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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을 사랑한 건 살아남기 위해서였다-20화 (20/93)
  • <20화>

    수 쌍의 손전등 불빛이 나타나 또다시 나를 비추었다. 순식간에 그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뭐야. 그 여자가 아니잖아!”

    “여기서 뭘 하고 있던 거야? 통금 명령 못 들었나? 네가 지금 무슨 짓을 한 건지 알기나…….”

    “그만.”

    자일스의 명령 한 마디에 그들이 입을 다물었다. 그는 여전히 동요한 것처럼 보였지만, 목소리만큼은 차분하고 이성적인 지휘관의 것 그대로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자는 내가 알아서 돌려보낼 테니 각자 원위치로 복귀해.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헛수고를 해서 분통이 터지는 건 이해하지만 이렇게 꾸물거릴 시간 없어. 다들 이해하겠지?”

    “알겠습니다.”

    “돌아가. 이러고 있는 도중에도 그 여자가 한 발짝씩 멀어지고 있을 거다.”

    순식간에 부하들이 흩어졌다. 마침내 나와 단둘이 남게 된 그는 내 머리채를 잡았던 손에 천천히 힘을 풀었다. 우리는 몇 초 동안 아무 말도 없이 서로를 바라보기만 했다.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적어도, 그는 나를 놓아주었다.

    “릴리. 그러니까―”

    그가 말을 꺼낸 순간, 내 정신이 번쩍 돌아왔다. 나는 몸을 돌려 도망쳤다. 자일스는 나를 불러 세우지 않았다. 그가 나를 쫓아오고 있을까? 아마 그럴 것 같았다.

    발바닥에서 통증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나는 나를 향해 천천히 조여들어 오는 공포 때문에 반쯤 흐느끼며 정신없이 달렸다.

    두 번은 괜찮지만 세 번은 안 돼.

    세 번씩이나 내가 증오하는 남자들 때문에 고통받을 수는 없어!

    그는 반드시 내게 똑같은 짓들을 할 것이다.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나는 똑같은 일을 두 번이나 겪어 봤다. 같은 일이 벌어지지 않을 거라 믿을 이유가 단 하나도 없었다.

    왜냐하면 지금껏 내게 벌어진 일들은 다 그런 식이었으니까!

    난 아무것도 잘못하지 않았어. 난 아무것도…….

    목적 없이 달리기만 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다. 나는 점점 정신이 아득해지는 것을 느꼈다. 다리뿐만 아니라 온몸에 힘이 풀렸다. 자일스에게 머리채를 잡힌 이후로는 더 그랬다.

    마치 악몽 속에 들어온 기분이었다. 아무리 꿈에서 깨어나려 해도, 꿈속에선 깊은 심해 속에서 발버둥치는 것처럼 몸이 마음대로 움직이질 않듯이.

    나는 결국 으슥한 그림자 속에 몸을 숨기고 덜덜 떨며 무릎을 꿇었다. 제발 그가 나를 찾아내지 못하기만을 바라면서. 그가 아닌 다른 사람이 먼저 나를 발견하기를 바랐다.

    이젠 그 누구라도 상관없을 것 같았다.

    나는 천천히 눈을 떴다. 갓을 쓴 백열등이 흐릿하게 시야를 밝혔다. 그것이 뿜어내는 빛이 너무 밝아서 고개를 돌리려는데, 뭔가가 불쑥 나타나 백열등 불빛을 가렸다.

    내가 모르는 사람이었다. 웬 남자가 나를 향해 가까이 몸을 숙여 왔다. 처음에는 자일스인줄 알고 본능적으로 그를 밀어 냈으나, 남자의 목소리를 듣고 그가 아님을 알았다.

    “쉿, 괜찮아.”

    나는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와중에도 내가 무슨 상황에 처한 건지 파악하려 애썼다. 일단 이곳은 최소한 감옥은 아닌 것 같았다. 나는 작은 방 안에 누워 있었다. 그리고 내 몸에선 열이 났다. 정신을 제대로 차릴 수가 없었다.

    남자는 내 이마를 물수건으로 닦아 주며 말했다.

    “추운 겨울밤에 얇은 스웨터 차림으로 쓰러져 있었으니, 몸살이 안 날 수가 있나. 불쌍한 것.”

    그는 내게 계속해서 괜찮다고, 괜찮을 거라고 말했다. 마치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다 안다는 것처럼 말이다.

    나는 섣불리 그를 믿어선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그 말이 주는 온기와 안락함에 기대고 싶어졌다. 내게 괜찮을 거라고 말해 준 이는 지금껏 나 스스로밖엔 없었다.

    스스로를 다독이는 것만으로 충분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남의 목소리로 그런 위로를 들으니 내가 얼마나 외로운 싸움을 하고 있었는지 체감이 되었다.

    몸이 아픈 탓인지 마음이 약해진 나는 하마터면 울음을 터뜨릴 뻔했다. 하지만 난 참았다. 낯선 사람 앞에서 눈물을 흘릴 수는 없었으니까.

    대신 나는 눈을 감았다.

