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화>
3. 안나 키팅
나는 날이 어둑어둑해질 때까지 걸었다. 차로 다녔을 땐 금방이었던 것 같은데, 직접 걸어서 향하자니 몇 시간을 걸어도 부족했다.
내 걸음이 빠르지 못한 탓도 있었다. 아무리 음식을 먹어서 체력을 쌓았다지만, 나는 그래도 건강한 축에 들지 못했다. 이 정도를 쉬지 않고 걸어온 것만으로도 스스로가 대견할 지경이었다.
게다가 내게는 신발조차도 없었다. 맨발로 고르지 못한 땅 위를 걸으니 발바닥에 금방 상처가 났다. 그래도 나는 참아야 했다. 다시 저택으로 돌아갈 수는 없는 법이었으니까.
솔즈부르 사유지는 텅 비어 있었다. 나는 가장 가까운 마을이 멀리서나마 보일 때까지 아무도 마주치지 않았다. 다행이라면 다행인 일이었지만, 썩 좋은 일은 아니었다. 하다못해 짐수레라도 마주쳤으면 태워다 달라고 부탁할 수도 있었을 텐데.
마침내 내가 솔즈부르를 벗어나 마을 초입에 다다랐을 때, 해는 이미 하늘에서 모습을 감춘 후였다. 오로지 건물에서 흘러나오는 빛과 가스등 불빛만이 세상을 비추었다. 나는 성치 못한 발로 터덜터덜 앞으로 나아갔다.
겨우 여기까지 오기는 했는데 막상 도착하니 눈앞이 깜깜했다. 무엇부터 해야 하지? 나는 서민의 삶을 몰랐다. 그렇다고 평생을 귀족 아가씨 대접 받으며 산 건 아니지만, 홀몸으로 세상에 내던져진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오래 걷다 보니 배가 고팠고, 걸친 건 얇은 슈미즈 하나뿐이라 지독하게 추웠다. 나는 완전히 무방비해져 있었다. 음식은 포기한다 치더라도 잠깐 몸을 데울 곳이 필요했다.
자일스가 줬던 코트를 버리고 온 게 살짝 후회됐다. 누가 봐도 혁명군의 것이 분명한 코트를 입고 돌아다니면 자일스의 귀에 들어가게 될까 봐 내버려 두고 온 건데. 겨울은 하루하루 가까워지고 있었다. 이런 차림으로 바깥을 오래 돌아다니는 건 자살행위였다.
정처 없이 걷기만 하던 나는 문득 멈춰 섰다. 근처에 빵집이 있었다. 유리창 너머로 진열된 빵이 내 시선을 사로잡았다. 금화 한 닢이면 저걸 다 살 수 있을 텐데. 그런 생각을 하던 나는 고개를 돌리고 다시 걸었다. 금화는 무슨. 난 신발도 없는 여자였다.
상황이 더 나빠질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는데 내가 잘못 생각한 거였다. 내 머리 위로 뭔가 툭툭 떨어진다 싶더니 비가 오기 시작했던 것이다. 나는 건물 벽에 붙어서 비를 피하려 했지만 허사였다. 내 옷이 빗물에 젖어 들어 가기 시작했다.
이대로라면 정말 얼어 죽을 수도 있었다.
“야! 너 거기서 뭐 해?”
주택 안으로 들어서던 내 또래의 여자가 나를 불렀다. 그녀는 한 팔로 빵 봉투를 들고 나머지 한 손으로는 우산을 쓰고 있었다. 나는 입이 얼어붙어 단 한 마디도 할 수 없었다.
“진짜 죽고 싶어서 그러는 건 아니지? 비도 오는데 거기 그러고 있으면 시체 되기 딱 좋아. 얼른 들어와. 내일 아침 집 밖을 나서자마자 여자 시체를 마주치기는 싫으니까.”
나는 덜덜 떨면서 집 안으로 들어갔다. 상당히 커다란 이층 주택이었다. 고급스러운 벽지나 가구를 보아 하니 부유한 집이 틀림없었다. 나는 간신히 입술을 열어 말했다.
“고……마워.”
주근깨가 특징인 여자는 물을 뚝뚝 흘리며 우두커니 서 있는 나를 잠시 훑어보더니 우산과 빵 봉투를 근처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나를 욕실로 끌고 갔다.
“묻고 싶은 게 많기는 한데 일단 씻어. 요새 병원이니 진료소니 아픈 사람들로 꽉 들어차서 감기라도 독하게 걸리면 답 없어. 씻는 건 도와주지 않아도 되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여자는 내가 알아서 하게끔 나를 내버려 두었다. 혼자 남겨진 나는 욕조를 내려다보았다. 세상에. 욕조에서 하는 목욕이라니. 마다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나는 젖은 슈미즈를 당장 벗어 던지고 따뜻한 물이 차오르는 욕조 안으로 들어갔다.
