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화>
*
자일스 헤센은 신문에 실린 여자의 사진을 바라보았다. 옅은 색의 머리카락을 가진 여자. 안나 키팅. 언뜻 평범한 이름처럼 들렸지만, 그에게만큼은 무엇보다도 특별한 이름이었다. 자일스는 그녀가 누군지 알고 있었다.
비록 머리카락 색이 옅어지고 이름이 바뀌기는 했지만, 그녀는 여전히 알아볼 수밖에 없는 얼굴을 갖고 있었기에.
얼마 전 그는 릴리, 아니 안나의 연주를 들으러 갔었다. 입상자를 위한 연주회였다. 명망 있는 콩쿠르였던지라 관객들이 꽤 모였고, 3천 석에 달하는 커다란 홀을 가득 채우기에는 충분한 숫자였다.
그가 연주회를 찾아간 건 안나의 정체에 대해 확신을 내리기 위해서였다. 이미 안나라는 이름에 대한 단서가 있었지만, 그럼에도 그는 긴가민가할 수밖에 없었다. 흰 드레스를 입고 무대로 올라서는 금발의 여성을 목격할 때까지만 해도 그랬다.
누군가에게 쫓기는 게 분명했던 그녀가 갑자기 유명 피아니스트가 되어 온 사람들 앞에 나타났다고?
이해가 되질 않았다.
그가 아는 그녀가 맞는지 알아내야만 했다.
안나는 하얗고 부드러운 천에 휩싸인 채로 피아노 앞에 앉았다. 잠시 마음을 가다듬으며 건반을 내려다보던 그녀가 이윽고 연주를 시작했다.
안나의 연주에는 심연과도 같이 깊은 감정이 실려 있다. 그게 다른 이들과 안나를 구별 지어 주는 특징이었다. 자일스는 섬세하게 휘몰아치는 음계의 향연을 듣고는 얼핏 미소를 지었다.
그는 안나의 연주를 통해 확신했다. 아, 내가 아는 그녀가 맞구나.
자일스가 발걸음을 끊은 사이 그녀는 저택에서 모습을 감추었다. 아무래도 그가 없는 새에 위험에 빠진 것이 분명했다. 그에게 알릴 여유도 없이 도망쳐야만 했던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누군가 저택에 침입했고, 그녀를 해하려 했던 걸까?
그렇다면 누가?
자일스는 인근 마을에서 안나를 다시 찾아내는 데에 성공했다. 하지만 그녀는 또다시 도망쳤다. 자일스가 무어라 말을 건넬 여유도 주지 않고서 말이다.
안나가 심각한 위험에 처했다고 확신한 자일스는 접근 방식을 바꾸기로 했다. 그는 섣불리 그녀에게 접촉하기보다는 그녀의 주변 인물들에 대해 조사하기 시작했다. 안나의 동선을 파악해 사람을 배치해 놓고, 도청 센터의 힘을 빌렸다.
자일스의 눈에 띄는 남자 하나가 있었다. 앨버트 쇼. 정황상 안나의 후원자인 것 같았다. 그녀와의 관계도 제법 친밀했다. 안나는 앨버트에게 많이 의지하고 있었다.
그는 어쩐지 앨버트에 대해 더 자세히 조사하고 싶어졌다. 그래서 그에 대한 모든 정보를 모아들이기 시작했다. 서류상으로 그는 해외에서 살다가 최근에 입스윈으로 입국한 부유한 사업가였다.
그러나 앨버트에 대해 더 자세히 알려고 하면 약속이라도 한 듯 정보의 맥이 끊겼다. 그에 대해서만큼은 깊게 파고들어 갈 수가 없었다. 마치 누군가의 보호 아래에 있기라도 하듯이 말이다.
의심스러웠지만, 결정적인 증거는 없는 상황이었다.
자일스는 앨버트 쇼에게 붙여 둔 비밀 요원을 만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요원은 멀지 않은 곳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가 코트 안에서 뭔가를 꺼내 들어 자일스에게 건넸다.
도청 기록이었다.
“원하시면 녹취록을 직접 들으시겠습니까?”
“아니, 우선은 읽어 보지.”
그가 도청 기록을 읽어 내려갔다. 안나에게 날아온 초청장. 비텔스덴. 외국행 급행열차표…… 오리엔트 특급열차.
“그가 ‘몬트리올 기차역’이라고 말한 게 확실한가?”
요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녹취록을 그대로 받아 적은 겁니다.”
그렇다면 이건 심각한 사안이었다. 몬트리올 기차역은 얼마 전 재정난으로 폐쇄되었다. 폭격으로 인해 주변국에서의 기차 운행은 한정적이었고, 입스윈 또한 혁명의 여파로 인해 관광 산업이 주춤했다. 중앙역은 어찌저찌 살아남았으나, 변두리의 작은 기차역은 결국 폐쇄 명령을 피하지 못했다.
