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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을 사랑한 건 살아남기 위해서였다-23화 (23/93)

<23화>

순간적으로 심장이 멎었다.

새까만 머리카락. 마찬가지로 새까만 눈동자. 아는 얼굴이었다. 나는 그의 얼굴을 잊어버리지 못했다. 그는 잊을 만하면 내 꿈에 등장하곤 했으니까.

나는 항상 그날 밤의 꿈을 꿨다.

그에게 머리채를 잡히던 그날 밤의 꿈을…….

자일스 헤센이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때와 똑같은 얼굴을 하고, 똑같은 군복을 입은 채로.

나는 그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천천히 뒷걸음질을 쳤다.

꿈속에서 그를 만났을 때 내가 어떻게 했더라?

“안나.”

그가 나를 불렀다. 자일스는 내 이름에 대해서도 알고 있었다. 그동안 나를 지켜보고 있었던 게 분명했다.

뻔뻔하게도 그는 나를 위하는 척 목소리를 꾸며 내고 있었다.

“어디 봐. 다친 곳은 없는지―”

나는 꿈속에서 내가 어떻게 했는지 기억해 냈다. 자일스가 내게 다가오는 순간, 나는 가방을 품에 꽉 끌어안고 몸을 돌려 도망쳤다.

“안나!”

그가 내 이름을 소리쳐 불렀다. 둔탁한 군화 소리가 나를 뒤쫓아오고 있었다. 나는 일부러 인파가 몰린 곳으로 향했다. 커다란 가방으로 사람들 사이를 헤치며 그를 떼어 내려는 생각이었다.

사람들이 내게 불만 섞인 눈길을 보냈지만 그런 건 문제도 아니었다.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곤 내 작전이 형편없었음을 알아챘다. 사람들은 웬 민간인 여자보다 군인에게 길을 더 잘 터 주었다.

군복을 입은 자일스가 나타나자 사람들은 약속이라도 한 양 길을 훤히 열어 주었다.

인파를 뚫고 나온 나는 무작정 달렸다. 달리기 실력으로 그를 이길 수 없다는 건 잘 알고 있었다. 그를 피해 도망치면서도 나는 억울함이 목구멍 위로 치고 나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왜 내가 도망쳐야 하는 거지? 내가 뭘 잘못했어? 내가 도대체 뭘…….

그때, 이제 막 출발하려는 전차가 내 눈에 띄었다. 나는 미친 사람처럼 소리를 질러 댔다.

“잠깐만요! 잠깐만!”

놀란 사람들이 길을 비켜 주었다. 나는 온 힘을 다해 전차 안으로 뛰어 올랐다. 종이 울리고 전차 문이 닫혔다. 땀을 줄줄 흘리며 가방을 끌어안은 채 쓰러진 나를 승객들이 신기한 동물 보듯 바라보고 있었다.

뒤늦게 쫓아온 자일스가 전차 외벽을 두드렸지만 이미 전차는 출발하고 난 뒤였다. 그의 발걸음이 점점 느려지더니 이내 멈춰 섰다. 우두커니 선 그의 모습이 점점 멀어지더니 이내 보이지 않게 되었다.

집에 돌아와서 제일 먼저 한 일은 앨버트를 부르는 것이었다.

나는 신발만 겨우 벗은 채로 소파에 누워 담요를 끌어안고 있었다. 추격전을 벌일 때 얼마나 필사적으로 뛰었던지 힘이 다 빠지고 없었다. 내가 사온 식재료들은 바닥에 쏟아져 나뒹굴었다.

물론 지금은 앨버트가 그것들을 다 정리했다. 그는 좁은 부엌에서 수프를 끓이는 중이었다. 내 기운을 북돋으려는 생각이었는지 그가 라디오를 틀었다. 라디오 채널에서 흥겨운 재즈 가요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다 됐다.”

앨버트의 목소리는 얼핏 나른하게 들리면서도 느리게 끄는 데가 있었다. 그는 나름 미성의 소유자였다. 그가 수프 냄비를 들고 와서 식탁 위에 가지런히 놓았다. 그릇 부딪히는 소리가 귀를 간질였다.

“안나.”

나는 소파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앨버트가 내게 손짓하고 있었다.

“이리 와. 밥 먹어야지.”

