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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을 사랑한 건 살아남기 위해서였다-14화 (14/93)

<14화>

군인은 내 말을 가만히 들어 주었다. 그의 눈빛을 읽기가 어려웠다. 내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모른 척하는 건지, 아니면 정말로 내 말을 믿는 건지 알 수가 없으니 정말이지 기절할 것만 같았다.

그때, 그가 소름 끼치는 제안을 했다.

“널 음식이 있는 곳까지 데려다주겠다.”

소스라친 나는 생각할 겨를도 없이 소리를 쳤다.

“안 돼요!”

군인이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화가 난 건가? 겁에 질린 나는 감정을 제대로 숨기지 못했고, 상황을 최악으로 만들고 있었다.

“바깥으로 나가는 건 안 돼요. 부탁이에요.”

“여긴 아무것도 없어. 모든 건 혁명을 위해 압수됐다. 네가 더 이상 여기에 있을 이유는 없어.”

“내가 당신들이 누군지 알고 따라가요? 날 다른 곳에 팔아넘길지도 모르는데.”

“신분증을 원하면 보여 줄 수 있어.”

“그래도 바깥에 나가고 싶지는 않아요.”

평정을 잃는 건 생각보다 치명적인 문제였다. 나는 제대로 생각할 수 없었다. 생각을 거치기도 전에 변명처럼 온갖 말들이 쏟아져 나왔다. 침착하게 그를 속여야 하는데, 다 망했다. 그가 나를 의심하는 것이 느껴졌다.

그는 내 머릿속의 진실을 꿰뚫어 보려는 듯 나를 똑바로 바라보며 무언가 생각하더니, 목소리를 낮추었다.

“한 가지 묻겠다. 네가 엘로이즈 비스마르인가?”

내가 가장 듣고 싶지 않았던 이름이 그의 입술을 빌려 흘러나오는 순간. 나는 내 인생이 끝장났다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알았다.

이제 와서 ‘아니요, 그런 사람 모르는데요.’라고 대답해 봤자 아무 소용도 없었다. 그는 정말 내가 엘로이즈인지 궁금해서 묻고 있는 게 아니었다.

“……처음부터 다 알고 있었죠?”

그는 철옹성처럼 내 앞에 버티고 있었다. 빠져나갈 구멍 따위는 보이지도 않았다. 나는 오랜 피로감이 몰려오는 것을 느끼며 결국 체념했다.

그의 허리춤에 매달린 권총에 눈길이 갔다. 그래, 차라리 나를 죽일 거라면 그 총으로 깔끔하게 죽여 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젠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그가 비스마르 백작과는 다른 종류의 사람이기를 바라는 수밖에.

원하는 진실을 얻어 낸 군인은 쓸데없는 질문들을 했다. 피아노를 칠 줄 안다던데. 옆방에 있던 피아노도 네가 연주하곤 했던 건가? 가족들이 너를 굶겨 죽이려고 했다는 게 사실인가?

나는 그에게 화가 나기 시작했다. 어차피 죽일 거면서 왜 이렇게 말이 많지? 나를 갖고 노는 건가? 이렇게 된 이상 그에게 잘 보일 필요도 없겠다 싶었던 내가 쏘아붙였다.

“말해서 뭐 해요. 어차피 난 죽을 거잖아요.”

군인은 그 번듯한 얼굴로 나를 가만히 쳐다보기만 했다. 나는 덫에 걸린 생쥐가 되어 그에게 관찰당하는 것만 같아서 속이 상했다. 무엇보다 억울했다. 내가 얼마나 끈질기게 살아남았는데, 이렇게 죽게 되다니. 억울해 미칠 지경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군인이 부하들을 불렀다. 나는 곧 그들에게 끌려 나갈 마음의 준비를 했다.

그러나 놀랍게도 그는 내 정체에 대해 거짓말을 했다.

“그냥 떠돌이 여자다. 이 집에 숨어들었던 걸 찾아냈어.”

혼란스러웠다. 뭐지? 이 사람, 혁명군 아닌가? 왜 동료들에게 거짓말을 하지? 난 엘로이즈 비스마르가 맞는데. 그의 꿍꿍이를 알 수가 없었던 나는 입을 가만히 다물고 있었다.

심지어 군인은 내게 음식을 건넸다. 나는 빵에서 그렇게 향긋한 냄새가 날 수 있다는 걸 그날 처음 알았다.

어쨌든 내게는 기회가 생겼다. 하나는 배를 채울 기회였고, 다른 하나는 빵을 먹는 동안 생각할 기회였다. 나는 귀리 빵을 씹으며 잽싸게 머리를 굴렸다.