    조금만 쉬어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다시 눈을 떴을 땐 세상이 밝아져 있었다. 내 정신도 훨씬 말끔했다. 아침 햇살을 맞으며 눈을 뜬 나는 간밤에 있었던 일을 기억해 내고는 벌떡 몸을 일으켰다.

    나는 분명 혁명군을 상대로 도망치다 자일스에게 잡혔다. 하지만 무슨 연유에선지 그는 나를 놓아줬고…… 나는 도망쳤다. 그 후로는 얼른 기억이 나지 않았다. 무슨 일이 있었지?

    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낡은 태가 여실해 보이는 좁은 방이었다. 드럼통을 개조해서 만든 난로가 탁탁 소리를 내며 방의 온도를 따뜻하게 유지하고 있었다. 창밖에서 거리를 지나다니는 사람들의 말소리가 뜨문뜨문 들려왔다.

    그 순간 나는 기억해 냈다. 그 남자! 내가 모르는 남자가 있었다. 그가 지난밤에 내 얼굴을 물수건으로 닦아 주며 무어라 말을 건네 왔었다. 그는 어디에 있지? 자일스의 부하일까? 저 문 밖을 나가면, 제복을 입은 혁명군과 눈이 마주치게 될까?

    그러나 문이 열리고 어젯밤에 나를 돌봐 주었던 남자가 다시 나타났을 때, 내 생각이 틀렸다는 걸 알았다.

    그는 혁명군이 아니었다. 제복을 입고 있지도 않았고, 무엇보다도 자일스가 나를 잡았다면 직접 나를 대면하고 싶어 했을 테지 다른 사람을 들여보내지는 않았을 거다.

    남자가 내 곁에 놓인 의자에 앉아 물이 든 컵을 내밀었다.

    “목마르지? 마셔.”

    나는 컵을 받아 들면서도 그를 빤히 노려보았다. 자일스의 부하가 아니라면, 그는 누구지? 나는 세상과 맺은 연이 전혀 없는 사람이었다. 이 세상 천지에 아무 이유 없이 나를 도와줄 사람은 없다는 뜻이었다.

    남자는 나를 달래듯이, 혹은 부탁하듯이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냥 깨끗한 물이야. 아무것도 안 들었어. 믿어도 돼.”

    “내가 뭘 믿고?”

    “너를 안전한 곳으로 데려다 놓은 사람이 고작 물 한 컵으로 너를 해치기라도 할까 봐?”

    “난 당신을 몰라.”

    “그래. 나도 알아. 갑자기 낯선 곳에 와서 모르는 사람과 대화하게 된 이 상황이 혼란스러울 거라는 거. 지난밤보다 좋아지긴 했지만, 넌 아직 아파. 이곳에서 빨리 벗어나려면 얼른 나아야지. 내가 도와줄게. 하지만 넌 그 전에 수분을 보충해야만 해. 지난밤 일로 탈수가 왔을 거야.”

    나는 물컵을 내려다보았다. 보기에는 멀쩡해 보였다. 물에 뭔가 들어 있지는 않은지 테스트만 해 볼 요량으로 살짝 입술을 적셨다. 맛은 이상이 없었다. 게다가 생각보다 훨씬 더 목이 말랐다는 걸 깨달은 나는 물에 이상이 없다는 사실을 확인하자마자 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천천히 마셔.”

    그가 나를 타일렀을 땐 이미 내가 컵을 비우고 난 뒤였다.

    “더 갖다줄까?”

    “나를 왜 도와주는 거야?”

    “종종 좋은 일도 일어나기 마련인 법이야.”

    “나한텐 안 그래.”

    남자는 내 의견을 존중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의자 등받이에 편하게 몸을 기대더니 말했다.

    “네가 어떤 상황에 처했는지 알고 있어.”

    “…….”

    “긴장하지 마. 이걸 빌미로 너를 협박하거나 할 생각은 없으니까. 다만 나는 반대로 네게 협조를 요청하고 싶어.”

    “웃기고 있네. 이런 식으로 길거리를 떠도는 여자들 잡아다가 지금껏 어디에 팔아먹었어? 나도 팔아넘기려고 이러는 거야?”

    “자일스 헤센이 너를 쫓고 있지?”

    나는 입을 다물었다. 그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많은 걸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내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그는 다시 말을 이었다.

    “그는 유명한 사람이지. 물론 좋은 의미에서는 아니지만. 적어도 입스윈 사람들에게 있어서 그는 영웅이나 마찬가지일 거야. 벨담을 끌어내리고, 이곳의 영광을 되찾아 준 사람이니까. 하지만 나 같은 사람에게 그는 지독한 냉혈한과도 같아. 그가 잡아 넣은 희생자들이 한둘이 아니라는 건 너도 알고 있겠지. 나는 너 같은 사람들을 구조하기 위해 파견된 사람이야.”

    “구조한다고?”

    “그래. 혁명군의 눈에 든 이상 이 땅에서 살아남기는 힘들어. 아마 평생을 도망 다니면서 살아야겠지. 난 너를 이 땅 밖으로 빼내 줄 거야. 그럼 너는 자유를 찾겠지.”

    “그 대가로 당신은 뭘 얻지?”