수상한 점이 한두 군데가 아니었다.
“오리엔트 특급열차라고?”
“전쟁 이전에 처음 운행을 시작한 호화 열차인 것으로 압니다. 그런 열차가 폐쇄된 역에 정차할 가능성은 없어 보입니다.”
“……최근에 이 열차를 예매한 사람들이 있었나?”
“입스윈에는 그런 이름의 열차가 아예 오질 않습니다. 그러니 당연히 시중에 팔린 표도 없습니다. 이자가 언급한 비텔스덴행 티켓은 존재하지 않는 물건입니다.”
자일스는 신경이 곤두서는 것을 느끼며 봉투에 든 필름 사진을 꺼내 들었다. 어딘가로 향하고 있던 앨버트 쇼를 찍은 사진이었다.
그의 얼굴을 가만히 내려다보던 자일스가 고개를 끄덕이며 요원을 물렸다.
존재하지 않는 티켓. 폐쇄된 기차역. 앨버트는 안나를 어디론가 데려가려 하고 있었다.
이제 그는 안나를 둘러싼 위험이 무엇인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그녀에게 경고해야만 했다. 앨버트 쇼의 정체가 무엇인지는 불투명했으나, 그가 안나를 대상으로 비밀스런 음모를 진행하고 있다는 것만큼은 확실했다.
이름을 바꿀 정도로 조심에 조심을 기하던 안나가 앨버트를 의심하지 않았다는 게 이해되지 않았다. 겉으로 서글서글해 보이는 인상이 그녀를 무르게 만든 것일까? 어째서 그를 신뢰한 것이지?
자일스는 요원에게서 건네받은 봉투를 품 안에 넣고 발걸음을 돌렸다. 동료들에게 협조를 요청할 수도 있겠지만, 안나에 대한 일만큼은 그 혼자서 해결하고 싶었다.
신분을 세탁하기는 했지만 안나는 여전히 벨담 귀족의 여식이었다. 동료들에게 그녀에 대한 조사를 시킬 수는 없었다. 그건 안나를 돕는답시고 구렁텅이로 밀어 넣는 일이었다.
결국 이 일은 그에게 달려 있었다.
긴 기다림 끝에, 안나를 다시 만나 볼 시간이었다.
*
음식을 사다가 집 안에 쟁여 놓고 외출을 최대한 자제하겠다는 생각은 정말이었다. 나는 커다란 가방을 들고 시장을 돌아다녔다. 누군가 나를 알아보는 상황은 피하고 싶었기에 스카프로 코 밑을 최대한 가렸다.
쉽게 상하는 음식은 제외했다. 나는 넉넉히 두고 먹을 수 있는 것들만 골라서 가방을 채웠다. 앨버트에게 도와 달라고 할 수도 있었겠지만 안 그래도 그는 나를 너무 많이 신경 써 주었다. 이런 일쯤은 나 혼자서 하고 싶었다.
그러나 시장을 순찰하던 경찰들과 눈이 마주쳤을 땐 그 선택을 후회했다. 젠장. 그들이 나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아무래도 커다란 가방을 든 채 얼굴을 가린 여자가 그들 눈엔 못내 수상쩍었던 것 같았다.
나는 도망치면 상황을 더욱 악화시킬 뿐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어이, 아가씨.”
진압 봉을 든 경찰이 허리를 굽히고 내 눈을 빤히 바라보았다.
나는 최대한 결백한 목소리를 꾸며 내었다.
“무슨 일이죠?”
“잠시 검문 좀 합시다.”
경찰이 손을 내밀었다.
“신분증.”
나는 품을 뒤적여 신분증을 꺼냈다. 관청에서 발급받은 것이기는 했지만 거기 적힌 인적 사항은 백 퍼센트 가짜였다. 나는 손을 떨지 않으려 노력했다.
신분증을 받아 든 경찰은 묘한 표정으로 동료와 시선을 교환했다.
“이름이 안나 키팅이라고?”
“맞는데요.”
“스카프 내려 봐요.”
나는 할 수 없이 스카프를 내렸다. 내 얼굴을 본 그들이 보물이라도 발견한 양 탄성을 지르더니 웃음을 터뜨렸다.
“진짜 그 여자네! 그 피아니스트!”
“이봐요, 당신이 우리 동네에서 얼마나 화제인지 알아요? 내 애인이 당신 업적에 푹 빠졌다고. 이럴 줄 알았으면 나도 피아노 하나쯤 배워 놓을걸.”
“안나 키팅, 여기서 장을 보는 편입니까?”
