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을 사랑한 건 살아남기 위해서였다-18화 (18/93)
  • <18화>

    린즈데일에 도착한 그들은 흩어져서 도주한 벨담 귀족 여성의 흔적을 쫓았다. 자일스 또한 마찬가지였다. 다만, 그에게는 찾는 이가 한 사람 더 있었을 뿐이었다.

    자일스는 마르티나 솔제를 찾는다는 구실로 릴리의 행방을 조심스레 뒤쫓았다. 그는 릴리의 초상화를 참고해 대충 본뜬 그림을 들고 다니며 지나가는 사람들을 붙잡았다.

    이렇게 생긴 여자를 본 적이 있습니까? 위험한 인물은 아니지만…… 개인적으로 찾고 있는 사람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모른다고 했다. 그녀를 찾는 일이 쉽지 않으리란 사실은 예감하고 있었다. 큰 소리로 소란을 피우며 동네를 한 바퀴 돌지 않는 이상 사람을 찾는 건 원체 쉬운 일이 아니기도 했다.

    게다가 릴리가 이곳 린즈데일에 있을지도 사실은 미지수였다.

    임무와 병행하며 반나절을 캐물어도 소득이랄 게 없었다. 절망한 자일스는 초췌한 꼴이 된 채로 그의 앞을 지나쳐 가는 한 남자를 붙잡았다.

    “말씀 좀 묻겠습니다.”

    남자는 그의 제복을 보고는 금세 호의적인 태도를 갖추었다.

    “제가 뭘 도와드릴 수 있겠습니까?”

    “이렇게 생긴 여자…… 보신 적 있으십니까?”

    남자는 그림을 아주 오랫동안 유심히 들여다보더니 뭔가 떠올린 듯한 표정을 지었다.

    “혹시 검은 머리를 가진 여잡니까?”

    그는 이어 한쪽 방향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어젯밤에 저기 저쪽 건물에 기대서 떨고 있는 걸 봤습니다. 아마 곧 죽을 거라고 생각했죠. 비도 오고, 추운 날씨인데 얇은 천 쪼가리 하나 걸치고 있었거든요. 신고하려 했는데 바로 저 집에 사는 여자애가 안으로 들여보내 주더군요. 아직도 거기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입니다.”

    자일스는 감사 인사를 건네고는 남자가 가리킨 건물 쪽으로 향했다. 그의 걸음걸이에는 다시금 힘이 실려 있었다. 릴리를 다시 만날 수만 있다면 더 바랄 게 없을 것 같았다.

    릴리가 이곳에 있을까?

    자일스는 대문을 두드렸다. 똑똑. 그러자 안에서 대답이 들려왔다.

    “안나?”

    주근깨가 특징인 여자가 문을 열었다. 전혀 예상치 못한 불청객을 마주친 그녀가 놀란 얼굴로 굳었다. 뭔가 문제가 생긴 게 틀림없다고 생각한 모양인지, 그녀가 물어 왔다.

    “무슨 일인가요?”

    “사람을 한 명 찾고 있습니다.”

    자일스는 이제 모서리가 너덜너덜해지기 시작한 그림을 들이밀었다.

    “검은 머리에 파란 눈을 가진 사람입니다. 보신 적 있으십니까?”

    그림 속 주인공을 멍하니 바라보던 여자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맞아요. 안나예요.”

    “뭐라고 하셨습니까?”

    “안나요. 이 애 이름이요.”

    여자가 말을 이었다.

    “자기 이름을 안나 키팅이라고 말했어요.”

    *

    셰일라 칼튼은 조바심이 났다. 그녀는 한참은 올려다봐야 할 정도로 헌칠하게 키가 큰 혁명군 장교를 마주하고 있었다.

    그 위용은 가히 위압적이라고 할 만했다. 그는 정중하고 예의 발랐지만, 신사 같은 태도가 미처 가려 주지 못한 냉혈한의 눈빛 앞에서 그녀는 자연히 긴장하게 되었다.

