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
아무튼 절대 내가 그들 근처에 있다는 사실을 들키면 안 된다는 사실만은 느낄 수 있었다. 나는 상황 파악을 하려 애썼다. 침입자들인가? 하지만 여긴 다른 곳도 아니고 비스마르 백작가인데?
지난 세월 동안 단 한 번도 이런 일이 벌어진 적은 없었다. 하지만 아무리 귀를 기울여 봐도 그들은 가문 사람들을 위협하고 약탈하는 게 분명해 보였다.
혹시…… 내 상상이 실제로 이루어진 건가? 드디어 적군들이 여기까지 쳐들어온 건가? 나는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내가 기쁜 건지 경악한 건지 분간하기가 어려웠다. 드디어 그 일이 일어났다.
탕, 탕, 총소리가 들리더니 뭔가 박살 나는 파열음이 귀를 때렸을 땐 모든 게 확실해졌다.
우리가 전쟁에서 졌구나.
적군들이 온 거야!
하지만 나는 곧 그들이 적군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다. 낯선 남자들은 내가 아는 언어로 고함을 질러 대고 있었다. 조용히 해! 반항하지 마! 입 닥치고 따라와! 여기 있는 것들 싹 끌어내!
사위가 너무 시끄러워서 나는 귀를 틀어막아 버렸다. 이런 혼란과 소음은 난생처음 겪어 보는 것이었다. 나는 그동안 고요에 너무 길들여져 버렸다.
머리를 쿵쿵 울리는 소음이 가시기까지는 반나절 정도가 걸렸다. 폭풍이 지나간 자리에는 정적만이 남았다. 마침내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게 되었을 때, 나는 내 머리 위의 판자를 슬쩍 밀어 보았다.
워낙 많은 사람들이 짓밟고 간 덕에 나사가 느슨해져 있었다. 나는 온 힘을 다해 판자를 밀어 내고 바깥으로 나왔다.
벌써 노을이 지고 있었다. 노을을 온전한 모습으로 마주하는 건 참 오랜만의 일이었다. 나는 조심스레 몸을 일으켜 저택 안을 한 바퀴 돌아보았다. 이렇게 자유로이 걷는 일 또한 오랜만이었다.
나는 마치 집을 보러 온 사람처럼 여러 방을 꼼꼼히 살펴보았다. 만찬장, 응접실, 사용인들이 지내는 방, 그리고 욕실까지……. 그 어디에도 남은 사람들이 없었다. 나는 곧 깨달았다. 이 넓은 저택 안에 남은 건 나뿐이었다!
그 순간 나는 신이 나서 주체를 할 수가 없었다. 나는 옛 동화에 나오는 마녀처럼 깔깔 웃으며 복도를 뛰어다녔다. 살면서 이렇게 기뻤던 적이 있었던가? 나는 환호하며 자유를 만끽했다. 이 저택은 내 거였다!
나를 죽이려던 사람들은 모두 사라졌다. 내가 이렇게 소리 내어 웃어도, 천박한 아이처럼 이곳저곳을 뛰어다녀도 아무도 나를 매질할 수 없었다.
나는 바닥에 등을 대고 누워 점점 저물어 가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주홍색으로 타오르는 노을이 마치 내 심경을 대변해 주는 듯했다.
나는 즐거운 생각들을 했다. 이제 나는 자유다. 뭘 해야 할까? 적군인지 누군지 모를 침입자들은 몇 시간 새에 저택의 기물들을 쓸어 가 버렸다. 아쉽게도 내가 할 수 있는 일들은 한정되어 있었다.
그 순간 번뜩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피아노! 그들이 피아노를 가져갔을까? 나는 피아노가 있는 연주실을 향해 뛰었다. 다행히 피아노만큼은 무사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나는 날이 더 어두워지기 전에 그랜드피아노 앞에 앉아 마음껏 연주를 시작했다. 내가 알고 있는 연주곡들 중에 가장 발랄하고 신나는 곡들만 골라서 말이다. 물방울처럼 통통 튀는 피아노 발라드가 텅 빈 저택 한구석을 가득 채웠다.
