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을 사랑한 건 살아남기 위해서였다-21화 (21/93)

<21화>

4. 불안한 조우

봄의 초입. 샌드위치를 사려는 사람들이 줄을 섰다. 이름난 가게는 아니었지만 싼값에 비해서는 맛이 좋은 편이었다.

나도 기다란 줄에 가담했다. 내 앞에 서 있던 남자가 누가 왔나 싶었는지 슬쩍 나를 뒤돌아보더니 놀란 눈이 되어 제 앞에 있던 또 다른 사람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나는 그냥 웃음만 지어 보였다. 그러나 속으로는 전혀 웃고 있지 않았다. 제길, 역시 이래서 사람 많은 곳을 싫어하는 거다. 이름과 더불어 내 얼굴이 사람들 사이에서 유명세를 타고 있었다. 내 사진이 신문 한편을 차지했을 땐 정말 기절하는 줄 알았다.

다행히 누군가 내게 말을 걸려고 시도하거나 ‘여기 그 여자가 왔다’고 떠들어 대는 사태는 벌어지지 않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샌드위치를 빨리 받아서 돌아가는 데에 더욱 정신이 팔려 있었다.

그때였다. 누군가 내 얇은 트렌치코트 자락을 잡아당겼다.

아래를 내려다보니 어린 여자아이 하나가 두 볼을 잔뜩 붉힌 채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저기…….”

아이가 부모처럼 보이는 사람들을 돌아보더니 곧 용기를 냈다.

“사인해 주세요.”

“아, 그래.”

아이에게는 친절해야 한다. 나는 적어도 그렇게 믿었다. 나는 아이가 내민 종이에 내 이름을 휘갈겨 적었다.

「안나 키팅.」

내 사인을 받아 든 아이가 꾸벅 인사를 하고는 신이 나서 달려갔다. 나는 그 모습을 잠시 바라보다 스카프 속에 얼굴을 묻고 고개를 푹 숙였다.

그냥 앨버트한테 사 오라고 할 걸! 이제 와서 후회해 봤자 소용없었다. 난 바깥바람이 쐬고 싶었을 뿐이다. 게다가 내 얼굴이 신문에까지 오른 판국에 외출 좀 한다고 크게 달라지는 건 없었다.

샌드위치를 받기까지는 10분 정도가 걸렸다. 나는 값을 지불하는 즉시 빠른 걸음으로 사람들에게서 멀어졌다. 이목을 끌고 싶지 않았다. 저 멀리 비텔스덴에서라면 몰라도, 이곳 입스윈에서 그랬다간 무슨 사달이 일어날지 몰랐다.

내가 머물고 있는 연립 주택 안으로 들어서고 난 후에야 나는 답답한 스카프를 풀어 헤칠 수 있었다. 나는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바라보았다. 옅은 색의 머리카락을 한 갈래로 묶은 여자가 있었다. 금발로 탈색한 지 몇 달이나 지났는데 아직도 익숙해지지 않았다.

열쇠를 꽂고 내 집 문을 따려는데, 문손잡이를 채 돌리기도 전에 문이 벌컥 열리더니 장신의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가 활짝 웃으며 내 이름을 불렀다.

“안나!”

“제발 큰 소리로 말하지 좀 마!”

나는 다급하게 속삭이며 그를 안으로 밀어 넣고 서둘러 문을 닫았다. 그는 자기가 뭘 잘못한지도 모르는 얼굴이었다. 한마디로 정말 뻔뻔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난 그냥 네가 반가워서 그런 거야.”

“마지막으로 헤어지고 난 지 스무 시간도 안 됐잖아.”

“꼭 오랜만에 만나야만 반가워할 자격이 생기는 건 아니잖아.”

“됐어. 소란 그만 피우고 이거나 먹어.”

나는 그의 품에 샌드위치를 들려 주고는 트렌치코트를 벗어 옷걸이에 걸었다. 앨버트는 샌드위치를 그대로 든 채로 나를 따라왔다.

“이 정도는 괜찮아, 안나라는 이름은 엄청 흔하잖아. 당장 위층에만 안나가 두 명이나 더 있는걸.”

“그래도 난 최대한 조심하고 싶다고. 알겠어? 몇 번이나 말했잖아! 여길 뜰 때까지는 눈에 띄는 짓 하면 안 된다고.”

앨버트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도통 반성하는 기색이 아니었지만 말이다.

앨버트 쇼와 처음 만난 지도 벌써 두 달 이상이 흘렀다. 그를 믿기로 결심한 후에도, 나는 한편으론 그가 정말 나를 팔아치워 버릴 가능성이 있을 거라 생각했다. 아니면 또 다른 음모를 갖고 있다거나.