    그는 분명 셰일라 같은 사람들을 위해 조국을 구해 낸 혁명군이었다. 하지만 그 말은 그가 아주 많은 사람들을 고문하고 죽였다는 뜻이 되기도 했다. 셰일라는 굳이 누가 그 사실을 가르쳐 주지 않아도 남자의 얼굴을 보고 느낄 수 있었다.

    장교는 셰일라에게서 원하는 정보를 다 얻었는지 한층 편해진 낯빛으로 고개를 살짝 숙여 보였다.

    “협조 감사드립니다. 그럼.”

    이제 볼일이 없으니 떠나려는 눈치였다. 셰일라는 그가 완전히 집을 벗어나기 전에 그를 붙잡았다.

    “잠깐만요.”

    장교가 걸음을 멈추고 셰일라를 돌아보았다. 다시 마주한 그의 눈빛이 마치 버려진 폐가의 암암한 그림자를 보는 것 같아 소름이 끼쳤다.

    “혹시 그 애가 위험한 인물인 건가요?”

    그녀가 조심스레 물었다. 장교의 표정에는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그러니까…… 장교님께서 찾으시는 거라면, 혹시나 해서요. 그럴 리는 없을 거라 믿고 싶지만…… 혹시나 그 애가 벨담…….”

    “칼튼 양.”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그녀의 말문을 막았다. 물론 장교는 아직 신사적인 태도를 유지하고 있었지만, 어쩐지 그가 셰일라의 질문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윽고, 싸늘하게 식어 있던 장교의 낯빛이 온화하게 물들었다. 마치 어두웠던 방 안에 촛불을 켠 것처럼 말이다. 그는 미소를 지어 보인 후 말했다.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당신과도 같은 선량한 국민일 뿐이니까 말입니다. 불온한 사건과는 전혀 연루될 일 없는 사람입니다. 그저…… 제가 개인적으로 빚을 진 일이 있어서, 꼭 갚고 싶어 찾는 것뿐입니다.”

    “아…… 그렇군요.”

    “그러니 불안해하지 마십시오. 제가 안나 양을 찾아도, 혹은 찾지 못한다 해도…… 큰일은 없을 겁니다.”

    검은 눈동자를 가진 장교는 가볍게 목례해 보이고는 그대로 집을 떠났다. 이윽고 혼자 남게 된 셰일라는 안도의 한숨을 내려놓으며 미소를 지었다. 역시. 그럴 리가 없지. 내가 벨담인을 몰라보고 숨겨 줬을 리가.

    그녀는 콧노래를 부르며 점심 식사 준비를 했다. 냄비에 물을 올리고, 야채를 썰고 향신료를 준비했다. 벨담 사람들이 기세등등하던 시절에는 감히 욕심도 못 냈던 재료들이 가득했다. 그래서인지 셰일라는 요리를 할 때 제일 만족스러웠다. 이젠 이 모든 것들이 그녀의 것이었으니까.

    향기로운 빵도 마찬가지였다. 물론 빵은 입스윈에서 가장 대중적인 음식들 중 하나였지만 이렇게 질 좋고 부드러운 빵을 마음껏 먹을 수 있게 되었다는 건 정말이지 축복과도 다름이 없었다.

    마침내 야채수프와 흰 빵으로 식탁을 차리고 앉으려던 그때였다.

    누군가가 노크를 했다.

    똑똑.

    셰일라는 움직임을 멈추고 대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누구지? 설마 안나인가? 그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안나가 잠시 외출을 했다가 돌아온 거다. 어서 말해 줘야 하는데! 어떤 장교님이 와서 너를 찾았다고 말해 줘야지. 셰일라는 그런 생각을 하며 그릇을 내려놓고 문 쪽으로 달음질쳤다.

    “안나, 너야?”

    그녀는 문을 열어 문을 두드린 당사자의 얼굴을 확인했다. 하지만 문밖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던 이는 이번에도 안나가 아니었다. 또 다른 남자가 셰일라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온화하고 부드러운 인상을 가진 남자가 미소 짓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그가 인사를 건넸다. 먼젓번 다녀갔던 장교와는 정반대의 인상을 가진 남자였다. 셰일라는 자연히 얼굴이 붉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아…… 안녕하세요.”

