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그토록 치열하게 살아남았는데, 고작 추위 따위에 무릎을 꿇는다면 그건 정말 억울할 것만 같았다.
사실 억울하지 않은 게 없었다. 내가 왜 이따위 상황에 처해 있어야만 하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내가 무슨 잘못을 했지?
난 그저 묵묵히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었다. 그러다 딱 한 번, 그것도 내 몸을 지키기 위해 반항을 했다는 이유로 개보다도 못한 취급을 받아야만 했다.
그런데 이제는 내게 해 준 것도 없는 귀족의 혈통 때문에 신분을 숨겨야만 하는 데다 웬 미친 혁명군 하나가 내 뒤를 쫓고 있었다.
차라리 내가 사람을 죽이기라도 했다면 억울하지나 않을 텐데.
나는 나를 지키고 싶었다. 내가 원하는 건 그게 다였다.
그 일이 이렇게나 고될 줄은 미처 몰랐던 게 잘못이라면 잘못이었다.
자일스는 왜 나를 찾고 싶어 하는 걸까? 이 또한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었다. 나는 잘못한 게 없었다.
생각해 보니 내게 일어난 모든 일들이 다 그런 식이었다. 내가 만난 모든 남자들은 단지 내가 그들의 기대에 부응해 주지 않았다는 이유로 나를 매질하고 괴롭혔다.
그래서 나는 당연히 자일스 또한 마찬가지일 거라 생각했다. 내게 호의를 베풀었던 남자들이 전부 다 그랬으니까. 그라고 다를 게 있을까? 내가 아는 세계는 그게 전부였다. 그들은 내게 호의를 베풀고, 나는 그들의 기대를 충족해 주고.
만약 그러지 못한다면, 나는 벌을 받게 된다.
그러니까 나는 지금 또다시 벌을 받는 중이었다. 자일스로부터 도망침으로써 그가 원하는 걸 주지 않았으니까.
이번에는 기필코 끝까지 도망칠 거다. 살아남는 것만으로는 부족했다. 내가 필요로 하는 건 나를 괴롭히는 남자들로부터 완전히 벗어나는 것이었다.
그게 내가 원하는 결말이자 승리의 트로피였다.
나는 숨을 죽이고 앉아서 머리를 굴렸다. 멍청하게 웃으며 순종하는 게 훨씬 편하고 쉬운 길이겠지만 난 이미 그 길을 거부했다. 이 추위는 내가 선택한 것이었고 나는 그에 대해 만족했다.
다만 끊임없이 생각해야 할 뿐이었다. 어떻게 해야 그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있지?
그때였다. 나는 군화 소리를 들었다. 분명했다. 나는 군홧발 소리만은 확실히 구분할 줄 알게 되었으니까. 한 사람이 아니라, 최소 두 사람 이상이 걸어오고 있었다. 혁명군이 틀림없었다!
나는 벽 쪽에 최대한 붙어서 그림자 속에 몸을 숨겼다.
그들이 대화하는 소리가 들렸다.
“이 근처 어딘가에 숨어 있을 거야. 확실해. 일부러 이곳 주민들에게 한시적으로 통금을 걸었으니 뭔가 움직인다 싶으면 높을 확률로 그년일 거라고.”
“알겠습니다.”
“오늘 안에 잡지 못하면 다음에는 더 힘들어질 거야. 장장 삼십 킬로미터를 도망친 여자다. 쥐새끼 한 마리 움직이는 소리라도 가볍게 대하지 마라.”
온몸이 얼어붙는 것 같았다. 물론 추위 때문은 아니었다. 삼십 킬로미터 이야기는 뭐지? 솔즈부르 저택에서 여기까지 거리가 그렇게나 멀었던가?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건 그들이 지금 나를 찾아다니고 있다는 거였다.
그들이 멀어지고 있었다. 나는 천천히 심호흡을 하며 벽에 등을 대고 옆으로 움직였다. 조금이라도 소리를 내면 그들이 알아차릴 것 같았다.
그때였다. 근처에서 깡통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더니 데구르르 소리를 내며 굴러갔다. 나는 완전히 굳어서 커다란 깡통이 굴러가다 벽에 부딪쳐 움직임을 멈추는 모습을 쳐다보기만 했다.