하지만 그는 나를 외국으로 떠나보내는 데에만 관심이 있었다. 내가 피아니스트로 거듭난 것 또한 그의 아이디어였다.

앨버트는 내가 피아노에 재능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서는 뛸 듯이 기뻐했었다. 그는 말했다. 안나, 넌 외국행 티켓을 갖고 있었던 거나 마찬가지야.

그는 좋은 사람처럼 보였다. 잘 웃었고, 매사에 긍정적이었다. 난 이런 사람은 평생 처음 만나 보았다. 그뿐만 아니라 심지어 그는 내게 헌신하기까지 했다.

어쩌면, 나는 그를 믿어도 될 거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친절하거나 서글서글한 호인이어서가 아니었다. 그가 자일스 헤센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사람이라는 확신이 들어서였다.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그는 충분히 믿을 가치가 있었다.

앨버트는 샌드위치 포장을 벗기더니 투덜거렸다.

“난 계란 샌드위치 싫은데.”

“어제는 제일 좋아하는 요리가 계란 스크램블이라며?”

“그건 노른자를 풀어서 익힌 거고, 이건 삶은 거잖아. 난 삶은 계란은 싫단 말이야.”

단점이 있다면 이런 식으로 짜증 나게 굴 때가 있었다. 도대체 스크램블이랑 삶은 거랑 무슨 차이람? 나는 어쩔 수 없이 내 몫을 그에게 넘겨주었다. 그의 얼굴이 다시 밝아졌다. 나는 짜증이 밀려 올라오는 것을 꾹 참았다.

“그나저나 왜 갑자기 보자고 한 거야? 이런 아침부터.”

“아침에는 보면 안 돼?”

“말꼬리 잡지 말고.”

“내가 아무 용건도 없었다고 하면 화낼 거야?”

내 눈치를 살피던 그가 얼른 꼬리를 내렸다. 간만에 그의 번듯한 얼굴에 진지함이 서렸다.

“다름이 아니라, 좋은 소식이 있어서 그래.”

“좋은 소식?”

나는 얼른 그의 곁에 앉았다. 앨버트는 의기양양하게 품에서 뭔가를 꺼내 들었다. 편지 봉투가 실링 왁스로 봉인되어 있었다.

“너를 위한 골든 티켓이야.”

“그게 뭔데? 말장난하지 말고 이리 줘 봐.”

“어허, 안나.”

그가 편지 봉투를 향해 손을 뻗는 나를 제지하며 ‘골든 티켓’을 든 팔을 높이 올렸다. 사람 약 올리는 것도 아니고…….

“예의 바르지 않은 사람에게는 골든 티켓을 줄 수 없어.”

“그게 대체 뭔 소리야?”

“마법의 주문이 있다는 소리야.”

“말장난하지 말고 진짜 줘 봐!”

“주문을 외워야만 줄 수 있다니까! 그냥 딱 한 마디만 하면 돼. 어서.”

그는 작은 심술을 부리고 있었다. 나는 한숨을 푹 내쉬고는 단념하고 그가 원하는 말을 해 주었다.

“부탁합니다.”

망할 앨버트는 나를 놀리는 게 퍽 재밌었던 모양이다.

“뭐가 부탁인데?”

“편지.”

“편지가 뭐?”

“부탁이니까 편지 좀 달라고, 진짜!”

그래도 그는 멈춰야 할 선을 아는 남자였다. 알았어, 알았어. 앨버트가 나를 달래며 편지를 넘겨주었다.

나는 봉인을 뜯고 안에 숨겨져 있던 빽빽한 글씨들을 읽었다.

“이건…….”

“내가 좋은 소식 있다고 했지?”

“장난치는 거 아니지?”

“안나, 난 이런 걸로 장난 안 쳐. 네가 그토록 바라 왔던 거잖아.”

골든 티켓의 정체는 초청장이었다. 다름 아닌 비텔스덴에서 날아온 거였다. 그것도 친절하게 우리말로 번역까지 되어 있었다.

나는 이게 진짜라는 걸 믿을 수가 없어서 첫 줄부터 다시 읽어 내려갔다.

「친애하는 안나 키팅 양. 처음 인사드리겠습니다. 비텔스덴 필하모닉 연주자 협회에서 감히 키팅 양께 편지를 드립니다.

자격에 맞는 음악가를 찾고 있던 저희 측은 최근 몇 달간 열린 콩쿠르에서 우승을 독차지한 독보적인 피아니스트에 대해 전해 들을 수 있었습니다.

키팅 양께서 괜찮으시다면, 귀하를 비텔스덴으로 모시고자 합니다. 귀하께서 제안받으실 내용은 저희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전속 피아니스트로…….」

“네 소문내느라 엄청 힘들었어. 알지?”

