덴에 가면 뭘 하고 싶어?”
운전을 하던 앨버트가 문득 물어 왔다.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던 문제라 대답하기 위해선 고민을 좀 해야 했다.
“일단은 지낼 곳을 찾아야겠지.”
“그런 거 말고. 하고 싶은 거 말이야. 식당에 간다든지, 어딜 방문하고 싶다든지…… 그런 것들.”
“잘 모르겠어.”
보통 사람들은 타지로 떠난다고 치면 그런 것들부터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난 아니었다. 타지에 대한 동경이나 기대감은 내게 둘째 문제였다. 내가 입스윈을 떠나는 건 오로지 자일스 헤센 때문이었으니까.
나는 새 신분증을 만들었다. 이제 엘로이즈 비스마르는 완전히 죽었다. 아무도 그녀가 살아 있으리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단 한 사람…… 내 진짜 이름을 알고 있는 유일한 이가 모든 문제의 원흉이었다. 그는 군인이었고, 잔인했으며, 나를 원했다. 그리고 나는 그를 버리고 도망쳤다.
계절이 두 번이나 바뀔 정도면 나를 잊을 법도 하건만, 그는 끈질기게 내 행방을 추적하고 있었다.
결국 나는 다시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
비텔스덴에서 내가 바라는 건 단 한 가지였다. 떳떳하게 살 수 있는 권리. 어깨를 펴고, 사람들과 눈을 마주치며 거리를 걸을 수 있는 자유. 그것이 내가 원하는 모든 것이었다.
“그러고 보니까 난 외국어를 잘 못하는데.”
내가 중얼거렸다. 도망쳐야 한다는 생각에만 급급해 언어의 장벽을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거기 가서 시장도 제대로 못 보면 어떡하지? 사기를 당할 수도 있잖아. 그쪽 말을 잘 못하면.”
“그런 건 걱정하지 않아도 될 거야.”
“왜?”
“안나 키팅이 직접 시장에 갈 일은 다신 없을 테니까.”
나는 그 말이 무슨 소린지 얼른 이해하지 못했다. 하긴, 시장이 대수인가. 차라리 그런 사소한 문제들을 걱정해야 하는 삶을 살기를, 나는 간절히 바랐다.
창에 머리를 대고 생각하던 내가 불쑥 말했다.
“고양이를 키울까?”
“갑자기 그건 왜?”
“그냥…… 문득 든 생각이야. 집 안이 적막한 건 싫거든.”
“안나, 내가 말해 두는데 걔넨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을 거야. 그 짐승들은 순하고 귀여워 보일 뿐이지, 완전 맹수들이라고. 어쩌면 네가 그놈들의 비위를 맞추며 살아야 할지도 몰라.”
“왠지 맘에 드네.”
내가 픽 웃음을 터뜨렸다.
“나랑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을 것 같아.”
얼마나 더 달렸을까. 앨버트가 창밖 너머를 가리켰다. 나는 몸을 똑바로 일으켰다. 오래된 기차역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는 적당한 곳에 차를 대고 짐을 내렸다. 나는 그의 곁에 딱 붙어서 기차역을 향해 걸었다. 그리곤 혹시나 자일스의 얼굴이 보이지는 않는지 사람들 사이를 끊임없이 눈으로 훑었다.
기차를 타러 온 인파로 장내가 벌써 시끌벅적했다. 앨버트는 사람들을 앞장서서 헤치고 나아가 내가 수월하게 앞으로 갈 수 있도록 도왔다.
마침내 우리는 플랫폼 바로 앞에 설 수 있었다.
“안나, 이 기차야. 우리가 타야 할 기차.”
나는 앨버트의 말을 듣고 위를 올려다보았다. 커다란 증기 기관차가 매캐한 연기를 뿜으며 위용을 자랑하고 있었다.
나는 저 새까만 고철덩어리에서 쉽게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저런 게 레일 위를 달려 나를 비텔스덴까지 데려다줄 거라는 사실조차 잘 와닿지가 않았다. 저걸 움직일 정도면 얼마나 많은 동력이 필요할까.
우리는 사람들의 뒤를 따라 기차 안으로 발을 들였다. 엔진을 태울 석탄으로 가득하지는 않을까 상상했던 것과는 전혀 달랐다. 바깥에서 보았던 모습과는 거리감이 느껴질 정도였다.