별들조차 내 연주에 귀를 기울이는 밤이었다.
아침이 밝고, 들떴던 마음이 진정된 후에 나는 모아 뒀던 신문들을 마저 읽었다. 가늘게 새어 들어오는 빛에 의지해 읽었을 때는 보이지 않았던 기사들이 한눈에 들어왔다.
몇 시간을 꼬박 새워 신문을 완독한 끝에 나는 여러 가지 사실을 알아냈다.
우리가 전쟁에서 패배한 건 사실이었다. 세계 대전이라더니, 생각보다 규모가 거대한 전쟁이었던 것 같았다. 본국인 벨담은 망해 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 틈을 타서 또 다른 불길이 번지기 시작했다.
혁명이었다. 벨담이 망해 가는 양상을 보이자 억압받던 입스윈 사람들이 총과 칼을 빼 들고 나선 것이다. 유추해 보건대, 저택을 침입한 사람들도 혁명군이 틀림없었다. 그들이라면 아버지 같은 귀족들에 치를 떨 테니까.
그렇다면 나는 어떻게 되는 거지?
혁명군이 내 존재를 모를 것 같지는 않았다. 나는 마이어 공작과 공식적인 만남을 가진 적이 있는 비스마르 가의 영애였다. 걱정이 되었다. 그 사람들이 나를 찾으러 이곳을 다시 방문할 것만 같았다.
도망칠까? 하지만 어디로? 혼자서는 멀리 이동할 수가 없었다. 게다가 내 몸은 오랜 굶주림과 학대로 쇠약해져 있었다. 최대한 가까운 마을까지도 도달하지 못할 게 뻔했다. 머리를 굴린 끝에 나는 내 죽음을 위장해 줄 시체를 찾아야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얼마 전 병에 걸려 죽었다는 하녀가 떠올랐다. 나와 비밀리에 대화를 나누곤 했던 어린 하녀가 무심코 흘린 이야기가 있었다.
‘다들 마리아가 병에 걸려 죽었다고 알고 있지만, 난 진실을 알아. 병에 걸린 게 아니야. 마리아는 살해당한 거야.’
‘살해당했다니? 누구한테서?’
‘백작 부인께서 마리아를 죽였어.’
그 애는 최대한 목소리를 낮추고 속삭였다.
‘난 알거든. 마리아가 마님께 죽도록 맞았다는 거. 그런데 가만히 있는 사람을 갑자기 죽어라 팰 리가 없잖아? 마리아는 마님께서 절대 용서 못 할 짓을 한 거야. 틀림없어.’
‘뭐야, 은식기라도 훔쳤대?’
‘너 바보야?’
아주 작은 속삭임이었지만, 나는 확실히 들을 수 있었다.
‘백작님이랑 한 침대에서 잔 거지!’
개자식. 제 버릇 못 고치고 또 그런 짓을 벌인 거다. 아무튼 나는 백작 부인이 그만 마리아를 죽이고 말았으며, 살인 사건을 은폐하기 위해 마리아가 전염병을 얻었다는 거짓말을 꾸며 내어 다급히 시체를 치웠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럼 그 시체는 어디로 갔을까? 장례를 치러 줬을 것 같지는 않았다. 장례를 치르려면 목사를 불러야 했다. 눈이 멀지 않은 이상 그게 병에 걸려 죽은 시체가 아니라는 사실쯤은 단박에 눈치챌 텐데, 그런 위험을 감수했을까?
나는 혹시나 싶어 지하로 내려갔다. 지하에는 비스마르 가문의 선조들을 모셔 두는 납골당이 있었다. 납골당을 두는 건 위세 높은 벨담 귀족들이 대대로 물려받은 일종의 전통 같은 거였다.
