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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을 사랑한 건 살아남기 위해서였다-12화 (12/93)
  • <12화>

    요한의 몸에 생채기 하나 내지 않았지만, 날카로운 무기를 들고 그를 위협했다는 것만으로도 공작가와의 모든 인연을 끊어 놓기에는 충분했다.

    왕정과 귀족들의 위세가 예전 같지 않고, 실질적인 권력은 의회와 내각이 쥔 시대이기에 망정이지 옛 시절 같았다면 한순간에 가문이 몰락할 수도 있었다.

    적어도 사용인들이 떠드는 소리에 의하면 그랬다. 나는 가문을 망하게 하려는 의도 같은 건 갖고 있지 않았다. 그저 빌어먹을 요한이 먼저 나를 해치려 했고, 나는 정당한 방어를 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백작은 내 말을 귀담아 들어 주지 않았다. 좋은 대체 상품이 될 수 있을 거라 믿고 돈을 들여 키운 여자애가 공작의 마음을 빼앗기는커녕 가문의 이름에 먹칠을 하고 돌아왔다는 사실이 그의 이성을 완전히 앗아 갔다.

    나는 더 이상 아가씨가 아니었다. 백작은 나를 딸로 인정하지 않았다. 뭐, 처음부터 그가 나를 소중한 딸로 생각한 적이 있기는 했을까 싶지만. 그는 툭하면 나를 불러들여 화가 풀릴 때까지 발길질과 매질을 퍼부어 댔다.

    바닥에 쓰러져 잔뜩 웅크린 채로 구타를 받아 내고 난 뒤에는 좁은 곳에 그대로 갇혀야만 했다. 그는 정말 창의적인 사람이었다. 다락방은 물론이고 청소 도구를 보관하는 벽장에, 심지어는 나를 마룻바닥 밑에까지 밀어 넣었으니까 말이다.

    못질을 한 마룻바닥 밑에서 만신창이가 된 몸을 끌어안고 누운 나는 울지 않았다. 온몸이 쑤시고 아픈 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아픔이 나를 무너뜨리지는 못했다. 오히려 나는 아주 냉정하고 차분했다.

    공작을 위협했던 그날의 선택을 후회하느냐고 묻는다면 나는 조금도 고민하지 않고 대답할 것이다. 절대로 그 선택을 후회한 적이 없었다.

    나는 나 자신을 지키는 데에 성공했다. 나를 해치려고 했던 커다란 남자를 겁에 질리게 만들었고, 그놈의 마수 속에서 스스로 빠져나왔다. 나는 내가 몹시 자랑스러웠다.

    내 몸에 하나둘씩 새로운 상처들이 생겼지만 그런 것쯤은 아무렇지도 않았다. 이건 내가 선택한 결과였으니까. 적어도 매질을 받아 내는 건 더 이상 최악의 상황이 아니었다.

    백작가는 나를 천천히, 고통스럽게 말려 죽이려고 작정했다. 정신을 잃기 직전이면 귀신같이 눈치채고 나를 끌어내 빵 부스러기와 극소량의 물을 먹였다.

    나름대로 내게 복수하려는 것 같았다. 내가 매일 밤마다 후회하며 참회의 눈물을 흘리기를 바랐겠지. 하지만 그들이 나를 괴롭히면 괴롭힐수록 내 정신은 더욱 더 명료해졌다.

    남들에게 복종하며 그들이 원하는 방향을 걷는 대신 나의 의지로 내 운명을 선택한 경험은 나를 끈질긴 사람으로 만들었다.

    나는 살고 싶었다. 나를 제 물건처럼 대한 공작과 아버지가 증오스러워서라도 나는 꼭 살아야만 했다. 그들이 내가 죽기를 바랐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공작이 나를 해치지 못했다면 백작 또한 마찬가지였다.

    나는 미친 남자의 억센 손아귀 속에서 빠져나온 경험이 있었다.

