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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을 사랑한 건 살아남기 위해서였다-15화 (15/93)
  • <15화>

    나는 군화 소리를 바로 알아듣고 그를 마중 나갔다. 내가 지을 수 있는 미소 중 가장 밝은 미소를 띤 채로.

    “자일스!”

    그런데 그날은 유독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그가 내 가짜 이름을 불렀다.

    “릴리.”

    자일스는 유난히 초췌해 보였다. 화가 난 것 같기도 하고, 무언가에 염증이 난 것 같기도 했다. 그가 나를 노려보았다. 나는 그의 형형한 눈빛에 얼어붙었다. 드디어 때가 왔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무슨 일이 생긴 게 분명했다. 그게 나와 관련된 일일지도 몰랐다. 그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기에 내가 위험해진 건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나는 자일스를 시험해 보기 위해 무작정 그를 껴안았다. 가만히 내버려 두든지, 혹은 쳐 내든지 둘 중 하나겠지. 자일스는 나를 뿌리치지 않았다. 그렇다고 다른 말을 하거나 나를 마주 안아 주지도 않았다.

    나는 어떻게든 그의 기분을 맞추기 위해 필사적이었다.

    “미안해요, 그냥 또 와 준 게 고마워서 그런 건데.”

    거짓말이었다. 군화 소리가 들릴 때마다 가슴이 내려앉지 않을 때가 없었다. 그가 음식을 주는 건 좋았지만…… 절대 그라는 사람을 반긴 적은 없었다.

    그가 쇳소리처럼 거친 목소리로 물었다.

    “……될까?”

    “네?”

    “내가 안아 봐도 될까?”

    그는 내게 허락을 구하고 있었다. 나는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서 싫다고 말할 수는 없지 않나. 그가 내게로 손을 뻗었다. 하지만 결국 나를 안지는 못했다.

    “……다음에는 옷이라도 한 벌 가져다줄게.”

    “이미 한 벌 줬잖아요.”

    “그거 말고. 제대로 된 옷.”

    “난 이게 따뜻해서 좋아요.”

    나는 그가 주고 간 코트를 여몄다. 코트도 마음에 들었지만, 그가 옷을 핑계로 또 올까 봐 겁이 났다.

    자일스는 그날따라 기분이 좋지 않았다. 나는 그의 기분을 풀어 줘야 했다. 하지만 뭘 해야 할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얼굴 위에 그림자를 드리우고 침묵하는 그가 너무도 불편했던 나는 한 가지 제안을 했다.

    “자일스, 피아노 칠 줄 알아요?”

    “아주 오래전에는.”

    “그럼 연주해 본 적은 있다는 거네요? 그럴 줄 알았어요. 음악에 조예가 있는 사람은 눈빛에서부터 다 보이거든요. 저, 부탁이 있는데…… 오늘은 당신이 내게 피아노를 쳐 주지 않을래요?”

    그는 내가 피아노를 쳐 달라고 말할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는지 당황한 눈치였다. 하지만 더 놀란 건 내 쪽이었다. 자일스는 내 부탁을 거절하지 않고 피아노 앞에 앉았다.

    그가 아주 간단한 연습곡 하나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피아노에서 손을 뗀 지 오래되었는지 그가 건반을 더듬거렸다.

    괜한 짓을 시켰다고 역정을 내기라도 할까 봐, 나는 그의 옆에 앉았다. 그리고 두 옥타브 위에서 주선율을 연주해 그를 도왔다.

    우리는 함께 연주했다. 내 도움을 받은 그의 연주가 아주 살짝 나아졌다. 자일스는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반사적으로 웃어 보였다. 그에게 잘 보이려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자일스의 연주가 미세하게 느려졌다. 홀린 듯이 바라보던 그가 내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내 입술에 그의 것이 닿았다.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했다. 자일스가 내게 입을 맞추었다.

    나는 비슷한 상황을 한 번 겪어 본 적이 있었다. 과거에 있었던 일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언젠가는 이렇게 될 줄 알았다.

    ……결국 이렇게 되는 거였어.

    그는 내가 호응해 주지 않자 머쓱했는지 내게서 곧장 떨어졌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이건 마치 중력에 저항하기란 불가능한 것과도 같았다. 내게는 다른 선택이 없었다.

    나는 그를 안고 먼저 입을 맞추었다. 그가 원하는 게 이런 거라면 내주는 수밖에. 그럼으로써 살 수만 있다면. 나는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이제 와서 그의 총에 맞아 죽고 싶지는 않았다. 감옥으로 끌려가고 싶지도 않았다. 내 인생에 감옥은 벽장과 마루 밑으로도 충분했다.

    나는 알았다. 자일스 헤센은 그냥 숫기 없는 요한 마이어였다. 애초에 이런 목적을 가지고 내게 접근한 게 틀림없었다.

    세상에 이유 없는 호의란 없는 법이다.

    과거에 나는 요한 마이어를 바닥으로 밀치고 깨진 거울 조각을 그에게 들이댔었다. 하지만 이번엔 상황이 달랐다. 남들을 위해 나를 바치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지만, 나의 생존을 위해서라면 이야기가 다르지 않겠는가.

    가문이 내 몸보다 중요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내 목숨은 내 몸보다 우선이었다.