군인은 내 정체에 대해 거짓말을 했다. 그건 나를 살려 주기로 결정한 거나 마찬가지였다. 왜 나를 살려 주고 싶어 하지? 어쩌면 내가 동정심을 산 건지도 몰랐다. 내 꼴이 귀족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초라하고 불쌍해 보이기는 했으니까.

동정심이든 뭐든 간에, 나는 그의 마음을 돌리는 데에 성공했다. 이 기회를 놓칠 수는 없었다. 살기 위해서라면 그의 마음에 들어야만 했다. 내가 살릴 가치가 있는 사람이라는 걸 보여 줘야만 했다.

난 이런 상황에 매우 익숙했다.

“최근에 피아노를 연주한 적이 있었나?”

그가 물었다. 아, 그래. 피아노. 내겐 피아노가 있었다. 나는 내가 피아노 연주에 재능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건 내 방패이자 무기가 되어 줄 것이다.

그가 나를 살린 결정을 후회하지 않게 만들어야 해.

비록 그는 피아노를 연주해 달라고 하지 않았지만, 내가 먼저 몸을 일으켰다. 이대로 쓰러져 정신을 잃을 것만 같던 몸이 다시 활력을 되찾았다.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나는 살아야 했다.

군인이 내 뒤를 따라오는 것이 느껴졌다. 온몸의 털이 바짝 곤두서서 그가 하는 행동 하나하나에 반응하고 있었다. 침착해, 엘로이즈. 너는 피아노를 곧잘 연주하곤 했잖아. 하던 대로 하면 되는 거야. 그가 네 연주에 깜빡 속아 넘어가게 만들면 돼.

막상 피아노 앞에 앉으니까 내가 피아노를 치지 않은 지 꽤 오랜 시간이 흘렀다는 사실이 문득 생각났다. 나는 나를 믿기로 했다. 그리고 피아노 건반 위에 두 손을 올렸다.

연주할 때만큼은 오직 음악에 집중하려 애썼다. 나는 내 연주에 귀를 기울이며 최대한 군인의 존재를 잊어버리려 했다. 내 머릿속에서 공연장이 펼쳐졌다. 청중들이 어둠 속에서 내 연주를 듣고 있었다.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내 연주는 서서히 제 호흡을 되찾아 갔다.

군인은 내가 연주를 끝낼 때까지 잠자코 기다렸다. 아무 소리도 내지 않고, 그저 고요 속에 침잠하여. 그래서 나는 더더욱 내 연주에 집중할 수 있었다.

절정에 올랐던 음악이 다시 낮게 사그라들고, 이윽고 내가 마지막 건반을 눌렀다. 그런 줄도 몰랐는데 나는 땀을 흘리고 있었다. 아직도 그가 내 연주를 듣고 있을까? 나는 고개를 돌렸다.

군인은 똑같은 자리에 서서 생각에 잠긴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적어도 나를 죽이고 싶어 하는 표정은 아닌 것 같아서 나는 일단 안심했다.

“그들이 피아노를 가르쳤나?”

그가 물었다. 나는 어쩐지 그의 목소리가 좀 이상하게 들린다고 생각했다.

“맞아요.”

“믿을 수가 없군.”

군인은 혼잣말을 했다. 그는 슈미즈가 겨우 가리고 있는 내 앙상한 몸과 흉터들을 바라보았다. 한숨을 내쉬고, 눈을 감은 채 침묵하던 그가 내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왔다.

군인이 나를 향해 손을 뻗었다. 나는 그가 내 팔을 잡아끌 줄 알고 몸을 움츠렸다. 그러나 그는 나를 끌고 가는 대신 손을 내밀었다. 나는 그의 의중을 파악하지 못한 와중에도 오른손을 내주었다. 귀족으로 살던 때에 생긴 습관이었다.

나는 그가 나를 비웃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부랑자 같은 꼴을 하고서는 레이디 대접을 받고 싶어 한다고 말이다. 하지만 군인은 그러지 않았다. 오히려 정말 나를 레이디처럼 대해 주었다.

군인이 허리를 숙이고 내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그러고는 아주 가까이에서 나와 눈을 마주쳤다.

나는 이제 그의 눈동자 속에서 호의를 발견할 수 있었다. 내 연주가 먹힌 것이다. 분명 기뻐할 만한 일인데, 내 몸은 의지와는 상관없이 떨고 있었다.

군인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대로 발걸음을 돌려 방을 빠져나갔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났다. 발소리가 점점 멀어지더니, 이내 들리지 않게 되었다.

나는 살아남았다.

분명 기쁜 일이었는데…….