목욕을 하면서 몸을 데우니 한결 나았다. 젖은 슈미즈를 다시 입을 수는 없는 일이라 여자가 두고 간 두꺼운 블라우스와 스커트를 입었다. 살짝 헐렁하기는 했지만 입을 만은 했다.
욕실 밖으로 나가니 여자가 저녁 식탁을 차려 놓고 있었다. 내가 눈길을 빼앗겼던 바로 그 빵이었다.
여자는 뭘 하고 있냐는 듯이 고갯짓을 했다.
“뭐 해? 어서 와서 앉아.”
여자가 시키는 대로 식탁 앞에 앉기는 했지만, 그녀의 호의를 의심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결국 나는 그녀에게 직접 물었다.
“나를 도와주는 이유가 뭐야?”
“그럼 네가 거기서 죽게 놔뒀어야 했나?”
여자는 내 질문에 짜증이 난 것 같았다. 나는 입을 다물었지만 머릿속으로 떠오르는 생각까지 멈출 수는 없었다. 내가 죽어도 저 여자랑은 아무 상관도 없는 것 아닌가?
그때, 여자가 말을 이었다.
“게다가 입스윈 사람끼리는 도와줘야 하는 거니까. 우리끼리 쌀쌀맞게 굴 게 뭐가 있어? 벨담 놈들 다 쫓아낸 이상 이제 여기 있는 모든 것들이 우리 거야. 적어도 너같이 얇은 옷 한 장 걸치고 바깥을 떠도는 애들이 있어선 안 된다는 거지.”
아, 이제야 모든 의문이 풀렸다. 저 여자는 내가 입스윈 사람인 줄 알았던 거다. 나는 이제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알았다.
“내 이름은 셰일라 칼튼이야. 그냥 셰일라라고 불러. 너는 이름이 뭐야?”
이곳까지 걸어오는 동안 나는 내가 쓸 이름을 정해 뒀다. 나는 내 새 이름을 자신 있게 내뱉었다.
“안나. 내 이름은 안나 키팅이야.”
“무슨 일을 당했기에 그런 얇은 옷차림으로 바깥을 헤매고 있었던 거야? 미친놈한테 걸리면 어쩔 뻔했어? 너한테도 피치 못할 사정이 있었겠지만…….”
셰일라는 자세히 물으려 하지 않았다. 나 같은 떠돌이들을 목격한 게 한두 번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나는 셰일라의 믿음을 지키기 위해 불쌍한 입스윈 떠돌이인 양 풀 죽은 얼굴을 하고, 본래의 하층민 말씨를 다시 사용했다.
우리는 묽은 수프에 빵을 적셔 먹었다. 셰일라는 저녁을 먹는 내내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 주었다.
“본래 이 집은 벨담 가족이 살던 집이었어. 너도 보면 알겠지만 돈 좀 가진 집안이었나 봐. 하지만 혁명군이 우리에게 자유를 되찾아 준 후에도 떵떵거리며 살 수는 없는 법이지. 난 최근에 이 집을 배정받았어. 원래 다른 가족이 같이 입주하기로 했었는데 하루 이틀 정도 늦는 것 같아.”
“그럼 그 가족이랑 함께 살게 되는 거야?”
“당연하지! 이 큰 집을 나 혼자 차지할 수는 없잖아? 다른 사람과 집을 공유하는 건 이전까지도 흔한 일이기도 했고. 뭐, 나야 불만 없어.”
나는 열심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집을 생판 모르는 남들과 공유한다는 건 내게 적잖은 충격으로 다가왔지만 애써 티를 내지 않으려 노력했다.
아무튼 셰일라와 함께 입주하기로 했었던 가족이 늦는 바람에 내가 잠시 머무를 수 있게 된 것 같았다.
놀랄 만한 행운이었다.
나는 조심스레 물었다.
“그럼 그 가족은 언제 들어오는 거야?”
“정확하지는 않지만 모레 즈음에 올 거야. 왜? 혹시 갈 곳이 없어서 그래?”
셰일라는 내가 무어라 대답하기도 전에 먼저 선수를 쳤다.
“가서 네 이름이랑 신분증 대고 서류 몇 장 작성하면 그 사람들이 너한테 곧 집을 배정해 줄 거야. 내일 아침에 한번 가 봐. 그 전까지는, 뭐, 대충 여기서 지내도 상관없지 않을까? 그 가족도 별로 신경 안 쓸걸? 네 가족이 이보다 작은 집에서 지내던 때도 있었는데 여자 하나 끼여 사는 것쯤이야.”