    아무도 내게 운명을 강요하거나 나를 해칠 수 없었다.

    한 번 케이지 문을 박살 내고 바깥으로 나오면 그 안이 얼마나 좁고 답답한 곳이었는지 깨닫게 된다. 그래서 나는 다시는 케이지 속으로 들어가지 않기로 했다.

    여전히, 나는 내 선택을 후회하지 않았다.

    *

    주로 마룻바닥 밑에 갇혀 있다 보면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예를 들면 풋내기 하녀가 새로 들어왔다는 사실 같은 것 말이다.

    나는 언제나 사용인들의 말을 귀담아 들었다. 새로운 하녀의 이름은 록시였다. 록시 마틴. 나이는 열여덟이고, 밑으로 여동생이 다섯 그리고 남동생이 하나 있었다. 불쌍한 동생들을 먹여 살리고 학교에 보내기 위해 하녀 일을 자처한 것 같았다.

    록시는 내 존재 자체를 몰랐다. 내 이름은 저택 안에서 금기시되었다. 오직 명령받은 소수의 사람들만이 내게 접근할 수 있었다.

    나는 이것이 기회임을 알았다.

    마룻바닥 밑이 좁기는 했지만 작전을 세우기에는 최적의 장소였다. 나는 록시의 스케줄과 동선을 며칠 새에 파악했다. 언제 출근하며, 언제부터 언제까지 일하고, 언제쯤 혼자 시간을 보내러 가는지.

    해가 점점 기울고 날이 어두워질 즈음이면 대부분의 하녀들은 퇴근하거나 쉬러 갔다. 록시는 노랫말을 중얼거리는 습관이 있었다. 흥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오는 즉시 나는 최대한 슬픈 생각을 하며 눈물을 짜냈다.

    내가 훌쩍이는 소리를 들은 록시가 노래를 멈추었다.

    “누구 계세요?”

    나는 우는 소리를 내었다. 그리고 눈물 젖은 목소리로 그 애를 불렀다.

    “언니…….”

    머리 위에서 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바닥에 귀를 대고 내 소리를 듣던 록시가 사시나무처럼 떨리는 목소리로 물어 왔다.

    “거기 누구 있니?”

    “언니, 제발 도와주세요.”

    “대체 거긴 어떻게 들어간 거야? 이, 이걸 어떡하지. 사람을 부를 테니까 조금만 기다리겠니?”

    “아무도 날 도와주지 않을 거예요. 난 벌을 받는 중이거든요.”

    “뭐?”

    “제가 잘못을 하긴 했지만…… 너무 춥고 힘들어요. 이러다간 죽을 것 같아요. 잠깐만이라도 좋으니까 꺼내 주시면 안 될까요? 제발…….”

    내 예상대로 록시는 나를 무시하고 지나치지 못했다. 자신보다 어린 여자애가 훌쩍이며 도와 달라고 부탁하는 걸 무시하기에 록시는 너무 착했고, 특히나 어린애에게 약했다.

    동생들 때문에 하녀가 되기로 결심한 열여덟 살짜리 소녀는 내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잠, 잠깐만 기다려 봐! 바닥을 뜯을 만한 걸 찾아볼 테니까.”

    록시가 내게 속삭이더니 어디론가 뛰어갔다. 나는 가슴 졸이며 그 애를 기다렸다. 멀어졌던 발소리가 몇 분 만에 다시 가까워졌다. 록시가 날붙이로 못을 뜯어 내는 소리가 들렸다.

    이윽고 나는 환한 달빛을 등진 채 나를 바라보는 록시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너 괜찮아?”

    나는 야윈 데다 얼굴이 눈물로 범벅이 된 채였다. 굳이 영화배우처럼 전설적인 연기를 하지 않아도 나는 이미 불쌍한 어린애였다. 록시는 그런 나를 가여워했다.