    “꼭 대가를 받아야만 일할 수 있는 건 아니야.”

    “개소리. 아무 이유도 없이 남을 돕겠다고 나설 사람은 이 세상에 없어.”

    “자일스 헤센은 많은 사람들을 죽였어. 더 많은 사람들을 고문했고. 그에게 적들이 많을 거라는 생각은 안 해 봤어? 그가 입스윈의 자유와 영광을 위해 사람들을 죽이는 동안, 그의 가슴팍에 달린 훈장들이 빛나는 동안 그만큼 원한을 품은 사람들도 늘어났을 거라는 생각은?”

    “그럼…….”

    내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당신에게도 자일스가 적이야?”

    “그럼. 두말 하면 입 아플 소릴.”

    “그럼 자일스가 당신도 쫓고 있어?”

    “나에 대해 알아낸다면 반드시 나를 쫓아오겠지. 얼른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해도 좋아. 하지만 이건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복수야. 그가 바라 마지않는 일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것. 자일스가 너를 그리도 간절하게 원하고 있으니, 나는 반대로 네게 자유를 되찾아 줄 거야.”

    “……당신이 그럴듯한 말로 나를 속여서 사람 장사를 하지 않는다는 걸 내가 어떻게 믿지?”

    “그럴 생각이었다면 굳이 힘들여서 너를 설득하려 하지도 않겠지. 내가 널 사창가에라도 팔아넘길 생각이었다면, 그냥 지난밤에 네가 정신을 잃은 틈을 타 이미 널 팔아 치우지 않았을까?”

    그는 농담하는 것 같지 않았다. 실제로 그의 말이 맞기도 했다. 나는 힘없는 여자에 불과했다. 지금 당장 그가 완력을 써서 나를 제압할 수도 있는 일인데 그는 구태여 나와 대화를 시도하고 있었다.

    “……정말 나를 외국으로 데려다줄 거야?”

    “네가 나를 믿고 따라오기만 한다면. 선택권은 네게 있어. 나는 아무것도 강요하지 않을 거야. 네가 나를 믿겠다고 한다면 정말 기쁠 테지만, 그렇지 않다고 해도 화를 내거나 하지는 않아. 네가 결정해. 적어도 나는 자일스 헤센이랑은 다른 종류의 사람이거든.”

    남자는 자리에서 일어나 나를 내려다보았다.

    “바깥에 나가 있을게. 마음 정하면 내게 말해 줘.”

    그는 그 말을 끝으로 방을 나갔다. 그의 말대로 나는 선택의 기로에 놓였다. 그를 믿어도 될까? 외국으로 데려다준다는 건 허울 좋은 거짓말에 불과하지 않을까?

    그를 따라가지 않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럼 정말 내게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심지어 내게는 이 마을을 떠날 여비조차 없었다. 떠난다 해도 자일스가 더 빠를지 몰랐다. 아니, 그럴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나 혼자서는 가망이 없었다.

    남자가 했던 말이 내 머릿속을 맴돌았다. 평생 도망치며 살아야 할 거야. 이 땅을 떠나지 못하면, 나는 몇 번이나 이름을 바꿔야 할지도 몰라. 그는 마음이 바뀔 때까지 나를 쫓아다니겠지. 그리고 그가 마음을 바꾸는 일 따위는 평생 일어나지 않을 거야.

    그렇다면 남자를 믿어야 할까? 그는 누구이며, 어디서 온 사람일까? 왜 자일스에게 앙심을 품게 되었을까.

    적어도 남자는 자일스 헤센에 대해 알고 있었다. 그의 이름과 신분에 대해서도, 그가 해 온 일들에 대해서도. 어쩌면 그는 내게 자일스에 대한 이야기를 더 많이 들려줄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침대 바깥으로 나갔다. 내가 가진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니 우선은 그를 믿어 봐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능성이 없는 쪽보단 있는 쪽이 더 낫지 않겠는가.

    나는 그를 믿는 것이 아니었다. 그가 가진 적의를 믿기로 했다.

    문밖에 그가 있었다. 그가 담배를 태우다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나는 그를 향해 말했다.

    “내가 뭘 해야 하는지 말해 줘. 그리고 당신 이름도.”

    그가 미소를 지었다.

    “내 이름은 앨버트 쇼야.”

    거리를 활보하던 남자는 사무실에 출근하는 사람인 양 최대한 자연스럽게 폐건물 문을 닫았다. 그의 앞에는 낡은 타자기가 있었다. 그는 휘파람을 불며 타자기에 종이를 끼우고 타자를 치기 시작했다. 그가 보내야 할 전보는 아주 짧고 간단명료한 단어들에 불과했다.

    오직 동료들만이 이 메시지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생각보다 힘을 덜 빼게 되었다는 사실이 마음에 들었다. 확실히 그는 영업 사원 체질이 아니었다. 여자가 그를 흔쾌히 믿어 주어서 얼마나 고마운지.

    타자기가 철컥철컥 소리를 내며 움직였다.

    「OPEN FOR BUSINESS」

    안나 키팅이 그의 손에 들어왔다.

    나머지는 그의 손에 달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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