    “여러 사람 들쑤시고 다니면서 수소문을 했더니 진이 다 빠지는군요. 글쎄, 제 사촌 여동생을 찾아야만 하는데 아무리 찾아도 연락이 닿지를 않지 뭡니까. 혹시 근처에서 보신 적 있으신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안나 키팅이라고 하는데.”

    그 순간 셰일라의 머릿속에 번뜩 떠오르는 기억이 있었다. 분명 안나도 가족이 자신을 데리러 올 거라고 말했는데!

    “맞아요! 안나가 여기 있다가 갔어요. 사실, 어디로 갔는지는 잘 모르겠는데…… 일하러 갔다 오니 집에 없더라고요. 곧 돌아올 수도 있겠지만요. 아무튼 안나가 어젯밤에 여기서 머물렀어요. 어떡하지, 안나 얘는 가족이 온 줄도 모르고 어딜 간 거야…….”

    “너무 마음 쓰지 마세요. 곧 찾을 수 있을 겁니다. 이 마을은 정말 좁으니까요. 그렇지요? 그런데 한 가지 신경 쓰이는 건…… 방금 혁명군이 이 집을 들렀다고 해서요. 혹시 무슨 일이 있었다거나 한 건 아니죠?”

    이름 모를 남자가 걱정스러운 낯빛으로 물어 왔다. 셰일라는 고개를 내저었다.

    “별일 아니었어요. 그냥 찾고 있는 사람이 있다기에……. 아, 그러고 보니 그 사람도 안나를 찾는다고 했는데! 아마 그 사람의 도움을 받는다면 더 빨리 찾을 수 있을지도 몰라요. 혁명군 사무소 위치 알려 드릴까요?”

    “혁명군이 안나를 찾았다고요?”

    그에게는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었는지 그가 안절부절못했다.

    “왜 안나를 찾은 거죠? 그 애가 무슨 잘못을 했나요?”

    “아니, 그건 아니고…….”

    “자세히 얘기해 주세요.”

    남자가 간절히 부탁해 왔다. 그는 다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부탁합니다. 그가 왜 안나를 찾았는지 말해 줘요.”

    *

    나는 한 가지 사실을 알았다. 이 마을에는 기차역이 없다는 사실 말이다. 다른 지역으로 떠나려면 노면 전차라는 것을 타야만 하는데, 충분히 멀리 떠나기 위해서는 많은 삯을 지불해야만 했다.

    한 마디로 지금 당장 내가 떠날 수 있는 방법은 없다는 거다.

    내가 가진 건 훔친 동전 몇 푼이 다였다. 돈을 더 마련해야 하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도저히 떠오르지가 않았다. 이럴 줄 알았다면 저택에 있을 적에 보석 장신구라도 하나 훔쳐다 놓을 걸 그랬다.

    겨울이 다가오고 있었다. 바깥에서 버티기에는 너무 추울 뿐만 아니라, 해가 제일 빨리 떨어질 시기라는 점이 내게는 최악의 악재였다.

    어제는 운 좋게도 누군가의 호의를 빌려 무사히 침대에서 밤을 보낼 수 있었지만, 오늘 밤도 그런 행운을 기대할 수는 없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셰일라가 준 스웨터는 따뜻했지만 겨울의 한기를 막아 내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나는 덜덜 떨며 그나마 따뜻해 보이는 구석에 주저앉았다.

    해가 떨어지자 사람들은 점차 거리에서 사라지기 시작했다. 가게를 밝혔던 불이 하나둘씩 꺼지고, 시간이 지날수록 한산함만이 빈 거리를 채웠다. 어떻게 해야 하지? 머리를 굴려야 했다. 어떻게든 오늘 밤을 무사히 넘겨야 했다.

    이런 곳에서 얼어 죽을 수는 없으니까.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