“이 편지, 언제 도착했어?”

“배달부가 몇 시에 왔다 간 건지는 몰라도 이걸 발견하자마자 곧장 너한테 달려온 거야.”

“그럼 나, 갈 수 있는 거야?”

나는 항상 외국으로 떠나기를 갈망했다. 이유는 하나였다. 외국이라면 내가 안전할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아무도 나를 아는 사람이 없고, 사용하는 언어도 다른 외국이라면…… 어쩌면 나는 몸을 사리며 살지 않아도 될 거라고 말이다.

“당연한 걸 묻네, 안나. 비텔스덴에서 너를 공식으로 초청했잖아. 가지 못할 이유가 없지.”

“난…… 어쩌면 기회가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

“다른 사람도 아니고 네가? 넌 대단한 피아니스트야! 신문에까지 기사가 났잖아. 혜성처럼 나타난 신인 피아니스트, 3대 콩쿠르를 석권하다. 사람들이 네 이름을 알기 시작했어. 아마 곧 있으면 네 이름을 걸고 리사이틀도 열 수 있을걸.”

아, 그래. 신문도 문제가 되었다. 내 소식이 비텔스덴까지 닿은 건 분명 좋은 일이었지만, 비텔스덴 사람들까지 나에 대해 알게 되었다는 건 곧 ‘그 사람’도 내 이름에 대해 알게 될 가능성이 생겼다는 뜻이기도 했다.

내가 입스윈을 떠나야 하는 건 그 사람이 내 꿈에 자주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이름도 떠올리기 싫은 남자. 자일스 헤센. 나는 자일스가 나를 잡으러 오는 악몽에 시달렸다. 이렇게 살 수는 없었다. 나는 그가 마수를 뻗지 못할 만큼 멀리 도망쳐야만 했다.

“안나, 정말 비텔스덴으로 떠날 거야?”

“너야말로 왜 당연한 걸 물어?”

“혹시라도 네가 마음을 바꿨으면 기차표를 취소해야 하니까 그렇지.”

“벌써 표를 샀다고?”

앨버트는 벌써 표까지 구비해 놓은 상태였다. 나는 그의 행동력에 혀를 내두르면서도 그가 내게 이토록 진심인 이유가 뭘까 생각했다. 앨버트는 내 일을 마치 자신의 일인 것마냥 생각하고 행동했다.

“네가 빨리 떠나고 싶어 할 것 같아서.”

“그건 맞지만…… 설마 지금 당장 짐 싸서 떠나야 한단 소리는 아니지? 나 가방 하나도 안 싸 놨단 말이야.”

“시간은 충분하니까 괜찮아. 비텔스덴행 열차는 그리 많지 않아. 그래서 표를 구하려면 시간을 넉넉히 두고 구해야 해. 그래서 미리 끊어 놓은 거고. 기차가 출발하려면 한…… 일주일 남았나?”

나는 그의 말을 듣자마자 시장에서 장을 볼 생각부터 했다. 음식을 잔뜩 사다 놓고 일주일 동안 집에서 단 한 발자국도 안 나갈 것이다. 그래야 안심이 될 것 같았다.

외출을 했다가 군복을 입은 순찰대를 본 적이 있었는데, 나는 그들이 완전히 시야에서 벗어날 때까지 건물 벽 뒤에 숨어서 석고상처럼 굳어 있었다.

앨버트는 그런 나를 다독이며 말해 주었다.

“비텔스덴에 내릴 때까지 같이 가 줄게. 거기서라면 너도 안전할 거야. 그 남자도 널 쫓아오지 못할 거고. 남의 나라에서 그가 뭘 할 수 있겠어?”

나는 작게 감사를 표했다. 앨버트는 가끔씩 짜증 나게 굴 때가 있기는 해도 여전히 좋은 사람이었다. 게다가 그는 내 편이었다. 나는 그를 만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가끔 상상하곤 한다.

“기차는 어디서 타면 돼?”

“몬트리올 기차역에서.”

처음 들어 보는 장소였다. 난 입스윈에서 나고 자랐지만 인생의 대부분을 갇혀 산 덕분에 이곳 지리를 잘 알지는 못했다.

“그럼 일주일 후에 거기로 가면 되는 거야?”

“맞아. 정오를 넘어서 가면 오리엔트 특급열차가 기다리고 있을 거야.”

나는 기차의 이름을 속으로 되뇌어 보았다.

오리엔트 특급열차. 나를 미지의 땅으로 데려다줄 기차의 이름이었다.

앨버트는 내 곁에서 뿌듯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사슴이라도 한 마리 물어 온 사냥개 같아서 웃음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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