머지않아 누군가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손전등 불빛이 건물 벽 틈새를 수색하기 시작했다.
나는 정신을 차리고 움직였다. 이젠 내 발소리가 크게 나고 있는지도 제대로 가늠할 수가 없었다. 어떻게든 그들의 시야에서 벗어나기 위해 나는 골목의 그림자 사이사이를 누볐다.
마침내 충분히 멀어졌다고 생각할 무렵이었다.
“누구야?”
또 다른 불빛이 나타났다. 손전등을 든 군인이었다.
나는 불빛에 완전히 잡히고 말았다.
*
자일스 헤센은 홀로 거리를 순찰 중이었다. 텅 비어 버린 거리를 밝히는 건 희뿌연 가스등뿐인 어둑한 밤이었다.
탈출한 벨담 여자 하나를 잡기 위해 이곳 사람들에게 통금 명령까지 내렸다. 그의 계산이 맞다면 마르티나 솔제는 아직 이 작은 도시를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오늘 밤이 지나면 목표물을 영영 놓칠 수도 있었다. 지휘관이나 마찬가지인 자일스에게 그 모든 책임이 돌아올 것을 생각하면 가볍게 생각해선 안 될 작전이었다.
더 나은 위치로 올라서지는 못하더라도 그의 자리만큼은 지켜야 했다.
그에겐 아직 몰락해선 안 될 이유가 있었으니까.
이미 부하들이 이 근방을 봉쇄하고 흩어져서 수색 중이었다. 시간이 얼마 없었다. 작전이 실패한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상대는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여자 하나였다. 혁명군이 고작 여자 하나를 상대로 패배했다는 사실을 사람들이 알게 된다면 무슨 소리를 듣게 될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런 만큼 더더욱 작전에 집중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자일스는 자꾸만 정신이 분산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공식적으로 그는 마르티나 솔제를 찾아 이 마을을 방문한 것이었지만 이곳에는 그가 찾는 이가 한 사람 더 있었다.
릴리, 이제는 안나 키팅이라는 이름으로 저택을 떠난 여자. 잊으려 한들 잊을 수가 없는 사람. 어떻게 잊을 수 있겠는가? 사람들에겐 저마다 살아갈 이유가 필요하다. 그것이 욕망이든, 앞날에 대한 기대와 희망이든, 혹은 사명감이든.
자일스는 안나와 함께했던 짧은 순간순간을 잊지 못했다. 이만 그의 세상이 끝나 버렸으면 좋겠다고 빌었던 날조차 안나의 곁에 있으면 모든 걸 잊을 수 있었다. 그런 일을 가능케 하는 건 안나뿐이었다.
그녀의 얼굴을 다시 한번 보고 싶었다. 그리고 무슨 일이 있었느냐고 물어야 했다. 대체 무엇이 그녀를 두렵게 만든 건지. 무엇이 그녀로 하여금 저택에서 도망치게 만든 것인지…….
안나는 그에게 무한한 평온을 가져다주는 존재였다. 안나에 대한 위협은 그에 대한 위협과도 같았다. 안나를 해치려 하는 이가 있다면 자일스는 절대 그냥 넘어가지 않을 생각이었다.
자일스는 생각을 정리했다. 우선은 마르티나 솔제를 체포하는 게 우선이었다. 임무를 빠르게 마무리해야 안나를 찾는 일에 집중할 수 있으리라.
그때, 근처에서 소음이 들렸다. 잠시 조용해지는가 싶던 사위가 다시 소란스러워졌다. 누군가 무어라 외치는 소리와 함께 무거운 사물이 넘어져서 와장창 깨지는 소음이 났다.
자일스는 곧장 불빛이 깜박이는 쪽으로 달려갔다. 부하들이 뭔가 발견한 게 틀림없었다. 다급한 외침이 끊이지 않고 있었다. 단순한 취객이나 철없는 아이의 훼방 정도로 끝나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골목 너머 어딘가에서 부하들이 여자를 추적하고 있었다. 자일스는 섣불리 골목 안으로 진입하는 대신 벽에 몸을 붙이고 발소리가 들리는 위치를 파악했다. 목표물의 발소리는 군화를 신은 부하들이 내는 소리와는 확연히 구분될 터였다.