섬세한 무늬를 새긴 고급 원목과 인테리어가 나를 둘러싸고 있었다. 일정 간격으로 매달린 전등은 따스한 불빛을 내뿜었다.
나는 순간적으로 비스마르 저택을 떠올릴 수 있었다.
“제대로 탄 거 맞지?”
내 물음에 앨버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 기차가 맞아. 확실히 일반적인 기차와는 다르지. 도착할 때까지 편하게 즐긴다고 생각해. 이런 특급열차는 쉽게 탈 수 있는 게 아니니까.”
앨버트는 나를 한 방향으로 이끌었다. 나는 무작정 그를 따라가는 수밖에 없었다. 나는 기차를 처음 타는 사람이었고, 아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막연히 객실에 가서 짐을 내리겠거니 생각했다. 그러나 앨버트가 나를 데리고 간 곳은 객실이 아니었다.
그곳은 만찬장이었다.
*
자일스 헤센은 기차역을 둘러보았다. 그가 알기로 이 기차역은 폐쇄된 지 오래였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만큼은 여행객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공상 소설에 나오는 것처럼 과거로 시간여행을 한 기분이었다. 몬트리올 기차역에도 한때 이런 시절쯤은 있었을 테니까.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지? 폐쇄된 기차역. 수많은 여행객들. 갑자기 나타난 특급열차. 존재하지 않는 티켓……. 한 가지 확실한 건 이게 개인의 소행은 아니라는 거였다. 더 커다란 배후가 있었다.
그는 안나가 기차에 타지 않기를 바랐지만 이미 늦었다. 안나는 그의 말을 믿지 않았고, 지금쯤 기차에 타고도 남았을 것이다. 풀어야 할 의문들이 너무 많았다. 해답을 얻기 위해서라면 그 또한 기차에 타야만 했다.
자일스는 안나를 도저히 혼자 둘 수가 없었다. 몇 달이라는 시간이 흘렀지만 그의 내면은 여전히 텅 비었다. 예전에 그랬던 것처럼, 그는 스스로를 움직일 동력이 필요했고…… 어두컴컴한 터널에서 방향을 안내하는 빛은 단 한 사람뿐이었다.
어둠 속에 홀로 남겨진 사람은 반드시 미쳐 버리고 만다. 자일스는 스스로를 붙들고 있기 위해서라도 안나가 필요했다. 그녀가 무언가 내놓길 바라는 게 아니었다. 그저 안나가 온전한 모습으로 그의 시선이 닿는 곳에 있기만 한다면, 그걸로 충분했다.
그럼으로써 우리 둘 모두 괜찮을 수만 있다면.
자일스는 사람들 사이에 섞여들어 기차에 올라탔다. 군복을 벗은 그는 평범한 여행객처럼 보였다.
호화로운 내부를 짧게 탐색한 후, 그는 안나의 흔적을 찾으려 했다. 그가 생각하는 최상의 시나리오는 안나를 찾아서 그녀를 설득한 다음, 기차가 출발하기 전에 데리고 빠져나가는 것이었다.
어떻게든 그녀를 찾아야만 했다.
자일스가 만찬장으로 향하려던 그때였다. 승무원이 나타나 그의 앞을 가로막으며 정중하게 말했다.
“죄송하지만 2번 만찬장은 자리가 다 찼습니다. 1번 만찬장은 반대편으로 쭉 가시면 나올 겁니다. 부디 양해해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사람을 찾고 있어서 그러는데 어떻게 안 됩니까? 여기서 만나기로 한 이가 있는데, 혹시 여기 있을지도 몰라서.”
승무원은 끄떡도 하지 않았다.
“승객분들의 편의를 위해서라도 양해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자일스는 이곳에서 더 이상 군인이 아니었다. 따라야 할 질서가 달랐다. 군인으로서 직무를 수행할 때처럼 승무원을 두들겨 패고 나아갈 수는 없다는 얘기였다.
어쩔 수 없었다. 자일스는 한 발짝 물러나기로 했다. 그가 몸을 돌려 다른 방향으로 걸음을 옮기려던 그 순간이었다.
부우우― 기차가 굉음을 내며 증기를 내뿜었다. 이윽고 창밖 풍경이 서서히 옆으로 지나가기 시작했다.
오리엔트 특급열차의 여정이 지금 막 시작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