울음이 터져 나왔다. 나는 피아노 앞에 앉아서 소리 내어 울었다. 그의 심기를 건드릴까 봐 억눌렀던 감정들이 뒤늦게 터져 나온 것이다. 나는 다급히 눈물을 닦았지만 한번 터져 나온 울음은 쉽게 그치지 않았다.

나는 너무 무서웠다. 그가 내 이름을 묻고, 나를 가만히 바라보고, 내 연주를 듣고 나서 내 손등에 입을 맞출 때까지…….

그와 함께했던 모든 순간들이 내게는 공포였다. 나는 체포당한 귀족의 딸이었고, 그는 군인이었다. 게다가 그는 총을 갖고 있었다.

살아남았다는 안도감이 나를 한순간에 무너뜨렸다. 나는 요한 마이어도 두렵지 않았고, 내 아버지도 두려워한 적이 없었다. 하지만 그는 달랐다.

왜냐면 그는 언제든지 나를 죽일 수 있었으니까.

지금 당장 죽일 수 있는데도, 그러지 않고 내게 자비를 베풀었으니까.

내 목숨이 그의 손가락 끝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괜찮아. 괜찮아, 엘로이즈. 그가 너를 마음에 들어 했잖아. 살았으면 된 거야. 다른 건 생각하지 마.

나는 스스로에게 그리 되뇌며 눈물을 훔쳤다.

그리고 다시는 그를 만날 일이 없기를 바랐다.

군인은 얼마 지나지 않아 또다시 나를 찾아왔다. 이번에야말로 그가 마음을 바꾼 줄 알았다. 그러나 내 예상과는 달리 그는 가방 안에서 샌드위치를 꺼내어 내게 내밀었다.

나는 샌드위치를 받아 들면서도 대체 이 남자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의문이었다. 뭔가 목적이 있는 건가? 난 군인에게 검은 속셈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세상에 이유 없는 호의는 없는 법이니까. 아버지가 그 사실을 내게 직접 가르쳤다. 망할 요한 마이어도 마찬가지고.

군인은 제가 건넨 음식을 먹는 나를 가만히 바라보기만 했다. 샌드위치 먹는 사람 처음 보는 것처럼 말이다. 검은 속셈이 있다기에는 그의 시선이 너무도 담백하고 건조했다. 그래도 나는 군인을 섣불리 믿지 않았다.

그가 나에게 잘해 주려 할수록 내 불신은 크기를 키워 갔다. 이유 모를 호의가 나를 더욱 두렵게 만들었다. 나중에 무슨 짓을 하려고 이렇게 밑밥을 깔아 놓는단 말인가?

어쨌든 나는 그가 주는 음식들을 꼬박꼬박 열심히 받아 먹었다. 그의 의중이 어떻든 간에 체력을 비축해야만 했다.

나는 바보 같은 애처럼 고맙다는 말만 연신 되풀이했다. 착하고 불쌍한 여자 연기를 하는 건 내 전문이었다. 일부러 그의 앞에서 멍청한 미소를 지어 보이고, 그가 하는 말에는 무조건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꿍꿍이가 무엇이든 그는 나에게 호감이 있었고, 보통 사람들은 내가 멍청한 연기를 하면 그걸 그대로 받아들여 주었다.

나는 그가 나를 계속 좋아하도록 만들어야 했다.

그는 여전히 내게 공포의 대상이었고, 나는 그가 선심 쓰듯 베푸는 호의에 매달려야만 하는 입장이었다.

혁명군 장교, 자일스 헤센의 방문은 그렇게 계속되었다.

나는 점점 이 남자의 머릿속에 든 음흉한 계획이라는 게 혹시 나를 살찌우려는 건 아닐까 생각했다. 그는 정말 내게 음식을 갖다주기만 했다. 그리고 내가 그것들을 먹는 모습을 쳐다보았다.

적선하는 취미라도 있는 건가? 불쌍한 애들에게 베풀어 주며 자아도취 하는 놈들이 있다는 건 알고 있었다. 자일스도 그런 부류인 건가? 아니면 내가 음식을 먹는 모습이 웃겨 보이나? 나는 배가 고팠고, 솔직히 허겁지겁 먹어 치운 건 사실이었다.

게다가 그는 내가 맛있게 먹지 않으면 큰일이 날 것마냥 나를 쳐다보았다. 그 덕에 체할 뻔한 적도 여럿 있다는 걸 그는 알까?

자일스의 방문은 이제 예측 가능한 일이 되었다. 제발 그 끔찍한 군복을 다시 볼 일이 없기를 바랐지만, 그는 꿋꿋하게 나를 찾아왔다. 나는 그때마다 그를 반가워하는 척했다.

그 날에도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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