입맛이 하나도 없었지만 세상 다 잃은 사람처럼 누워만 있을 수는 없었다. 실제로도 내 세상은 아직 안전했다. 나는 식탁 앞에 앉아서 그가 내 몫을 떠 주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너는 안 먹어?”

“난 다른 거 먹었지. 넉넉하게 끓여 뒀으니까 많이 먹어. 배라도 든든해야지. 그렇지?”

나는 그가 썰어 둔 빵 조각을 수프에 적셨다. 난 내가 배고프지 않은 줄 알았는데, 음식을 입에 넣는 순간 전혀 아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며칠은 굶은 사람처럼 수프를 떠먹는 나를 앨버트가 안쓰럽게 바라보았다.

“맛은 괜찮아?”

“그 미친놈이 나를 쫓아왔어.”

내 동문서답에도 그는 그저 웃음만 지었다.

“적어도 기운은 돌아왔구나.”

“갑자기 나타나서 날 쫓아왔다고! 다리에 힘이 풀려서 주저앉을 뻔한 걸 몇 번이나 참았어.”

“그놈이 확실했어?”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그의 얼굴만큼은 헷갈릴 수가 없었다. 그는 자일스 헤센이 맞았다.

“그때랑 하나도 안 변했어. 나는 이렇게 달라졌는데.”

“혹시 곁에 동료를 달고 있었어?”

“아니. 그는 혼자였어. 자일스는 처음 만났을 때를 빼면 동료랑 같이 다닌 적이 없어.”

수프를 떠먹다 뭔가 떠올린 내가 테이블을 쾅 내리쳤다.

“아이고.”

“앨버트, 그러고 보니 그 남자가…….”

“응. 천천히 말해 봐.”

“……내 이름을 말했어. 내 이름 말이야. 나를 안나라고 불렀어. 릴리가 아니라 안나라고.”

안나. 흔하디흔한 새 이름이 그의 목소리를 빌려 귓가에 들려오는 순간, 내 눈앞이 순간적으로 어지럽게 돌았다. 잘 숨고 있었다고 생각한 건 오직 나뿐이었다.

“그가 내 이름을 알고 있었어. 아주 예전부터 날 지켜보고 있었던 거야. 분명해. 난 내가 안전하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어. 그가 어디까지 알고 있을지 이젠 나도 모르겠어. 어쩌면 내가 사는 이곳도 알고 있을지 몰라. 아니, 어쩌면 지금 우리 대화를 듣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안나, 진정해. 내가 뭘 해 줬으면 좋겠는지 말해 봐.”

자일스에겐 필요 없을지 몰라도 내게는 동료가 절실했다.

“기차를 탈 때까지 여기 있어 줘. 혼자 있기 싫어.”

“그래. 알았어. 걱정하지 마.”

“그리고 술도 좀 사다 주면 안 될까?”

“평소에 마시던 걸로?”

“……응.”

나는 수프를 떠먹으려다 재빨리 덧붙였다.

“빨리 갔다 와야 해.”

“명심할게.”

앨버트는 겉옷을 입고 내 곁을 지나쳐 대문을 나섰다. 찰칵. 그가 문을 잠그는 소리가 들렸다.

혼자 남은 나는 식어 가는 수프를 기계적으로 떠먹으며 생각했다. 자일스가 내게 이리 집착하는 이유가 뭘까.

나는 대단한 미인이 아니었다. 적어도 내 생각엔 그랬다. 그의 주변엔 나보다 더 나은 여자들이 차고 넘칠 텐데, 자일스는 나를 잊지 않고 끈질기게 따라붙고 있었다.

복수심 때문인가? 내가 그를 배신했다고 생각해서? 그는 내게 호의를 베풀고, 내 목숨을 살려 주기까지 했는데 나는 그에게 감사하단 말도 없이 도망쳤다.

아니, 그렇지 않아! 난 그에게 수백 번도 넘게 감사하다고 말했다. 단지 작별 인사를 하지 않았다고 해서 내게 복수심을 품을 일이란 말인가?

어쩌면, 감사하다는 말로는 부족했던 것일까? 내가 답례하길 바라면서 나를 도왔는데, 내가 그의 기대를 저버렸나? 하지만 내가 달리 뭘 할 수 있었지? 그가 내게서 가져갈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나는 진심으로 내가 왜 추적당해야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아무튼 비텔스덴으로 떠나는 것만이 해결책이었다. 앞으로 며칠 남지 않았다. 딱 며칠만 버티면 나는 외국에 가있을 것이고, 그는 나를 더 이상 건드리지 못할 거다.