“어디로 가면 되는데?”
“근처에 혁명군이 운영하는 임시 사무소가 있어. 원한다면 내일 같이 가 줄게.”
혁명군이라는 말에 등줄기가 오싹해졌다. 이곳은 솔즈부르 바로 옆 동네였다. 내가 없어진 걸 자일스가 눈치챘다면, 가장 먼저 이곳을 뒤져 볼 게 분명했다.
나는 당황한 티를 내지 않으려 노력해야만 했다.
“천천히 하지 뭐.”
“명단이 얼마나 밀려 있는지 알면 그런 소리 안 나올걸? 나도 이 집에 들어오기까지 무려 세 달이나 걸렸어. 나 정도면 그래도 운이 좋았던 거야. 어떤 사람은 절차가 꼬여서 반년이 지나도 입주를 못 하고 있대.”
“사, 사실은 곧 가족이 나를 찾으러 올 거라서 그래. 가족들이 이미 거주지 신청을 마쳤을 거야.”
“그래? 그렇다면 굳이 두 번 신청할 필요는 없겠네. 가족이랑 만날 때까지 여기서 지내. 아무리 자유로운 시대가 되었다지만 여전히 바깥은 여자에겐 위험한 곳이야.”
셰일라는 지금껏 수십 년을 살아오면서 미친놈들을 얼마나 다채롭게 만나 보았는지에 대해 장장 십여 분간을 설토했다. 하지만 내겐 맞장구치며 돌려줄 이야기가 없었다.
물론 나라고 미친 남자를 만나 보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셰일라 앞에서 마이어 공작 이야기를 꺼낼 수는 없는 법이었으니까.
“아무튼, 곤경에 처하면 다른 사람들한테 도와 달라고 해. 웬만하면 다들 도와줄 거야. 우린 벨담 놈들의 횡포에도 굴하지 않고 맞서 싸워서 결국 승리했잖아. 전부 다 피를 나눈 동지들이라고. 그러니까 앞으로는 비 맞으면서 바깥에 서 있지 마.”
“고마워, 도와줘서.”
“고맙긴, 뭘. 당연히 해야 할 일이었잖아. 아까도 말했지만, 네가 얼어 죽게 놔둘 수는 없는 법이니까.”
우리는 빵과 수프를 금방 해치웠다. 내가 말을 별로 하지 않은 탓인지는 몰라도 식사 시간은 별로 길어지지 않았다.
셰일라는 함께 입주할 가족이 오기 전까지 지낼 방으로 나를 안내했다.
“그 사람들 올 때까지는 여기서 자. 뭐, 보아하니 너도 여기 오래 머무르지는 않을 것 같고 말이야. 야, 내가 한 번 앉아 봤는데 침대가 엄청 푹신푹신해. 너도 마음에 들 거야.”
그녀가 떠나고 나는 침대 시트 위에 앉아 보았다. 셰일라가 강조한 만큼 부드럽지는 않았다. 물론 그조차도 없는 형편이었던 내게는 감지덕지할 일이지만, 나는 귀족들이 사용하는 최고급 침대 시트가 얼마나 부드럽고 푹신한지 알아 버린 사람이었다.
나는 이불을 덮고 누워 맞은편 창문을 바라보았다.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덜덜 떨면서 맨발로 헤매고 다니던 내가 지금은 아늑한 침대 위에 누워 있었다. 누군가 나를 상대로 달콤한 환상을 보여 주는 건 아닐까 싶었다.
이 모든 게 내가 불쌍한 입스윈 떠돌이처럼 보여서 가능한 일들이겠지. 동정심은 여러 번 내 목숨을 구했다. 저택에 있을 때도 그랬지만, 저택 바깥에서도 여전히 유효했다. 하지만 언제까지 얄팍한 동정심 하나로 버틸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다.
자일스가 나를 쫓아오고 있을까? 아니면 그냥 포기하고 돌아갔을까? 만약 그가 나 하나를 포기하지 못하고 이 근방을 수색하고 있다면 그건 그것대로 웃긴 일일 거다. 웬 깡마르고 초라한 여자가 저를 두고 도망갔다고 해서 큰일이 생기는 것도 아닌데.
설령 자일스가 나를 포기했다고 해도 여전히 내게는 살아갈 길이 막막했다. 뭘 해야 하지?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오랜만에 푹신한 침대 안에 웅크리고 있으니 눈꺼풀이 감겨 왔다. 생각을 해야 하는데…… 머릿속이 지우개로 지운 것처럼 텅 비었다. 나는 눈을 감았다.
푹 자 두는 것 또한 내일을 위한 좋은 전략 중 하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