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화>
내가 눈을 떴을 즈음엔 집이 텅 비어 있었다. 나는 방문을 열고 나갔지만 어딜 봐도 셰일라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나는 곧 그녀가 남겨 둔 쪽지를 발견할 수 있었다. ‘나 일하고 온다! 점심 즈음에 올 것임.’
쪽지를 내려놓은 나는 빵 한 덩이를 발견했다. 내가 먹어도 되는 걸까? 그런 걱정을 하기에 나는 아직 배가 고팠다.
솔즈부르의 저택에서는 잘 참을 수 있었던 것 같은데, 텅 빈 저택을 나오니 배고픔이 나를 두 배는 더 괴롭게 했다. 이상한 일이었다.
셰일라는 내게 이 집에 머물러도 된다고 말했지만, 사실 내겐 그럴 생각이 없었다. 이곳은 저택과 너무 가까웠고, 여기 오래 머무르는 건 현명한 처사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한시라도 빨리 이 근방을 떠야 하는 사람이었다.
밤사이 비가 그쳐 있었다. 간밤에 있었던 일은 분명 행운이었다. 안전한 곳에서 비를 피할 수 있었고, 따뜻한 음식을 먹을 수 있었으며 좋은 옷까지 얻을 수 있었으니까. 내가 벨담인의 핏줄을 이었다는 사실을 그 애가 알았다면 절대 일어나지 못했을 일들이었다.
셰일라는 내 은인이나 마찬가지였고, 나는 실제로도 그 애에게 감사했다. 하지만 나는 빈털터리였다. 가진 것 한 푼 없이 타지로 떠날 수 있으리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은인의 집을 뒤졌다. 옳지 않은 일이라는 건 알지만 어쩔 수 없었다. 도덕성이 내 목숨을 살려 줄 수는 없었다. 살아남아야 하는 입장에서 그런 건 아무 소용도 없다는 걸 알아 버린 지 너무 오래되었다.
간신히 동전 몇 푼을 찾아낸 나는 현관문을 밀고 바깥으로 나갔다. 아직 셰일라가 돌아오려면 한참 지나야 했다. 내가 손에 넣은 화폐가 정확히 얼마만큼의 가치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제일 가까운 도시로 떠나기에는 충분하리라 믿었다.
언제 비가 내렸었냐는 듯, 날이 화창하게 개어 있었다. 사람들의 기분도 훨씬 좋아 보였다. 나는 처음부터 이 마을의 일부였던 것마냥 아무렇지도 않게 사람들 사이를 활보했다.
길을 걷던 나는 건물 벽에 기대어 잡담을 나누는 혁명군 두어 명을 발견했다. 모르는 얼굴이었지만 금세 심장이 뛰고 손가락이 곱아들었다. 나는 작게 심호흡을 하고 그들을 지나쳤다. 다행히 그들은 내게 전혀 관심이 없는 것 같았다.
나는 그 사실 때문에 안심했다. 적어도 자일스가 나를 찾기 위해 부하들을 풀지는 않았다는 거니까.
생각해 보니 내 망상이 바보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 것 하나 부족함 없는 혁명군 장교가 거지꼴을 한 몰락 귀족의 딸 하나 때문에 전전긍긍하고 있을 거란 망상 말이다.
그래! 그건 그냥 망상에 불과할 거다. 그는 떠오르는 새 시대의 영웅이었고, 심지어 미남이었다. 그가 내게 아주 조금의 미련이라도 갖고 있다 한들 주변 여자들이 그를 가만 놔두지 않을 게 분명했다.
나는 그가 추적할 만한 가치가 하나도 없는 볼품없는 여자였다. 적어도 그의 눈엔 그렇게 비쳤을 것이다.
그가 내게 잘해 준 건 단순한 동정심 때문이었다. 거지에게 적선하는 마음으로 관심과 음식을 베풀어 주었겠지. 적선하던 거지 하나가 사라졌다고 그 거지를 찾아 나설 사람은 없었다. 찾아 봤자 얻어낼 것 하나 없는 존재니까.