그때였다. 조용하던 집 안이 전화벨 울리는 소리로 가득 찼다.

깜짝 놀란 나는 숟가락을 든 채 굳어 버렸다. 전화기가 울리고 있었다. 누구지? 전화할 만한 사람은 아무도 없는데? 나는 현관 쪽을 쳐다보았다. 앨버트는 아직 도착하기 전이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천천히 전화기 쪽으로 다가갔다. 전화기는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끈질기게 울려 대고 있었다.

붉은 색의 전화기를 가만히 내려다보던 내가 손을 뻗었다.

그리고 수화기를 귀 옆에 갖다 댔다.

*

자일스는 붉은 전화박스 안에 들어가 문을 닫았다. 동전을 넣고 다이얼을 돌린 뒤, 신호음이 울리는 소리를 들었다.

그의 목표는 안나와 직접 만나 대화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안나는 유령을 만난 사람처럼 겁에 질려 도망쳤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지만 일단은 그녀가 처한 상황에 대해 알리는 것이 더 중요했다.

안나는 얼른 전화를 받지 않았다. 그러나 자일스는 침착하게 기다렸다. 지금쯤이면 안나가 집에 있을 시간이었다.

얼마 정도를 기다렸을까, 이내 신호음이 뚝 끊겼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안나는 그가 무슨 말을 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안나.”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자일스는 급하게 덧붙였다.

“제발, 전화 끊지 말고 들어 봐. 해야 할 말이 있어.”

“…….”

“얼마 전에 일어났던 일부터 말하자면…… 널 놀라게 하려던 건 아니었어. 사실은 널 직접 만나서 했어야 할 말이었어. 앨버트 쇼에 관한 거야.”

“왜…….”

안나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나한테 왜 그러는 거야……?”

“안나, 들어 봐. 그 남자는―”

“내가 왜 당신이 하는 말을 들어야 해?”

돌연 그녀가 물어 왔다. 이제 할 말을 잃은 건 자일스였다. 그는 안나가 그를 적대적으로 대하는 이유를 알지 못했다.

“자일스, 말해 봐. 나한테 왜 그러는 거야? 내가 당신에게 뭘 그리 잘못했어?”

“안나.”

“그래, 나는 말도 없이 떠났어. 하지만 내가 달리 뭘 할 수 있었지? 난 자유롭게 살고 싶었을 뿐이야. 내가 당신에게 지은 죄가 뭐가 있다고 날 계속 따라다니는 거야? 말해 봐, 지금까지 나를 감시하고 있었지?”

“안나, 넌 뭔가 잘못 알고 있어.”

“내 이름은 어떻게 알았던 거야?”

“그건―”

“그날 이후로 내 뒤를 밟았던 거잖아. 나에 대해서 어디까지 알고 있어? 왜 나를 내버려 두지 못하는 건데? 난 그냥 평범한 피아니스트일 뿐이야. 감사 인사가 부족했던 거면 지금 몇 번이라도 해 줄게. 제발 나를 내버려 둬. 제발…….”

“안나. 너는 지금 위험한 상황에 처해 있어.”

수화기 너머에서 안나가 헛웃음을 터뜨렸다.

“나도 잘 알고 있어. 당신 덕분에!”

“제발, 단 1분만이라도 내 이야기를 들어 봐. 네 후원자인 앨버트 쇼는 신원이 불분명한 남자야. 그럴듯한 신원 이력은 있지만, 네가 알고 있는 것 이상의 정보를 찾을 수 없는 남자라고. 그를 믿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어. 그리고 그가 너를 태우려는 그 기차는…….”

“정말 모든 걸 다 알고 있구나, 당신은.”

“미안해. 네 주변을 조사했던 건 사실이야. 하지만 그럴 수밖에 없었어. 너는 갑자기 사라졌고…….”

“그래, 내가 잘못했어. 말도 없이 가 버린 거, 내가 잘못한 거니까…… 이제 그만 용서해 주면 안 될까?”

자일스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그는 안나가 왜 저런 말을 하는 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당신 이름은 죽을 때까지 기억할게. 그러니까…….”

“안나,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아직 일말의 동정심이라도 남아 있다면, 내가 떠나도록 내버려 둬.”

“잠깐만―”

전화가 끊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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