    그 애는 내가 무슨 잘못을 저질렀는지에 대해서는 굳이 묻지 않았다. 이런 볼품없는 여자애가 대단한 잘못을 하지는 않았을 거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나는 입을 다물고 눈물을 훔치며 그런 록시의 믿음을 더욱더 굳혀 주었다.

    내가 사실은 백작의 친딸이고 마이어 공작의 목에 날카로운 조각을 들이대서 이렇게 됐다는 걸 굳이 밝힐 필요는 없었다.

    절반은 내 스스로의 힘으로 살아 냈지만, 나머지 절반은 록시의 도움 덕분이었다고 말해도 과장이 아닐 정도로 그 애는 나를 은밀하게 도와주었다. 들키면 벌을 받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나를 내버려 두지 못했다.

    그 애의 착한 심성을 이용해 먹는 게 조금 미안하기는 했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그 어떤 것도 생존보다 중요하지는 않았다.

    록시는 내게 남은 음식을 가져다주었다. 나는 그것들을 조금씩 아껴 먹었다. 누군가의 도움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들키면 안 되니까.

    그 애는 음식을 신문지에 싸 오곤 했는데, 나는 그 신문지를 버리지 않고 모아 두었다. 낮이 되면 마룻바닥 틈새로 빛이 조금씩 새어 들어오곤 했다. 그 빛에 의지해서 신문을 읽으며 정신이 멍해지지 않도록 나 자신을 단련했다.

    한편 비스마르 가문은 날이 갈수록 가세가 기울어 가고 있었다. 내가 마이어 공작을 위협한 게 정말로 영향을 줬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백작가는 더 이상 예전 같지 않았다. 나는 백작이 언젠가 식사 자리에서 떠들어 댔던 사업 비스무리한 게 실패했을 거라 생각했다.

    가족에게는 화풀이 상대가 필요했고 그게 바로 나였다. 뭐, 그러라지. 나는 그들이 나를 살려 두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충분히 만족했다.

    고통과 굶주림은 내 몸의 일부가 되어 버린 지 오래였다. 새로운 삶과 환경에 적응하게 만들어 놓고 이제 와서 내가 견디지 못해 죽길 바라는 건 어불성설이었다.

    나는 계속해서 마음 약한 애들을 꼬드기고 모아 둔 신문들을 읽었다. 언젠가 이 저택을 탈출할 기회에 대해 생각하면서.

    당장 할 수 있는 게 없었기 때문에 나는 적절한 기회가 오기를 기다리며 최대한 버텼다.

    그렇게 몇 년이 흘렀다.

    난 내가 몇 살인지조차 까먹었다. 그런 건 중요한 게 아니었다. 내가 살아 있다는 게 중요하지. 나는 그때 내 방처럼 익숙해진 좁은 공간에 누워서 생각하고 있었다.

    신문에서 얼핏 ‘세계 대전’에 대한 이야기를 읽은 게 기억났다. 전쟁이 난 지 한참이 된 것 같은데 여긴 왜 이리 평화로운 걸까?

    나는 눈을 감고 적군들이 이 나라에 쳐들어오는 것을 상상했다. 그들이 이 저택의 문을 박차고 들어오는 모습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백작은 귀족이라는 이유로 전쟁에도 징집되지 않았다. 그는 아마 제대로 싸울 줄도 모를 것이다.

    그들이 백작을 죽이고, 금은보화를 다 털어 가고 떠날 때까지 이 밑에 누워 숨을 죽이고 있어야지. 아무리 적군들이라 해도 설마하니 바닥 밑에 사람이 있을 거란 생각은 못할 거야. 그들이 전부 떠나고 나면, 나는 자유가 되는 거야.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커다란 소음과 함께 사람들이 들이닥치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바닥 밑에 누워 웅크린 채 숨을 죽이고 생각했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고함 소리와 비명이 겹쳐 들렸다. 친절한 손님들의 방문은 확실히 아니었다. 수 쌍의 구둣발이 머리 위를 정신없이 오가며 골을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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