나는 조금 홀가분해진 어깨를 편히 내려놓고 걸었다.
모든 건 괜찮을 거야.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나는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생각보다 가까운 곳에 아는 얼굴이 있었다. 짙은 색의 군복을 잘 갖춰 입고 곧은 자세로 선 남자. 자일스 헤센이었다. 그가 이 마을에 있었다!
나는 정신을 차리고 그의 시야에 들지 않을 만한 곳으로 몸을 숨겼다. 여기서 뭘 하는 거지? 그냥 볼일이 있어서 들렀을 뿐일 거야. 난 그렇게 믿었다. 자일스는 가만히 서서 주변을 눈으로 탐색하더니 지나가던 사람을 불러 세웠다.
나는 그가 하는 양을 지켜보았다. 자일스가 품에서 뭔가를 꺼내 들었다. 종이 같은데…… 행인의 몸에 가려서 잘 보이지 않았다. 자일스가 종이를 들고 뭔가를 묻기 시작했다.
나는 귀를 기울였다.
“이렇게 생긴 여성을 본 적이 있습니까?”
그가 한 여자의 생김새를 묘사하기 시작했다. 검은 머리에, 눈은 파랗고…… 키는 이만하며 흰 옷을 입은 마르고 창백한 여자.
그가 나를 찾고 있었다. 망상이 아니었다. 이건 명백한 현실이었다.
어떻게 해야 하지? 그가 나를 왜 찾고 있을까. 아마 내가 도망쳐서 그런 거겠지. 호의를 베풀어 주었는데, 은혜도 모르고 도망친 괘씸한 여자라고 생각하고 있을까?
그는 내 치명적인 약점을 알고 있었다. 내가 벨담 귀족의 딸이라는 사실 말이다. 그 사실을 아는 건 저 남자뿐이었다.
자일스에게 잡혀선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분명 나에게 복수하고 싶어 할 거야. 그의 커다랗고 마디가 굵은 손과 허리춤에 매달려 있던 권총이 생각났다. 나는 요한 마이어와 비스마르 백작의 손아귀에서는 살아남았지만 저 남자에게선 그렇지 못할 거란 확신이 들었다.
익숙한 감정이 나를 지배했다. 공포였다. 나는 본능적인 공포에 휩싸였다. 뭘 논리적으로 생각해서가 아니라 말초적인 본능이 내게 도망치라고 종용하고 있었다.
나는 이곳을 빨리 벗어나야만 했다.
혁명군이 나를 찾고 있었다.
*
릴리가 사라졌다.
텅 비어 버린 방을 마주했을 때, 아주 잠시 동안 그의 머릿속도 공허하게 비어 버렸다. 이런 일이 벌어질 거라고 생각조차 하지 못했기에 더욱 그랬다.
아무리 그녀의 이름을 외쳐 불러도 대답하는 목소리는 없었다. 릴리는 이 저택을 완전히 벗어난 게 분명했다.
자일스 헤센은 피아노 의자에 앉아 쿵쿵 울리는 가슴을 진정시켰다. 릴리의 실종만큼이나 당황스러운 건 그가 릴리가 없어졌다는 사실 때문에 견디기 힘들 정도로 동요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이제 그에게 남은 건 릴리뿐이었으니까. 자일스의 곁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고, 재투성이 폐허 속에 남은 유일한 존재가 바로 릴리였다.
단순히 그러고 싶지 않다는 이유로 살렸던 여자는 의도치 않게 그의 전부가 되었고, 그는 전혀 생각지 못한 존재 없이는 버틸 수 없을 지경이 되었다.
릴리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닐까? 설마, 릴리의 소재가 혁명군의 귀에 들어갔나? 그가 참지 못하고 저택을 들락거려서 그녀의 목숨이 위험해지게 된 걸까?