아니나 다를까, 뒤탈이 생길까 무서워 장례를 치르지도 못한 여자 시체가 그곳에 있었다. 당연히 시체는 부패한 상태였다. 나는 구역질을 하면서도 필사적으로 시체를 질질 끌고 올라갔다.
이제껏 끈질기게 살아남았는데, 혁명군의 총에 맞아 죽을 수는 없었다. 울면서 썩은 시체를 운반하는 쪽이 더 낫지.
내 예상대로 목록에서 내가 빠졌다는 사실을 알아챈 군인들이 저택을 다시 한번 방문했다. 내가 숨겨 둔 시체를 발견한 그들은 죽은 하녀를 들고 떠났다.
이젠 정말 모든 게 끝이었다. 뭘 먹고 살아야 할지 걱정이 되긴 했지만 적어도 이곳에서 혁명군을 또 마주치게 될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었다.
……그런 줄만 알았다.
나는 그때 잠을 청하고 있었다. 잠을 자는 게 기운 없어 보일지는 몰라도 에너지를 아끼기에는 가장 좋은 방법이었다. 적절한 방도를 찾을 때까지는 웅크리고 있는 게 나았다.
나는 혁명군 때문에 마지막까지 침대에서 자 보지 못하게 된 걸 속상해하며 악기 가방 안에 몸을 구기고 눈을 감았다. 그 속에 누워 있으면 생각보다 아늑했다. 안감이 부드럽기도 하고.
그때, 나는 연주실 문이 열리는 소리를 들었다.
찰칵. 문고리 돌리는 소리와 함께 나는 눈을 떴다. 누가 왔다. 누구지? 느리고 둔탁한 발소리가 바닥을 울렸다. 불청객이 피아노 건반을 아무렇게나 누르기 시작했다. 질서 없는 음계가 자못 음산하게 들려왔다.
도망칠 만한 곳을 찾기에는 이미 늦었다. 퇴로가 없었다. 나는 직접 보지 않아도 그가 혁명군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그들이 아니면 대체 누가 여길 찾아온단 말인가? 그들이 내가 시체를 조작했다는 걸 알아낸 게 틀림없었다.
날 잡으러 온 거야…….
끼이익. 경첩 소리가 으스스했다. 나는 자포자기하고 눈을 감았다. 발소리는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리고 내 앞에서 멈추었다.
옷깃 스치는 소리와 함께 케이스 뚜껑이 열렸다. 군복을 입은 젊은 남자가 자세를 낮춘 채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짧게 자른 검은 머리를 단정하게 빗어 넘긴 남자였다. 나는 감정을 들여다볼 수 없는 그의 새까만 눈을 마주 보았다.
내 몸을 눈으로 훑어보던 그가 냉랭한 목소리로 물어 왔다.
“넌 누구지?”
선뜻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이었다. 무엇보다 나는 겁에 질려 있었다. 얼마 전 저택을 휩쓸었던 비명 소리가 귓가에 선했다. 그는 얼마든지 똑같은 짓을 내게 저지를 수 있었다.
내가 대답하지 않자 그가 나를 재촉했다.
“이름이 뭐야?”
어떻게 하지? 그를 답답하게 만들었다간 정말로 목숨이 위험할 수도 있었다. 뭐라도 해야만 했다. 나는 아무 말이나 꾸며 냈다. 진실을 말할 수는 없었으니까. 고민할 시간조차 부족했다.
“릴리예요.”
젠장. 정말 형편없는 가짜 이름이었다.
“여기서 뭘 하고 있던 거지?”
군인이 물었다. 내가 적절한 거짓말을 생각해 내기도 전에, 그는 또 다른 질문을 던졌다.
“원래 이곳에 살던 사람인가?”
그래도 나는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이자는 내가 엘로이즈 비스마르라는 사실을 몰랐다. 어쩌면 나를 잡으려고 저택을 찾아온 게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실낱같은 희망에 매달려 아무 말이나 쏟아 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