    자일스는 내 허리를 감싸 안고 정신없이 입을 맞추었다. 그의 호흡이 점점 거칠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난 마음의 준비를 했다. 어쩌면 그가 내 치마를 들추고 제 것을 꺼내 들어 보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아니, 그럴 확률이 매우 높았다.

    하지만 내게 매달리듯 키스하던 자일스는 내 치맛자락을 걷어 올리지도, 바지 지퍼를 내리지도 않았다. 그는 어느 순간 입맞춤을 거두고 내 어깨에 얼굴을 파묻은 채 나를 안고 있기만 했다.

    그리고 알 수 없는 말들을 속삭였다.

    “넌 내 옆에 있어. 그냥 옆에 있기만 해. 그거면 돼.”

    라디오 단막극에 등장하는 여주인공이었다면 그의 고백에 몹시 감동해 온갖 찬양하는 언사들을 쏟아 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는 사이, 나는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다음번엔 키스만으로 끝나지 않을 거야.

    오늘은 무사히 넘어갔지만, 당장 내일이라도 그가 다시 찾아오게 된다면…… 그땐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몰랐다. 물론 나는 무엇이든 할 준비가 되어 있었지만…….

    나는 그날 밤을 떨면서 지새웠다. 아무리 목숨을 구하기 위한 일이라지만 무서운 건 어쩔 수 없었다. 나는 남자와 관계를 한 적이 없었고, 무엇보다도 커다란 남자가 내 몸을 물건처럼 다룰 거란 데에서 우러나는 두려움은 내 정신을 마비시켰다.

    나는 그가 반드시 돌아올 거라고 생각했기에 뜬 눈으로 밤을 새웠다. 잠이 올 리가 없었다. 잠을 자기도 싫었다. 자면 내일이 시작되고, 그럼 자일스를 만나야 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내 몸을 남에게 내어 주기는 싫었다.

    그러나 자일스는 곧바로 나를 탐하지 않았다.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길이 없어서 눈을 마주치는 일조차도 쉽지 않았다. 하루하루가 칼날 위를 걷는 것만 같았다.

    오늘은 무사히 넘어갔지만, 내일도 그러리란 법은 없었다. 그가 내 곁에 앉아 나를 쳐다볼 때면, 나는 그가 내 허벅지를 더듬기 시작할까봐 겁이 났다.

    긴장 속 외줄타기를 하며 매일 밤을 두려움에 떨었다. 그가 아무 짓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더욱 두려웠다. 불안해서였다.

    왜 그는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는 거지? 저 남자의 머릿속엔 대체 무슨 생각이 들어 있단 말인가? 아무 짓도 하지 않을 거라면, 왜 나를 꾸준하게 찾아오는 거지?

    금방 돌아가곤 했던 자일스는 점점 저택에 오래 머무르기 시작했다. 그래도 난 불평할 수 없었다. 착한 아이처럼 굴어야 했다. 그래야 내가 살 수 있었다. 그래서 나는 웃는 얼굴로 그를 맞이했다. 항상.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자일스의 발걸음이 뚝 끊겼다. 나는 그가 갑자기 왕래를 그만둔 데에 대해 혼란스러워했다. 한편으로는 두렵기도 했다. 군대를 이끌고 나를 잡으러 올 준비를 하는 걸까?

    나는 무얼 해야 할지 몰라 어쩔 줄 모르고 가만히 있었다. 하지만 자일스는 여전히 감감무소식이었다. 그다음 날도, 그다음 날에도. 일주일이 지나도 그는 찾아오지 않았다.

    분명했다. 이것은 나를 위한 기회였다. 가만히 앉아서 시간이 가기를 기다릴 수만은 없었다. 나는 자일스의 발길이 끊긴 틈을 타 저택에서 도망치기로 결심했다.

    그가 하루걸러 찾아올 적에는 곧 잡힐 거란 두려움 때문에 감히 그럴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이라면 다를지 몰랐다.

    예전과는 달리 내 몸에는 살도 많이 붙었고, 충분히 걸을 힘도 생겼다.

    나는 내가 아는 길을 향해 무작정 걸었다. 예전에 승용차를 타고 이 길을 지나 본 적이 있었다. 차를 타고 10분 정도를 달리면 작은 마을이 나온다. 그곳에는 사람들도 있고, 기차역도 있었다.

    물론 가진 거라곤 내 몸뚱어리밖에 없는 신세였지만, 나는 앞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었다. 나를 지킬 수 있는 건 오로지 나뿐이었다. 그러니까 나는 용기를 내야만 했다.

    저택에서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내 걸음은 더욱 더 빨라졌다. 스스로 저택을 벗어난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드디어 내 운명은 내 손안에 있었다.

    그 사실이 못내 기분 좋아서, 조금 웃었던 것 같기도 했다.

    자일스가 나를 찾아내기 전에 솔즈부르를 떠야 했다.

    나는 걷는 동안에도 계속해서 뒤를 돌아보았다. 검은 승용차가 나타나지는 않을까 싶어서였다.

    하지만 그는 끝내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내가 없어졌다는 사실을 그가 알면 어떻게 행동할까? 조금 분하기는 하겠지. 하지만 그는 나를 금방 잊을 것이다. 나는 피아노를 좀 치는 볼품없는 여자에 불과했다. 자일스 같은 장교라면 주변에 널린 게 여자일 텐데, 굳이 나 같은 것에 그가 아쉬워할 리가 없었다.

    나는 그렇게라도 믿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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