만약 혁명군이 릴리에 대해 알게 된다면 그녀가 살아남을 가능성은 전무했다. 그녀는 엘로이즈 비스마르, 벨담의 귀족 여식이었다.
자일스의 유일한 안식이 되어준 릴리가 그의 욕심 때문에 죽게 된다면…… 그땐 정말 버틸 수 없을 것만 같았다. 자일스는 지금 이 순간마저도 언제 끊어질지 모르는 동아줄 하나에 매달려 살고 있는 실정이었다.
릴리가 죽는 일만은 절대 용납할 수 없었다.
절대로, 그런 일이 일어나도록 두지 않을 것이다.
자일스는 릴리가 저택에 없음을 확인하고 난 후 본부로 돌아갔다. 체포 명부를 뒤져 보고, 빠진 사람이 없나 확인한다는 명목으로 감옥을 순찰했다. 하지만 이곳에서는 릴리의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적어도 혁명군은 아직 릴리에 대해 몰랐다.
그렇다면 릴리는 왜 저택에서 사라졌을까.
그가 모르는 다른 위협 요인이 있었던 게 분명했다. 그러지 않고서야 릴리가 아직 성치도 않은 몸으로 무작정 저택을 떠났을 리가 없었다. 그에게 아무런 언질도 남겨 두지 않은 채 말이다.
그의 머릿속에는 릴리를 찾아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분명 내게 말할 여유도 없이 떠나야 했을 만한 이유가 있었을 거야. 혼자서 저택을 떠났다면, 분명 이 근방 지역에 있을 것이다. 어딘가에 숨어서 그를 기다리고 있을 거다. 그가 도우러 오기만을 기다리면서…….
이제 자일스는 그의 역할을 해야만 했다.
릴리를 찾아야 해. 그녀가 나를 필요로 하고 있어.
그녀를 찾아야…….
“도주한 벨담 귀족의 동선을 파악했습니다. 린즈데일로 간 게 분명합니다.”
책상 앞에 앉아 보고서를 쓰던 자일스의 손이 멈추었다. 잠시 동안, 그는 몸이 굳어 버린 것처럼 아무런 반응도 할 수가 없었다.
린즈데일이라면 솔즈부르에서 가장 가까운 마을이다. 자일스 또한 린즈데일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릴리가 머물고 있을 확률이 제일 높은 곳일 거라고 말이다.
“……어떤 도주자를 말하는 거지?”
그의 부관의 얼굴 근육이 미묘하게 뒤틀렸다.
“기억 안 나십니까? 얼마 전에 보고서를 올렸는데 말입니다. 감옥으로 호송 중이던 차량이 사고를 당했고, 그 틈에 탈출한 그 여자 말입니다. 마르티나 솔제의 동선을 추적했다고 말씀드리는 겁니다.”
“아, 그랬지.”
자일스는 안도한 것처럼 보이지 않으려고 기를 썼다. 그의 온 신경은 사라진 릴리에게 사로잡혀 있었다. 불과 며칠 전에 보고받은 사항도 얼른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였다.
아무튼 릴리는 아직 혁명군의 레이더망 밖에 있었다.
“신뢰할 수 있는 정보인가?”
“확실합니다. 그 근방에 잠복 중인 저희 요원들이 마르티나 솔제로 추정되는 여자를 인근 숲에서 발견했습니다. 유감스럽게도 체포하는 데에는 실패했지만, 저희가 지금 출발하기만 한다면 이번엔 기필코 잡을 수 있을 겁니다.”
“린즈데일이라고 했나?”
자일스는 지도를 손가락으로 따라 그렸다. 이곳에서 차를 타고 한 시간 내외를 달리면 갈 수 있는 곳이었다.
그는 보고서를 정리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코트를 걸쳤다.
“출발하지.”
신속하게 움직여야 했다.
다른 의미로, 정말 신속해야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