마침내. 누군가가 골목 바깥으로 튀어나왔다. 당연히 그의 부하는 아니었다.
그보다 두 뼘은 더 작은 여자였다.
자일스는 몸을 날려 여자의 머리채를 낚아챘다. 여자가 그의 손아귀 안에서 버둥대는 것이 느껴졌다. 자일스는 목표물이 더 이상 저항하지 못하도록 벽 쪽으로 밀어붙여 움직이지 못하게 찍어 눌렀다.
“움직이지 마.”
그가 으름장을 놓자 저항이 멈추었다. 자일스는 여자를 잡지 않은 손으로 손전등을 꺼내 그녀의 얼굴을 비추었다. 환한 빛 속에서 그가 아는 얼굴이 드러났다.
자일스의 사고 회로가 일순 정지했다.
“……릴리?”
*
그들에게 잡히면 끝장이었다. 내게 다음 기회는 없을 게 분명했다. 나는 있는 힘을 다해 도망쳤다. 어두워서 앞이 잘 보이지 않았지만 지금은 그런 걸 따질 때가 아니었다.
극한 상황에 몰린 사람은 어둠 속에서도 대낮처럼 앞을 잘 볼 수 있게 된다는 사실을 나는 이번 기회에 알았다.
좁은 골목 안에서 추격전을 벌이는 건 내게 불리했다. 그들은 숫자가 많았고, 이런 좁은 곳에서 포위당하면 그땐 탈출할 방법이 없었다. 어떻게든 골목을 빠져나가야 했다. 그들을 따돌리는 것만이 내가 가진 최선의 수였다.
마침내 환한 달빛이 비추는 커다란 거리를 발견한 나는 그쪽으로 곧장 달려 나갔다. 뒤를 돌아보면 그들에게 잡힐 것만 같아서 나는 오로지 앞만 봤다.
마침내 골목을 빠져나왔다고 생각하던 그때, 별안간 생각지도 못한 고통이 나를 움켜잡았다. 누군가 내 머리채를 잡았다. 나는 빠져나가려고 애를 썼지만 억센 남자의 손아귀를 뿌리칠 힘이 내게는 턱없이 부족했다.
혁명군이 나를 차갑고 딱딱한 벽 위로 몰아붙였다. 이마에 통증이 느껴지는 걸 보니 분명 벽에 긁힌 상처가 났을 거다. 그가 나를 향해 경고했다.
“움직이지 마.”
그 목소리를 듣는 순간, 나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어디서 많이 들어 본 목소리인데. 설마…….
그가 내 얼굴을 향해 손전등 불빛을 비추었다. 나는 반사적으로 눈을 찌푸렸다. 차라리 눈을 감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이다음에 일어날 일을 상상하는 것조차 내게는 버거운 일이었으니까.
하지만 내 얼굴을 확인한 혁명군은 잠시 아무 행동도 하지 않았다. 내 손목에 수갑을 채우지도, 동료들을 부르지도 않았다. 나는 슬그머니 눈을 떴다. 그는 멍하니 서서 내 얼굴을 바라만 보고 있었다.
“……릴리.”
그 이름. 내가 가장 듣고 싶지 않았던 그 이름이었다. 릴리에 대해 아는 이는 오로지 단 한 사람뿐일 텐데.
나 또한 고개를 들고 그의 얼굴을 확인했다. 칠흑처럼 검은 머리에, 검은 눈. 자일스 헤센이 내 앞에 있었다. 어쩐지 그는 영혼이 빠져나간 사람처럼 보였다. 마치 이제 뭘 해야 할지 도무지 모르겠다는 듯이 말이다.
나로선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토록 원하던 나를 잡았는데 왜 저러는 거지? 이렇게 빨리 잡힐 줄은 몰랐다는 건가?
그가 뭔가를 더 하기도 전에 부하들이 그의 곁으로 달려왔다.
“대위님! 잡으셨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