내 이럴 줄 알았다. 그들은 동네 시장에서 나를 만났다는 게 퍽 놀라웠는지 호들갑을 떨어 댔다. 나는 사람들의 시선이 머무르는 것을 느끼며 대충 대답했다.
“아, 네에…….”
“실물이 훨씬 더 낫네. 그 사진사는 해고해야겠소. 이럴 때가 아니라 사인 하나만 받아 놓읍시다. 당신이랑 이렇게 마주칠 기회가 얼마나 더 있겠어?”
나는 그들을 최대한 빨리 치워 버리기 위해 순순하게 굴었다. 벌써 집에 가고 싶었다. 수첩에 휘갈긴 사인을 받아 든 경찰들은 흡족해 보였다.
“그래, 시간 뺏어서 미안합니다. 설마하니 당신일 줄은 몰랐어요. 그런데 이제 보니 검문하기를 잘했군.”
“스카프로 얼굴은 왜 가렸습니까?”
“감기 기운이 있는 것 같아서요.”
내가 대충 얼버무렸다.
“다음부터는 그러고 다니지 마세요. 수상쩍어 보이거든요. 뭐, 그 덕에 이렇게 유명 인사를 만나는 영광을 누렸지만 말입니다.”
그들은 정중하게 인사하고는 무어라 대화를 주고받으며 내게서 멀어져 갔다. 나는 신분증을 품에 넣고 다시 스카프를 올렸다.
장은 대충 봤으니까 이제 집에 가야겠다. 그렇게 마음먹은 나는 가방을 품에 안고 고개를 푹 숙인 채 빠른 걸음으로 사람들 곁에서 멀어졌다.
내가 자주 다니는 길목으로 접어들던 그 때였다. 나는 누군가 나를 골목 사이로 밀어붙이는 바람에 크게 휘청거렸다. 불쾌한 숨결이 가까이서 나를 압박하고 있었다.
“다치기 싫으면 가진 거 다 내놓는 게 좋을 거야.”
웬 남자가 내 목에 칼을 들이밀고 있었다. 순식간에 짜증이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다. 지독히도 운이 나쁜 하루였다. 내 사인을 받는답시고 나를 귀찮게 하던 경찰들은 꼭 이런 때에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다.
원하는 걸 들어주고 보내 버리고 싶지만, 그러려면 내 가방에 든 시장거리를 포함해 돈을 다 털어서 줘야 할 것이 뻔했다.
그건 싫었다. 그럼 시장에 또 와야 하니까. 나는 외출을 최대한 자제해야 하는 사람이었다. 아무래도 앨버트에게 동행을 요청할 걸 그랬다는 생각이 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적어도 남자가 곁에 있으면 이런 일은 안 일어나던데.
나는 협상을 시도했다.
“가진 것의 절반을 줄게요.”
당연하게도, 그는 내 말을 들어 먹질 않았다.
“다 내놔.”
“아, 진짜 왜 이래! 이거 다 해 봤자 얼마 되지도 않는다고!”
“진짜 죽고 싶냐? 내가 말했지, 다치기 싫으면―”
나는 가방으로 그를 밀치고 있는 힘껏 뛰었다. 그러나 강도 녀석은 내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팔팔한 인간이었다. 나는 금세 머리채를 잡히고 말았다. 절대 가방만은 뺏기고 싶지 않았던 내가 가방을 품에 끌어안고 바닥에 주저앉아 버텼다.
“저리 가! 이거 진짜 얼마 안 한다고! 감자랑 빵밖에 없단 말이야!”
“이게 진짜 미쳤나! 빨리 안 내놔?”
나는 내게서 가방을 빼앗으려는 그에게 필사적으로 저항했다. 진짜인데. 정말 감자랑 빵밖에 없단 말이다. 그는 내가 가방에 금덩이라도 숨겨 두고 있는 줄 아는 모양이었다. 아무도 없는 골목에서 고작 감자 때문에 이러고 있는 내 꼴이 서러워서 눈물이 고였다.
하루빨리 비텔스덴으로 떠나든가 해야지―
갑자기 남자가 내게서 손을 뗐다. 알고 보니 그는 바닥에 쓰러져 군인에게 호되게 맞고 있었다. 제복을 입은 군인은 강도를 흠씬 두들겨 패더니 한 손으로 그를 잡고 일으켜 엉덩이를 차 주었다.
“저리 가, 빌어먹을 놈.”
강도는 모자를 고쳐 쓰고는 비틀거리며 줄행랑을 쳤다. 나 또한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몸을 일으켰다. 나는 군인을 향해 고개를 꾸벅 숙였다.
“감사합니다.”
“괜찮아?”
그는 나를 아는 사람처럼 대하고 있었다. 뭐지? 나는 고개를 들어 군인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